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장애인

박영진200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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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장애인

(사도행전 3장을 중심으로)



사도행전3:1~10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장애 호칭


   장애인 이해의 척도


  장애인에 대한 일반의, 혹은 교회의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문제는 장애 복지나 장애인 선교의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장애인 이해의 척도를 가늠 하는데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기본이 된다 할 수 있는 것이 장애인 호칭이다. 그런 면에서 장애인 호칭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장애인 이해에 대한 일반의, 혹은 교회의 애정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에서보다 교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바로 장애인의 호칭에 조심성을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교회에서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에 의해 들을 수 있는 장애인의 호칭은 적지 않은 실망감을 줄 때가 있다. 설교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회에 대해서도 리더로서의 자질을 스스로 구비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사용하는 장애인 호칭을 듣고 있노라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한다. 설교자들이 사용하는 장애인 호칭은 이를 민감하게 들을 수밖에 없는 장애인 사역자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장애인 당사자에게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할 때가 많다. 설교자가 장애인 호칭을 조심성 없이 사용하므로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자칫 교회가 장애인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할 줄 모르는 무지한 교회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기 쉽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장애인 호칭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가령 사도행전 3장 2절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라고 되어 있는 것을 ‘선천적 지체 장애인’이라고 고쳐 설교한다면 교회와 설교자에 대한 장애인의 수용성은 훨씬 진보할 것이다. 설교자의 이런 장애인 호칭은 아주 사소한 관심만으로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은 사소한 관심만으로도 교회에 출석하게 된 장애인으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호의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수용 자세를 취하게 한다. 교회의 사명은 영혼을 건지는 것이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도 더 귀중하다. 영혼을 건지는 교회의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일에 교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당연히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일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막히는 곳을 뚫어야 한다. 장애인에게든 일반인에게든 교회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장애인 호칭을 조금도 주의하지 않고 사용하므로 장애인이 복음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듯 하다. 장애 호칭의 바른 사용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장애 호칭의 올바른 사용은 장애인을 이해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장애 호칭은 ‘장애발생 시점의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선천적 장애’이고 둘째는 ‘후천적 장애’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3장 2절의 장애인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이를 ‘선천적 지체 장애인’이라고 고쳐야 한다.


  성경의 장애 호칭


  한글 개역 성경은 장애 호칭에 관한 한 빨리 교정해야만 하는 나쁜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경(출4:11, 19:14, 21:18, 27:18, 28:29, 시146:8, 사29:18, 35:5등), 중풍 병자(마4:24, 9:2, 행8:7등), 앉은뱅이(눅7:22, 행3:2, 행8:7, 14:8등), 절뚝발이(레21:18, 삼하4:4, 5:6,8, 9:3, 19:26, 렘31:8, 마15:30,31, 18:8, 막9:45, 요5:3)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에서 사용하는 용어로는 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하다.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상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잘못된 용어의 수정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 번역상의 문제가 속히 수정되어져야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현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잘못된 표현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의 본문을 낭독하는 경우에는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지체 장애인’이라고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애인이든지 일반인이든지 누구라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때 장애 호칭을 고치지 않는다고 문제삼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할 때 장애 호칭을 사려 깊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장애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드러낸다는 오해를 받기 쉽고 이로 인해 초래되는 장애인 선교에 심각한 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면서 만나는 성경의 장애인 호칭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장애 유형별 호칭


  참고로 장애 유형에 따라 장애인 호칭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살펴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와 바르게 사용하는 경우를 구별해 보기로 한다.


  ⑴첫째로 등으로 불리어 지는 장애인을 “지체 장애인”이라고 해야 한다.


  ⑵둘째로 으로 부르는 장애인을 “시각 장애인”이라고 고쳐야 하며


  ⑶셋째로 라고 하는 장애인의 경우에는 “언어 장애인”이라고 호칭해야 한다.


