男女戀愛白書 [남여연애백서] -10

양윤정200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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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아파트 놀이터에? 그네 타고 있다고요? 진짜 정신세계 독특하다. 알았어요. 글로 갈께요.”


여진은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지면 바로 보인다는 삼미 아파트를 찾기 시작했다.

연고도 없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이정후는 혼자 그네를 타고 있단다.

혼자타기 심심하다며 와서 그네 좀 밀어달라는 이정후의 말에 여진은 기가 막히다가 한편으로 집에만 있어서 심난했는데 잘됐다 싶어 그네 밀어주는 건 좀 그렇고 저번에 모델비로 받은 돈으로 밥이나 사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이정후를 만나서 그의 정신세계를 듣고 있노라면 그 순간만큼은 백진우는 잊게 되었다.

오늘 역시, 행여나 진우한테 전화가 올까봐 여진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전화기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고, 전화기가 고장이 난건 아닌 가 괜스레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면 자신의 머리만 쥐어박던 여진이다.

 

기분이 심난해서 죽을 지경이다. 여은이에게 진우의 일을 듣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진우가 술을 마시고, 여진의 안부를 묻고, 싸움을 하고, 경찰서까지 갔다는 걸 들었을 때 여진은 걱정과 함께 오만가지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헛된 기대감과, 부질없는 착각과 부푼 희망이라는 걸 그렇게 깨달았음에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삼미 아파트 놀이터를 찾은 여진은 그네를 타고 있는 정후를 혀를 차며 다가갔다.

“쯔쯧, 애도 아니고 웬 그네?”

“하여간, 느려 터져요,”

“왜 또 시비?”

“토끼와 거북이 동화 알아요?”

“알죠.”

“거기 나오는 거북이 같아.”

“그 동화 내용 뭔지나 알고 그래요? 그리고 게으른 토끼보다 부지런한 거북이가 낫지 않나?”

“말은 잘해, 정말.”

어린아이마냥 두 발을 하늘높이 쳐들고 그네를 타고 있는 정후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타봐요. 오랜만에 타니까 재밌네.”

“경비 아저씨 오기 전에 빨리 가요. 말 만 한 어른이 애들 그네 타면 끊어져요.”

“요즘 애들 나보다 등치 좋더만.”

“자기네 집 놀이터도 아니면서...”

“여기 놀이터를 꼭 여기 사는 사람들만 타라는 법 있나?”

“쪽팔리니까 그렇죠. 쟤들 눈 안보여요?”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는 아이들,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들,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아까부터 정후와 여진에게로 쏠려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늘을 뚫고 올라갈 정도로 그네를 잘 타고 있는 이정후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게 맞을지도...

 

그중 남자아이가 고사리만한 손으로 여진의 옷을 끌어당긴다.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라는 호칭에 마음 상한 여진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얘야, 나는 아줌마가 아니라 누나란다.”

“아줌마. 저 형아 처럼 타고 싶어요. 그네 밀어주세요.”

'왜 난 아줌마고, 이 정후는 형아야?'

여진은 그리 묻고 싶었지만, 10살도 채 안 되보이는 어린아이에게 따질수도, 그렇다고 혼낼수도 없었다. 머리통이라도 한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여진은 거절할수가 없었다.


“일루 앉아봐.”

여진은 남자아이를 그네에 앉혀주고 작은 엉덩이를 밀어주었다. 처음엔 성의없이 대충 밀어주던 여진은 조금씩 속도감이 붙어 꺄르르 웃는 아이를 보자 덩달아 신이 났는지 더 힘껏 밀어주었다.


“꽉 잡아. 더 높이 올려 줄 테니까.”

“와~ 슈퍼맨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배트맨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악당들 모두 헤치운 슈퍼맨 배트맨은 우리의 용사.”

마치 슈퍼맨과 배트맨이라도 된 마냥 목청높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의 노랫소리가 하늘높이 퍼져나간다.