  ⑷넷째로 라고 하는 장애인인데, 이는 “청각 장애인”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며,


  ⑸다섯째로 이라 칭하는 장애인의 경우이다. 이는 “정신 지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정신 지체라는 말은 정신 발달이 조금 지체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설교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장애인의 호칭을 말할 때 사려 깊게 사용하지 못했을 때 이를 듣게 되는 장애인 당사자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장애 호칭 사용의 오류는 일차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부족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사회적, 문화적, 교육적, 인습적이고 종교적인 종합적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 사용되고 있는 장애 호칭의 바른 사용이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에는 장애인들의 의식과 삶의 태도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는데, 이는 많은 장애인들이 일반의 잘못된 장애 호칭을 중대한 문제로 생각하여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바른 계몽을 위해 일반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장애인 계몽을 위한 장애인의 태도와 자세의 적극성은 일반의 적극성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장애인은 설교자나 그리스도인들이 바르지 않게 사용하는 장애 호칭의 경우를 들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잘못을 지적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할 용어를 가르쳐 주고 정확하게 사용해 주기를 요구해야 한다.


  장애인의 인격을 이 땅처럼 고려하지 않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곱사춤’이니 ‘병신춤’이니 하면서 괴상하게 몸부림치는 사람을 좋아하고 이를 ‘인간문화재’로 보호하고 존경했던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장애인 호칭의 무지가 장애를 천박하게 생각하는 문화적인 뿌리에서 싹튼 것이라고 보았을 때 우리의 문화가 어느 정도로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빨리 고쳐 써야 하고 속히 바꿔서 부를 수 있도록 장애에 대한 문화 계몽의 사역이 범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재가 장애인


  장애인을 거주 형태에 따라 분류하면 보통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장애인을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과 시설을 구비하여 다수의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생활하게 하는 수용 형태의 “시설 장애인”이며, 둘째는 가정이라는 혈육 공동체인 집에서 거주하며 공간적 제한과 필요한 장애인의 기본적인 욕구가 사회로부터 상당히 단절된 상태의 “재가 장애인”으로 분류된다. 최근까지 우리 나라의 장애인 복지 정책은 시설에 집중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장애인을 수용하는 시설을 세우고 장애인 편의 시설을 구비하여 시설에 수용되지 않으면 안될 장애인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삶의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형태의 정책이었다. 장애인 복지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과거보다 상당히 진척된 오늘에 와서도 장애인 재활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가 아직도 거의 시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장애인 복지의 진보가 기대할 만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믿기에는 미흡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용 및 이용 시설


  장애인의 복지 정책이 시설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는 동안 상대적으로 재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자연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며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은 종합적인 서비스를 받아야만 하는 장애인이고 재가 장애인은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차적인 서비스를 받아야 할 우선 대상은 아니라는 잠재된 의식을 낳게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 장애인들 중에서 재가 장애인을 제외한 시설 장애인의 수는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장애인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나 정책이 얼마나 소수에 편중되어 왔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재가 장애인이 전체 장애인의 98%나 된다고 한다면 시설에서 재가 장애인으로의 다양한 복지 정책이나 재활 서비스를 연구 개발하는 일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높여 가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요구받아야 할 중요한 일이다.


  시설 장애인을 위해서는 “수용 시설”이 있다. 그렇다면 재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없는가? 물론 재가 장애인을 위해 운용되는 시설이 있다. 재가 장애인이 장애인 재활이나 복지를 제공받기 위해 이용하는 시설을 “이용 시설”이라고 부른다. 장애인을 수용하는 시설들이 대개의 경우 재가 장애인을 위한 이용 시설로도 개방될 수 있고, 시설의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자원들을 가지고 재가 장애인을 위한 순회 서비스 및 초청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용 시설로도 사용될 수 있다.