“저도 태워 주세요.”

“저도요.”


노래까지 부르고 있는 꼬마아이가 부러웠는지 놀이터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모두 그네에 몰려들었고, 하나둘씩 그네를 태워달라는 눈빛을 강력하게 쏘아대고 있었다.

 

키가 작은 아이들이라 누가 그네를 밀어주지 않는 한 하늘과 바람을 을 맛볼수가 없다. 여진이 어릴적에도 그랬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그네를 밀어주지 않으면 그네는 제자리에서만 왔다갔다 할뿐이다. 운좋으면 동네 오빠나 언니들이 그네를 밀어줬는데, 여진은 그때의 그 느낌은 잊을수가 없다. 파란 하늘이 눈앞에 보였다가 순식간에 멀어지고, 숨쉬기 조차 힘든 바람의 속도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스릴있으면서 재밌는 그네타기는 더운 여름날에 선풍기 보다 더 시원했다. 그때 생각이 나자 여진은 아이들의 부탁의 눈길을 또다시 거절할수가 없다.


“이정후씨, 뭐해요. 태워달라잖아요.”

“나 타기도 바빠죽겠는데...”

“애들 울겠어요. 언능 태워주고 가요.”


줄까지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을 모두 그네를 태워주고 나서야 여진과 정후는 삼미아파트 놀이터를 빠져나올수 있었다.

근처 냉면집에가서 얼음이 동동떠있는 냉면을 뚝딱 먹어치운 두 사람은 따사로운 햇볕을 적당히 가려줄 나무 그늘이 있는 공원을 걷고 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냉면에 이어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사준다는 정후가 편의점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 두개를 사들고 나왔다.


“웬일이래? 아이스크림까지 사주고.. 좋은일 있어요?”

아이스크림 포장을 뜯으며 여진이 물었다.


“좋은일은 무슨... 아까 애들 웃는 모습 보니까 너무 이쁘더라.”

“애들은 원래 다 이뻐요. 그만한 나이때 안이쁜 사람이 어딨어.”


여진과 정후는 편의점 바깥에 있는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참, 나 오디션 봐요.”

“무슨 오디션?”

“김찬우 감독 영화에.”

“김찬우 감독? 그 감독 꽤 유명한데....”

“경쟁률이 천대 일.”

“힘들겠네.”

“격려는 못해줄 망정 힘들겠다니..”

“그렇지 않나? 백대 일도 아니고 천대 일이라는데.”


정후가 눈을 흘기며 아이스크림 한입을 냉큼 베어 물며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김찬우 감독, 아무나 캐스팅 하는 감독 아니에요. 겉만 뻔지지르한 사람 데려다가 주인공 시켜줄거 같아? 어림없지.”

“그말은 내가 겉만 뻔지르르하다는 소리?”

“아닌가 그럼?”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하신데? 내 연기 보지도 못했으면서.”

“보나마나 뻔하지. 학예회 연극 수준?”

“내가 당신 대본보고 유치원생 일기 수준이라면 좋겠수?”

“뭐예요?”

 

여진이 버럭 소리쳤다.


“거봐거봐, 바로 화낼거면서...”


이번엔 여진이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물며 아그작아그작 씹었다.

두사람다 서로를 흘겨보다 등을 돌려앉았고, 여진이 먼저 이정후의 성질을 건드렸기에 손가락으로 정후가 앉은 파라솔 쪽을 톡톡 건드리자 정후가 돌아본다.


“왜요?”

“한번 해봐요. 연기..”

“학예회 연극 수준이여서 안할랍니다.”

“해봐요. 내가 봐줄게.”

“연기의 연자로 모르는 서여진씨가?”

“이거 왜 이래요? 나 명색이 드라마 작가에요.”

“작가 지망생이겠지.”

“작가 지망생이라 해도 연기잘하는지 못하는지 보는 눈은 정확하거든요. 내가 본 드라마만 해도 수십편인데 연기자 될놈도 못알아볼까봐?”


여진은 꽤 자신있게 말했다. 드라마를 많이 보게 되면 과연 저 배우가 배역에 충실하고 있는 배우인지, 아무 생각 없이 연기만 하고 있는 배우인지 보는 눈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기가 맡은 배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배우는 설렁설렁 연기만 하는 배우와는 분명 달랐다. 특히나, 극이 최고조에 올라와 있는 상태의 눈물씬은 안약을 넣고 억지 눈물을 짜내는 배우와 감정몰입으로 눈물 콧물까지 범벅이 되면서도 실감나게 연기하는 배우와는 시청자가 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배우는 드라마의 인물과 혼연일체가 되는것, 분명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 같다고 느껴지지 않고 드라마속 배역의 그 사람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이름에 배우라는 타이틀을 감히 붙일수는 없다. 요즘은 너나나 할것없이 다 배우라고 지칭하고 다니는데, 여진은 연기도 못하는 얘들이 나와 억지 눈물을 흘리고, 거짓된 연기를 할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나중에 드라마 작가가 되면 절대, 저런 연기자들은 써먹지 않으리 이를 갈면서..


“내기합시다. 우리.”

“무슨 내기?”

“내 연기가 서여진씨한테 몇점이나 받는지.”

“좋아요. 합시다, 내기.”

“뭘 걸고?”

“꼭 그런걸 걸어야돼나?”

“그래야 승부욕이 생기지.”

“좋아요, 내기에서 지는 쪽이 술사주기.”

“술에 환장했어요? 여자가 만날 술타령이야.”

“그럼 뭐요?”

“만원빵..”

“만원빵? 지금 돈거래를 하자고요?”

“자고로, 사람은 돈에 약하거든. 돈이 걸려있어야 눈에 불을 켜고 하지.”

“쯔쯧, 어디서 못된건 배워가지고.. 그런 내기라면 안할래요.”

“이기면 되잖아요. 여진씨 보기에 내 연기가 그저 그렇다 싶으면 과감히 아웃 시키면 되니까.”

“자신있나보네?”

“그러니까 잘 판단하라구. 공과사를 구분해서.”

“미안하지만, 유치해서 그런 내기는 안할랍니다.십만원빵이이라면 모를까, 쪼잔하게 만원이 뭐야, 만원이..”

여진이 비아냥거렸다.

“땅 파봐요. 돈 만원 나오나. 아무튼, 언제 어디서 할지 모르니까 맘 단단히 먹어요.”

 

얼굴하나 믿고 배우가 되려는 한심하기 그지 없는 사람으로 몰고하는 여진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다짐으로 결렬히 말하는 정후는 내기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여진의 말을 끝까지 무시하고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휴지통에 골인시키고 일어섰다.

 

“가죠.”

“어디로?”

“집으로 가야죠.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가줄게요.”


어디로 가냐고 묻는 말에 정후는 당연히 집으로 가자고 대답했고, 여진은 내심 섭섭해졌다.

연인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 관계도 아닌 두사람은 더이상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여진은 내심 조금만더 같이 있었으면, 같이 있어줬으면 하고 속으로 바랬지만 무심한 정후는 여진과 더는 노닥거리고 싶은 생각이 요만큼도 없는것처럼 보였다.

꼴랑, 냉면에 아이스크림 사줄거였으면 부르긴 왜 불러? 꿍한 여진이 속으로 툴툴댔다.



“그 불여시한텐 그 뒤로 연락 와요?”

꿍해서 아무말 없이 걷고만 있던 여진이 조심스레 묻자,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정후가 갑자기 여진의 어깨를 잡아세운뒤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왜.. 왜 이래요.”

“가만 있어봐요.”

“가만은 있는데.. 이것 좀 놓고...”