  모든 장애인은 토탈(Tatal)서비스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모든 장애인을 위해 수용 시설을 갖출 수는 없으며 그리할 필요도 없다. 사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편의 시설을 갖춘 수용 시설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가정이 줄 수 있는 안정감과 행복감을 대신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님 오시는 그날까지 시설 장애인과 재가 장애인의 비율의 폭이 좁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절대다수의 장애인은 재가 장애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재가 장애인을 위한 이용 시설은 수용 시설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만 한다. 그것은 재가 장애인과 시설 장애인의 비율만큼이나 월등하게 많은 이용 시설의 확충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더라도 현재의 이용 시설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해야만 하고 그 인식의 바탕 위에서 이용 시설의 비율을 높여 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장애인 선교 단체는 일종의 이용 시설이다. 그리고 교회도 재가 장애인을 위한 좋은 이용 시설로서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교회가 장애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장애인을 위한 좋은 이용 시설로서의 기능을 담당해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는 장애인 이해를 가장 잘 하는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장애인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아직 장애인을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안목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교회가 장애인을 위한 가장 좋은 이용 시설로서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에게는 여전히 닫혀져 있는 교회로 보여지고 있으며,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교회가 나름대로 교회의 위치와 성숙도에 따라 장애인을 위한 이용 시설로서의 기능을 담당해 주기만 한다면 장애인 복지나 재활만 아니라 장애인 선교의 분야에 전혀 새롭고도 보배로운 옥토를 일구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자원


  교회는 장애인, 특히 재가 장애인을 위해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재가 장애인을 위한 복지와 재활의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있는 넉넉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자원은 이와 같은 것들이다.


  ⑴첫째로 공간의 자원이다. 상가 교회나 임대 교회의 경우를 제외하고 교회의 건물이 세워져 있는 교회일 경우, 그리고 선교 관이나 교육관, 또는 복지관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일 경우라면 교회의 공간적 자원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는 셈이다. 교회가 재가 장애인을 위한 복지나 재활의 프로그램을 하려 할 때 공간의 자원은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자원이다. 그리고 교회의 공간은 대부분 주일과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공간으로 남아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간적 활용의 가치에 있어서는 어떤 공간보다도 더 유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⑵둘째로 재정적 자원이다. 교회는 교회력의 차이에 따라 재정적 자원의 편차가 심하다. 그러나 미 자립 교회나 미 조직 교회의 경우가 아니면 교회의 재정적 자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된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의 재정적 자원은 단순히 남을 돕는다는 차원에서의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주의 뜻을 이루는 일을 섬긴다는 의미의 자원이므로 가장 값지게 쓰일 수 있는 자원이다.


  ⑶셋째로 인적 자원이다. 교회는 지역에 있는 장애인을 섬길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교육가, 상담가, 법률가, 의사, 목사 및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넉넉한 자원 봉사의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교회의 인적 자원은 다양하면서도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인적 자원이 아니라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헌신된 인적 자원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된 인적 자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지체 의식 속에서 많은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의 유니티(unity)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점이 무엇보다 탁월한 인적 자원이 될 수 있는 요인이다. 교회는 항상 인적 자원을 훈련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기도회를 통하여, 성경 공부를 통해서, 제자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지므로, 혹은 구역 활동과 각양의 은사를 따라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통해서 교회는 언제 어디에라도 즉각 보낼 수 있는 인적 자원을 훈련시키고 준비하여 대기시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충분한 인적 자원은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자원(공간, 재정)보다 훨씬 유용한 자원이다.