여진이 어깨를 비틀자, 이정후는 도망갈수 없도록 더욱더 어깨를 움켜잡았다.


“움직이지 말아요.”


반항하던 여진이 정후의 그한마디에 잠잠해졌다. 중대한 발표라도 할것처럼 여진의 눈동자만을 응시하는 이남자의 갈색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꽤 섹시해보인다고 여진은 잠시 생각했다.

신음소리 비슷한 숨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올거 같아 여진은 숨을 후욱 들이마시고 그 숨을 꽉 참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것인지 조바심이 난 여진은 그의 붉은 입술이 열리길 기다렸다.

드디어, 한껏 뜸을 들여 여진을 감질나게 만들었던 정후가 입을 뗐다.


“지금부터 내말 잘 들어요, 여진씨. 난 말입니다, 앞으로 여진씨가 걸을때, 당신의 발을 부드럽게 받쳐주는 흙이 될겁니다. 여진씨가 앉을때, 난 여진씨의 무릎 밑에 엎드린 넓고 편평한 그루터기가 될거고, 여진씨가 슬플때, 난 여진씨의 작은 어깨가 기댈 고목나무가 될거에요. 여진씨가 힘들때, 난 두팔 벌려 하늘을 떠받친 숲이 될거고, 여진씨가 울때, 난 별을 줍듯 여진씨의 눈물을 담아 기쁨의 생수를 만들거에요. 세상의 모든 숲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큰 사랑을 줄게요, 여진씨와 함께..여진씨 안에서….”



순정만화속 테리우스 마냥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와 정후의 머리카락을 날리자, 사방천지에 있는 사람들이 여진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오로지 이정후, 이남자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여진은 보았다.

테리우스가 강렬한 눈빛을 캔디에게 쏘아댈때 만화가들이 주로 써먹는 식상하기 그지 없는 샤방샤방한 꽃바람 배경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남자, 지금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걸까? 도저히 예상치 못한 말에 여진은 아직까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정후의 시선에 흔들리는 눈동자로 마주보았다.

 

정후가 여진의 어깨를 움켜쥐고 나를 위해 흙이되고, 그루터기가 되고, 고목나무가 된다는 말도 되지 않은 허풍을 떨어대는 짧은 시간까지 여진의 머리 속엔 만감이 교차되었다. 처음엔, ‘이 남자 왜 이래? 더위 먹었나? ‘두 번째 엔 ‘어디다 손을 대? 뺨때려버리기 전에 이손 못 치워?’였지만, 지금은 영화 속 대사처럼 달콤하기 그지없는 속삭임에 처음과 두 번째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온몸이 아이스크림 녹아내리듯 그의 속삭임에 서서히 녹아들어가고 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묘한 흥분이란 말인가. 여진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쥔 정후의 두 손이 더욱더 힘이 들어가 내 몸을 꽉 안아주었으면, 그래서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팍 파묻혀봤으면 하고 바랬다.

 

떨린다. 미치게 떨린다.

요놈의 심장이, 요놈의 가슴이, 요놈의 몸 뚱아리가 갑자기 제어가 안돼 제멋대로 여진에게 반항을 하기 시작한다.

'미쳤니? 어서 뿌리치지 못해?' 라고 경고를 주지만 이미 제어불가능 상태다.

그동안 많이 굶주린 모양이다. 하긴 백진우와 이별한지 2달째에 접어 들어갔으니 남자의 품이 그립긴 하겠지.. 하지만 이건 아니다. 다른 남자도 아니고 하필이면 오만방자하고 얼척 없는 이정후에게 설레임 이라는 걸 느끼다니..

허나, 설레이는 건 이 몸뚱아리의 주인인 서여진도 어쩔 수 없다. 제각기 따로 노는 이 몹쓸것은 주인의 말은 듣지도 않는다.


이 몹쓸 것들의 발작은 조금씩 강도가 쌔지기 시작한다.

눈도 멀었는지 이남자의 눈에 이미 빨려 들어가 몽롱해졌고, 마주보이는 이남자의 붉은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싶은 강한 충동까지 느꼈다.

망할 놈의 얼굴이 그의 얼굴을 향해 1mm다가가고 있었고, 망할 놈의 눈이 저절로 감겨진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여진의 앞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입술에서 전해져오는 숨결에 여진은 온몸에 전율까지 느낄수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그의 입술의 감촉이 느껴질 것이다. 솔직히... 기대 된다.

허나,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입술에 맞닿는 느낌이 없었고, 이상함에 눈을 살포시 떴을 때, 이정후가 “이 여자가 왜 이러나”하는 듯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분명, 분위기상 키스 타임이었는데 말이다.


“편지에서, 박신양 대사. 어때요? 여진씨 보기에 내 연기.. 봐줄만하죠?”


그 순간, 미친 듯이 달름박치던 심장도, 소름끼치게 설레었던 가슴도 정지상태가 되었다.

‘뭐? 편지에서 박신양 대사?’

영화 속 명대사를 읊었다는 정후의 말에 여진은 맥이 탁 풀렸다. 주인 말 안 듣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몸 뚱아리가 비틀대고, 꿈을 꾸듯 몽롱해져있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내 연기에 몰입 잘하던데.. 이만하면 백점짜리 아닌가? 어때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보기에...”



자신의 연기에 매우 흡족했는지 정후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정후가 기세 등등 한건 이 여자, 서여진이라는 여자의 행동이었다. 목석처럼 딱딱하기만 했던 여자가 사랑의 속삭임 하나에 순한 양이 되었고, 쌈닭처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던 여자가 사랑의 속삼임에 두 눈에 촉촉한 별을 담고 있었다. 학예회 연극수준일거라고 정후의 연기를 깔아뭉개던 여진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면 그동안 갈고 닦았던 이정후 표 연기를 보여줘야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아이템이 없었다.

길바닥에서 과격한 액션 씬을 보여 줄 수도, 눈물연기를 보여 줄 수도, 그렇다고 죽는 연기를 보여 줄 수도 없었다. 간단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것.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영화 ‘편지’의 대사가 떠올랐다.

이여자의 얼굴을 마주보고 감정몰입하는 게 어려울 거 같지만 정후는 눈 딱 감고 닭살이 돋는 대사를 읊어 내려갔다. 그런데, 처음엔 뺨이라도 후려칠 것처럼 반항하던 여자가 어깨에 힘이 빠지더니 추욱 쳐졌다. 어쭈? 이젠 눈까지 풀렸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두 손이 떨리는걸 보니, 이 여자 무지 떨고 있다. 학예회 연극수준이라고 깔아뭉개더니, 이정후의 연기에 서여진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정후가 이긴 것이다. 정후는 승리의 기쁨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겨우 참아냈다.


“자. 만원 내놔요.”


손바닥을 펼쳐서는 돈을 내놓으라고 으르장을 놓는 정후가 뻔뻔스럽게 느껴진 여진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지금 연기를.. 했다고요?”

“그럼.. 설마 진짜로 했겠어요?”

“장난해요?”

“장난...아닌데... 언제 어디서 할지 모른다고 분명 말했잖아요. 빨리 내놔요. 만원.”

“그..그것도 연기라고.. 학예회 연극수준. 저질. 삼류!!!!”

“저질? 삼류?”

“만원 못주겠어요. 왜냐고? 이정후씨 연기, 빵점이니까. 알아들었어요? 빵점이라고요!”


입술까지 부르르 떨리는 여진이 그리 소리쳤다.