  ⑷넷째는 영적 자원이다. 교회의 영적 자원은 복음에 기초한 것이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나오는 교회의 영적 자원은 생명을 살리는 자원이다. 장애인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도무지 낙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어서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장애인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나오는 충만한 영적 자원은 낙심과 절망 중에 있는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다. 교회의 영적 자원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오직 교회만이 가진 특별한 자원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이 같은 영적 자원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게 하신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빈곤한 중에 처해 있는 영혼을 위해 충분히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교회는 오늘 육체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는 장애인을 향해 영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영적 욕구를 위해


  이 같은 교회의 자원은 재가 장애인을 위해 어떤 도움이든지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장애인 전문 사역자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장애인 전문 사역자는 오랜 사역의 바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조금 서툴기도 하고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재가 장애인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복음”이다. 가장 좋은 도움, 어떤 곳에서도 받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총”이라는 도움은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자주 ‘장애인의 복지’에 대하여 초점을 집중시키려 한다. 사실 장애인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그러므로 장애인의 의료 문제, 교육 문제, 직업 문제, 혹은 결혼 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중대한 문제들이다. 특히 일반인에 비해 이와 같은 장애인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는 경우가 있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장애인의 현실적인 문제는 신속히 보완하고 채워 주어서 해결되도록 해야만 한다. 하지만 장애인의 모든 문제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어떠한 노력과 수고를 하더라도 100% 장애인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점과 그런 인간적인 노력들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장애인의 욕구를 결단코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장애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인 만큼 장애인의 육체의 욕구들이 채워지는 것으로 장애인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을 교회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 교회의 여러 가지 유용한 자원들을 잘 활용하여 장애인의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을 위해 팔을 걷어 올려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장애인의 복지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장애인의 복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해결해 가는 바른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사도행전 3장의 장애인


  사도행전 3장의 의미는 초대 교회의 시작과 아울러 초대 교회의 사역(선교)의 방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초대 교회를 교회 성장과 사역의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가 교회 역사상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사역과 성장의 틀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며 가장 원시적인 교회의 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사역에는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 성령의 강한 임재와 능력 가운데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3장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려면 간략하게나마 1장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3장의 위치


  ⑴사도행전 1장은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선교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이 말씀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하여 초대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여야 할지를 미리 예고하여 주는 말씀으로 사도행전 이해를 위한 중심 구절이다.


  ⑵사도행전 2장에는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선교 비전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미 약속하셨던 성령을 교회에 부어 주시는 것을 소개해 준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2:1~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니라”(행2:44~47) 오순절 날 성령이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 가운데 임재 하시므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되면서 성령이 임하신 것은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 진 것이면서 동시에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은혜와 힘을 주신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함께 시작되었고 성령의 임재 하심은 교회의 선교 사명을 따라 선교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모습이다.


  ⑶이제 사도행전 3장은 교회가 주님의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되었으며 교회가 그 사역의 첫발을 어떻게 내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곳이다. 사도행전 3장이 펼쳐지면 거기에 선천성 지체 장애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교회의 구성원이 지체 장애인에게 행한 선교와 능력이 나타난다. 이것은 성령이 베드로와 요한을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선천성 지체 장애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안목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며 그 시점이 바로 초대 교회의 선교가 첫발을 내딛게 될 즈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3장은 초대 교회가 충만한 성령의 강림과 동시에 헌당 예배를 드리고 곧 바로 장애인 선교를 시작했다는 것을 소개하여 주는 것이다. 이는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선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교회의 선교 방향이 장애인에게 먼저 구체적으로 역사 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선천성 지체 장애인을 보았을 때 그가 구걸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고 명하여 그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다. 이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복음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에게도 동일한 복음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이 초대 교회에서는 장애인에게 더 먼저 전해졌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오늘의 교회는 초대 교회의 장애인 선교가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특별한 감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초대 교회의 장애인 선교가 사도행전 8장이나 15장에 기록되어 있다면 초대 교회의 장애인 선교의 비중이 그만큼 약했다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장애인 선교의 내용은 초대 교회가 다른 분야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장애인 선교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흥의 기회


  또 한가지 초대 교회의 장애인 선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의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던 장애인이 치유 받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니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 모여들게 되었다(행3:11) 그때 베드로가 무리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며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행3:12~26) 성전 미문에 앉아서 매일 구걸만 하고 있던 한 사람의 장애인이 복음을 받게 된 것을 통하여 일어나게 된 예루살렘의 소동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기회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능력 있게 증거 되는 바탕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는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말았지만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믿는 자가 무려 남자만 5천명에 이를 만큼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행4:1~4) 엄청난 부흥이었다. 핍박하는 자들의 감시를 받고 있으면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던 일과 그로 말미암은 상상을 초월한 부흥의 경험이 한 사람의 장애인을 선교했던 것으로 말미암았다. 이것이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장애인 선교의 중요성이다.