*****


“웃겨. 그것도 연기라도... 기가 막혀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정후의 허무맹랑했던 연기에 여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생각할수록 열불이 났다. 버스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있음에도 등에 땀이 차올랐다. 사람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연기랍시고 말도 안 되는 영화 속 대사를 나불대다니. 그것도 멜로영화의 닭살 돋는 대사를 말이다. 그래놓고 돈 만원을 달라고? 뭐 이런 사기꾼이 다 있어? 정강이라도 걷어 차주고 왔어야 이 분함이 풀렸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여진은 화가 났다. 하지만, 곧 울상이 되어버린 여진은 진정되지 않는 숨을 몰아쉬며 가슴에 손을 데어보았다. 진정되지 않는 이 망할 놈의 심장.


‘뭐니 너.. 아직도 살아 있었던 거니? 백진우랑 헤어진 날.. 그때 너도 죽은 지 알았는데.. 아직까지 살았던 거야? 주책이다. 왜 죽은척하다 불쑥 튀어 나오는 건데.. 사람 봐가면서 튀어나오던가. 왜 하필 이정후니. 왜 그딴 놈한테 설렘을 느꼈던 거냐고.... 제발 진정 좀 해라. 응?’



그때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아직까지 뛰고 있는 왼쪽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여진의 기분은 실로 묘하다. 도대체 무슨 기분 일까?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미칠 노릇이다. 연기라는 걸 알았음에도 이 망할 놈의 심장은 이정후라는 이름하나에 뛰고 있다.

쓸데없는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 안 그래도 머리 터지기 일부직전인데 난데없는 이정후가 그녀의 고민거리에 개입되었다. 결론은 삼류 연기로 끝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이정후가 삼류연기를 하는 동안 여진의 가슴은 소름끼치도록 뛰었던 건 사실이다. 이정후 딴에는 연기였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여진은 설레었던 것이다. 요 망할 놈의 심장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미쳐. 정말..”




8장.

[남자의 첫사랑]

남자의 첫사랑은 가슴 깊이 묻어둔 사랑이다.



6월의 햇살은 짜증나게 뜨거웠다.

올 여름은 빨리 온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렸음에도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으로 여진은 눈을 찌푸렸다.

마트에서 라면 두 봉지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서던 여진은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놓쳐버렸다.

집 앞에서 여진을 기다리고 있는 진우를 발견한 것이다. 잘못본건 아니다. 정말로 진우가 그 곳에 서 있었다.

여은이에게 진우의 얘기를 들은 지 3주가 지난 후였다. 혼자서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하고, 경찰서 까지 갔다 왔다던 진우가 그 백여시랑 헤어지고 찾아오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여진을 찾아왔다. 물론, 용서를 빌거나,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꺼낼지는 여진 역시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진우는 찾아왔고, 여진을 찾아올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용서해 달라고... 한순간의 실수였다고...


“핸드폰 번호 바뀌었더라.”

바닥에 떨어진 검은 봉지를 주워 여진이 손에 쥐어주는 진우를 멍하니 바라보던 여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전화하는 건 실례인거 같아서.. 무작정 찾아왔어. 미안해.”

많이 야윈 얼굴이다. 신촌에서 봤을 때 얼굴 가득 퍼진 행복한 웃음 바이러스는 사라지고,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얼굴이다. 까맣게 돋아난 턱수염은 꽤 오랫동안 진우가 면도를 안했음을 짐작케 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얘기 좀 할래?”


진우와 여진은 빌라 옆에 있는 작은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예전엔 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매일 와서 앉아 있던 벤치.

진우가 여진을 데려다 주고 여느 연인들처럼 헤어지기 싫을 때마다 5분 만 더 10분만 더 하면서 앉아 있던 곳에 그들은 다시 앉았다. 여진의 눈엔 아주 잠시 벤치에 앉아 있는 진우와 여진의 행복했던 과거의 모습이 환영처럼 비쳤다 사라졌다. 그리고 아주 잠시 여진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사라졌다.


“놀랐지? 갑자기 찾아와서..”

“조금..”

“미안하다.”

“괜찮아.”