  초대 교회의 장애인 선교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초대 교회의 사역자들은 곳곳에서 장애인을 만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병든자를 치유하여 주는 적극적인 선교를 감당한다. 초대 교회가 선천성 지체 장애인을 치유하고 능력 있는 복음을 전하였던 사건을 인해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지만 이에 꺾이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복음 선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든자를 고칠 수 있게 해 달라는 구체적인 기도(행4:29,30)를 드린다. 장애인 선교를 통해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던 초대 교회는 또 다른 장애인을 치유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더욱 힘껏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초대 교회가 장애인 선교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게 되면서 피할 수 없는 선교로서의 장애인 선교가 아니라 적극적인 장애인 선교를 시작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행5:15,16, 8:7, 9:37~40) 초대 교회는 오늘 교회도 장애인 선교를 위해 구체적인 기도와 함께 능동적으로 감당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한국 교회의 선교


  한국 선교의 초기 역사는 장애인 선교로 시작되었다. 1884년에 의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해서 광혜원(후에 제중원으로 개칭됨)을 열어 환자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알렌 선교사는 한국의 선교 역사에 장애인 선교를 시작했던 최초의 사람으로 주목을 받아야 할 만한 선교사이다. 그리고 1885년에 정식으로 선교사 신분을 가지고 한국에 입국했던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이미 한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상당한 선교의 터전을 닦아 놓았던 알렌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언더우드는 알렌이 운영하고 있던 제중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알렌과의 활발한 협력 사역을 하였던 것을 보면 한국 선교에 적극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장애인 선교의 현장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흔적이 없을 따름이지 한국을 복음화하는 일에 기초석을 놓았던 사역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는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초대 교회의 장애인 선교의 전통도 잃어 버렸고, 한국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장애인 선교의 아름다운 모습도 상실해 버렸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무엇보다 열심이었던 분야는 선교 분야였다. 한국 교회의 오늘의 성장 배경에는 선교의 열정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거의 모든 선교 분야에서 한국 교회는 열심을 보여 왔고 그래서 세계 선교의 주역을 담당하는 교회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보인 장애인 선교에 대해서만큼은 별로 할말이 없다. 우리 나라의 장애인 복음화는 5%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지금까지 장애인 선교의 현장이 교회로부터 싫어 버린바 되어 왔었다는 것을 증거 한다. 이제 한국 교회의 선교 열의가 장애인 선교 현장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장애인 선교 현장은 외면되어도 괜찮은 곳이 아니다. 초대 교회가 힘썼던 장애인 선교 현장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과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므로 이제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를 더 이상 주저하며 늦추지 말아야 한다. 사도행전 3장의 선천성 지체 장애인을 선교했던 초대 교회의 모습을 제외해 놓고 초대 교회의 다른 면을 배우려 한다면 이는 교회의 옳은 태도가 아니다. 오늘 모든 교회들이 초대 교회가 내디딘 첫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초대 교회를 닮을 수 있을 것이다.