말이 괜찮아 지, 여진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님’ 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노래가사가 이리도 마음에 와 닿을 줄이야 미처 몰랐다. 불과 3개월 전에는 ‘님’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한 ‘남’이 되었다. 이곳에서 진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별을 세던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현재의 모습에 여진은 마음이 공허해진다.


“여은이 만났다며..”

“많이 취했었나봐. 그땐 미안했다고 여은이 한테 전해줘.”

“백진우 답지 않게 왜 싸움을 했어?”

“그러게...”

“......”

“걱정.. 했어..”

“미안해.”


진우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을 담배에 붙이자 치지직 재가 타들어간다. 훅 하고 입김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연기가 공중에 흩어지고,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진우의 표정은 매우 슬퍼보였다.

 

“무 슨 일... 있어?”

진우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여진이 물었다.


“여진아.”

“응?”

“오늘 널 찾아온 건.. 너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야.”

“염치없는 부탁? 무슨...”


여진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날이 뜨거워서 봉지엔 든 아이스크림은 조금씩 녹아가고 있었지만, 여진은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염치없는 부탁을 하기위해 찾아왔다는 진우의 뒷말이 궁금할 뿐이다.

진우는 피다만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정인이가.. 헤어지자고 했어.”


역시, 여진의 예상은 맞았다. 진우가 혼자 술을 마시고, 싸움을 하고, 경찰서까지 갔다 온 원인제공자는 그 여시 같은 기집애 때문이었다. 그 여시 같은 기집애가 여진의 바램대로 백진우를 버린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진우의 입에서 백여시랑 헤어졌다는 그 말이 튀어나오자 여진은 한편으론 고것 참 샘통이다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것으로 인해 마음 아팠을 진우가 안쓰러워졌다.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아본 입장이기에 진우의 지금의 심경을 여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슴이 쓰라리다 못해 찢어 질것만 같고, 몇날며칠을 울어도 눈물샘은 마르지 않는다. 실실 웃기도하다가 금새 무거운 한숨을 내쉬게 된다. 비록, 그 모든 고통을 안겨 준건 진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진은 똑같은 아픔을 당했을 진우가 가엾다. 말로는 나버리고 간 놈 천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라고 이를 갈았지만, 막상 발병 난 꼴로 돌아온 진우를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여진은 자신의 저주가 진우에게 상처를 준건 아닌가 싶어 고개를 떨구었다.


“왜 헤어졌는지... 물어 봐도 돼?”

“하아...”

진우는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 대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여진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또 한번 물었다.

“왜?”

“운명이 란 게 존재한다면, 난 그 얘와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그 백여시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진우의 말에 여진은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명동거리에서 칠칠맞게 코피를 흘리고 있는 여진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진우의 환한 미소를 보는 순간, 여진은 진우가 운명의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여진은 진우도 자신을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여진이 아닌 그 백여시를 운명의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진우의 속마음을 들은 여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첫사랑이었어. 정인이는.”

“첫..사랑?”


운명이라는 치명적인 말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상황에서 첫사랑이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여진은 완전히  ‘KO‘당해버렸다. 완패였다.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었다.

남자의 첫사랑은 여자의 첫사랑과 다르다고 한다.

남자의 첫사랑은 가슴 깊이 담아두는 사랑이다. 쉽게 잊혀지지도, 잊을 수도 없는 사랑.

진우는 백여시를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진에게 헤어짐을 말 했었다. 이년동안 만났던 여자에게 상처를 남겨주는걸 알면서도 첫사랑이기에 모질게 버렸다. 이제야 여진은 왜 그토록 진우가 자신을 떠나려 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고등학교 때부터였어. 그땐 너무 어렸기에 내 감정 솔직하지 못했어. 그저 가슴앓이를 했을뿐 좋아한다는 내색한번 못해봤어.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잊혀져갔는데 군대 휴가 나왔을 때 다시 만났어. 다시 만났는데도 난 내 마음 표현할 수가 없었어. 왜냐면, 너무 좋아했으니까. 너무 사랑했으니까. 군대 재대하고 그때 고백하자고 기다렸는데, 재대하고 나서 찾아 갔을 땐 없더라고. 그렇게 또 잊혀져갔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잊어갔어.”