4.제한된 생활


  사도행전 3장의 선천적 지체 장애인은 구걸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하루도 쉬지 않고 성전 미문에 나와서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사람이었다. 구걸을 하는 장소로 성전을 택한 것은 종교적 긍휼에 호소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장애인들이 제한된 생활 여건을 해결해 보기 위하여 구걸에 의존한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하지 못할 일이 없지만 장애인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지만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장애인이 거리로 나간다. 사람들에게 더 불쌍히 보이기 위하여 애를 쓰기도 하고 종교적인 긍휼에 잠시 기대어 보려 하기도 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


  구걸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피곤한 삶, 괴로운 삶이다. 그것은 좋아서 할 수 있는 일도, 사명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거기에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 있고, 비척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기울이는 인생의 슬픔이 들어 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지체 장애인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려면 그나마 양손을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고 정상적인 사고와 두뇌 활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상지(양손)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으면 어떠한 재활도 연습할 수 없는 제한된 여건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이 땅의 장애인의 삶이며, 상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두뇌 활동이 불가능하면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상지의 건강도 무익하게 되고 만다.


  국가가 잘 살아서 복지국가가 된다는 것은 장애인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기회가 균등하게 제공될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하는 것이 더 좋은 사회가 되게 하는 길이다.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연약한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의 삶을 세우고 가꾸어 갈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회를 가로채는 사람들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장애인들의 제한된 생활을 개선해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바르게 이해하는 자세에서도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들의 제한된 생활의 공간을 넓혀 주어야 하는 것만 아니라 비록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더디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일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려 줄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못했다고 닥달하는, 그래서 빠르게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단순한 기능적인 차이 때문에 인생을 비관하고 낙망에 빠지게 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는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런 삶이 장애인들을 위해 준비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장애인들의 제한된 생활을 개선해 주는 바탕이 될 것이다. 정말이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는 소망 없는 현실이 빨리 개선되게 하는 것이 건강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기업인의 사명


  필자가 알고 있는 장애인 중에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라는 것을 하셨던 분이 있다. 필자가 그 장애인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가 죄인지 몰랐느냐고 질문해 보았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아니 장애인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도둑질을 하지 않고 라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친 것인데 무슨 죄냐고 반문하는 듯 했다. 장애인 고용 촉진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장애인의 고용을 꺼리고 있다. 장애인 고용 의무를 지키지 않는 사업주에게 물리는 벌금을 내면서도 장애인을 고용하는 사업주에게 주려는 도움을 밀쳐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 서 있는 장애인이 를 한다고 무슨 죄가 된다고 까지 몰아 세우느냐고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기업을 해야 할 크리스천 기업가들은 최소한 장애인 고용 의무를 성실히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원을 장애인으로만 채우려 할 필요까지는 없을지라도 법률로 정해진 장애인 고용 비율을 지켜 장애인들에게도 삶의 기회가 더욱 열려지도록 해야만 한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복지를 위해 이익을 남길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에게 직접적인 삶의 현장을 제공하여 주는 것은 더욱 좋은 복지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업 하는 사람을 원하는 건강한 사회는 없다. 건강한 사회는 훌륭한 기업을 만들어서 사회를 살찌우고 가난한 사람을 부요 하게 하는 기업주를 원한다. 기업 해서 남 주어야 한다. 돈 벌어서 남 주어야 한다. 기업은 이윤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윤이 기업 활동의 절대 가치가 되는 사회가 나아가는 길은 부정을 합리화하는 부패의 길이다. 이윤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기업의 이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기업의 이윤은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필요를 보충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은 기업 해서 연약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크리스천 기업가들의 정신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장애인 고용 의무의 법이라도 지킬 수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의 작업환경을 개선하기도 해보고, 장애인의 장애 정도와 그에 맞는 적절한 작업 시간과 작업량을 이해하고 배려해 줄줄도 아는 기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장애인은 오늘의 장애인이 아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장애인이 그리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어쩌면 2,000년 전의 장애인에게 구걸은 자연스러웠을는지 모른다. 구걸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장애인 문제는 2,000년 전과는 달라야 한다. 오늘에도 장애인을 거리로 내보내 구걸을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이는 건강한 사람들과 부요한 사람들에게 묻는 엄위한 하나님의 책망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적으로 갇힌 자를 풀어서 자유케 하는 일, 곤고한 삶의 사슬에 묶여 있는 자에게 자유를 주는 일은 크리스천 기업가들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