“........”

“그러다가.. 이번에 만났어. 우연히. 꽃집에서.. 너한테 꽃 사 준 날. 그때 다시 만났어.”


꽃 사 준 날?

여진은 재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진우가 꽃을 사주던 날 그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본 결과 그날은 여진의 생일날이었다.

1월 21일. 그날 진우는 장미꽃 백송이를 여진에게 안겨주었다. 기분이 황홀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남자에게 장미꽃 백송이를 받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한지 받아본 여자만이 알것이다. 아무튼 그날 진우는 첫사랑이었다는 백여시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단다.

여진에게 장미꽃 백송이를 안겨주던 날, 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는 첫사랑과 재회를 한것이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다. 황홀하고 행복한 생일날 자신의 남자친구가 그토록이나 그리웠던 첫사랑과 만나 흔들렸다는 것이, 행여 라도 장미꽃 백송이가 시들까봐 열과 성을 다해 물을 가라주고, 후에 말려서 장미꽃잎을 코팅해서 보관까지 해두었는데 그 장미꽃 백송이가 진우의 첫사랑의 손을 거쳐 포장이 되어 여진에게 전해졌다는 것에 분노했다.

더군다나 장미꽃 백송이를 안겨주며 ‘생일 축하한다, 28번째 생일도 함께 하고 싶다’는 고백을 하던 진우가 그때부터 백여시와 가까이 했음을 지금에서야 알았다는 것에 여진은 더 큰 배신감이 들었다.


“진우야. 난 지금 네가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지 모르겠어. 첫사랑이었다고? 내 생일날 첫사랑과 만났고 그때부터 우리는 사랑을 키웠다 그 말 알려주려고 나 찾아 온 거니? 누가, 네 첫사랑 얘기 따위 들어주려고 너랑 이러고 있는지 알아?”


흥분해서 소리치는 여진 앞에 진우는 그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때리면 맞을테고, 욕을 하려면 욕을 하라는 식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런 진우의 모습이 여진에게는 때릴수도, 욕을 할수도 없는 상황만을 남겨주었다.


“내 맘에 비수까지 꽂고 다시 만난 첫사랑과 왜 헤어졌는데? 나한테 염치없는 부탁 하려고 찾아왔다고 했지? 그래, 그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게 뭐니? 그 여자 알았데? 백진우가 양다리 걸쳤다가 조강지처 배신하고 지한테 간 거 알았데? 그래서 미안하다고 헤어지자 디?”


눈물이 멋대로 흘러내린다. 슬퍼서 나는 눈물이 아니다. 이건, 2년 동안 진우와 함께 쌓았던 사랑의 탑이 알고 보니 서여진 혼자만이 쌓아놨던 탑이라는 것에 분노했기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다.


“가. 너랑 더 이상 하고 싶은 말 없어.”


여진이 벤치에서 일어서자, 진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무너지듯 여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와줘. 여진아. 너밖에 나 도와줄 사람 없어. 염치없는 거 아는데, 그런데도 부탁 하려고 찾아왔어.”

“백 진우!”

“그 남자, 여진이 네가 만나는 그 남자를 사랑한데, 정인이가..”

“뭐?”

“사랑한데.. 그래서 돌아가고 싶데. 그 남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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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여진이가 이정후의 상스러운 매력이 어떤것인지 깨닫게 되는군요..-_-

기집애, 좋겠다.^^

뭐, 비록 연기로 끝났지만.. 저도 이정후의 상스러운 매력에 함께 빠지고 싶답니다.

그나저나, 진우의 염치없는 부탁은 무엇일까요? 궁금하시죠?

다음편에 계속 된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