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소영200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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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국.일본 왕조의 특성

 

 조선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왕조의 역사가 유달리 장구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조선은 1392년 건국되어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시간 동안 존속했던 왕조다. 왕조의 역사가 장구하다는 점은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왕조의 공통된 특성이기도 하다. 실제 조선 뿐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고려 왕실이 모두 500~800여 년 존속했다. 이처럼 왕조의 생명이 긴 사례를 다른 나라 역사에서는 찾기 어렵다. 정확한 분류는 아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왕조는 200~300여 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다.

 일본은 자국의 천황가가 만세일계 萬世日系의 혈통이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1500여 년의 존속 기간 중 일본 천황가가 실권을 쥐었던 때는, 백제계가 원주민을 점령해 천황가를 세워 통치했던 고대의 일부 기간 뿐이었다. 그 기간을 제외하면 일본의 천황은 국왕이라기보다는 제사장에 가까웠다. 하늘과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일본 천황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로 천황은 일본 정치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천황이 얼마나 정치에서 소외된 존재인가는, 1467년 '오닌의 난'에서 시작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100여년간 계속되었던 전국시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동안 천황은 103대 고쓰치미카도 천황부터 107대 고요제이 천황까지 무려 5명이 갈렸다. 그러나 이들 다섯 천황의 사망과 즉위는 단지 제사장 가문의 세습에 지나지 않았을 뿐 전국시대의 향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 천황가의 영지領地가 소재재의 다이묘(大名)에게 병합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열도의 패권을 다투던 그 어느 다이묘도 천황의 은퇴와 즉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104대 천황 고카시와바라는 즉위식을 거행할 자금이 없어 왕위에 오른 지 21년이 지나서야 즉위식을 올릴 수 있었다.

 전쟁에 나선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누구도 천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분이 필요할 때만 천황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용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황 영지의 조세를 대신 징수해주고 천황의 거주처를 수리해 준 것은 다른 다이묘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천황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우대신右大臣'이라는 칭호를 줌으로써 이에 보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마찬가지였다. 천민 출신으로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8년 새로 지은 경도의 취락제聚樂第에 천황을 초청하고 각 다이묘들을 불렀다. 그는 천황에게 '간파구'란 직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사실상 일본 국왕의 이름이었다. 도요토미는 각 다이묘들에게 천황과 간파쿠에게 복종을 약속하는 서약을 하게 했다. 그러나 천황에 대한 서약은 형식에 불과했고, 사실상 간파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였다. 막부의 장군은 이처럼 간파쿠의 지위로 다이묘들을 다스렸다.

 일본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일본을 실질적으로 다스린 존재는 천황이 아니라 막부幕府의 장군(쇼군)들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위를 세습한 것처럼 막부의 장군도 한 가문에서 세습했다. 이때 장군은 사실상의 국왕이었고, 막부는 사실상의 왕조였다. 그러나 한 가문이 막부를 지배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인 미나모토 요리토모 가문은 1185년에 정권을 잡아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가 1333년 멸망했으므로 약 150여 년을 집권한 셈이다. 가마쿠라 막부에 이어 정권을 잡은 무로마치 막부는 1338년에서 1578년까지 240여 년을 집권하였고,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을 거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60여 년간 집권하였다.

 '가마쿠라→무로마치→에도막부'의 교체는 우리나라의 '고려→조선 왕조'의 교체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집권 기간은 길어야 260여 년을 넘지 못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는 원나라가 집권한 기간은 1206년부터 1368년까지 160여 년에 불과했다. 그 뒤를 이은 명은 1368년 건립되어 1662년에 멸망했으니 약 300년을 존속한 것이며, 만주족이 세운 청은 명과 각축하는 기간까지 포함해 1616년에 건립되어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으니, 역시 300여 년 동안 존속한 것이 된다.

 조선은 명과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어 청과 비슷한 시기에 멸망했으니 얼마나 장구한 기간 동안 존속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조의 존속 기간이 중요한 것은, 왕조나 국가의 생명 사이클이 비슷한 경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국가나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을 지닌다. 사이클의 각 과정은 상황에 따라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만약 발전기가 길다면 그 왕조의 국력은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발전기가 끝나면 정체기 또는 쇠퇴기라는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왕조나 국가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쇠퇴기, 멸망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였다. 이런 기록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피지배계급인 농민들 위에 군림했던 조선의 사회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일본이 침략했을 때 지배층들이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 조선 지배 체제는 붕괴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국왕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 이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선조의 어가를 가로막고 강계에 귀양 가 있는 정철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그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행위로 당장 물고를 낼 죄였지만 선조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국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들이 다스리는 조선의 국가 통치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종말을 맞았다.

 개국 초에 조선은 사대부,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의 국가였다. 물론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이름만 걸어놓았으나 어쨌든 법제상으로는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방군수포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 때 군적수포제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 개국 후 2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때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대부들은 무려 300년이란 세월을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생명의 연장이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조선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였는데, '국왕 독살설'도 그 하나다. 국왕 독살설이 임진왜란이일어나는 16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국왕 독살설은 왕조 국가의 대표적인 비정상적 정치 행태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생명력이 다한 왕조 국가가 물리적이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명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왕 독살설인 것이다.

 

 

조선.중국.일본 국왕의 권한 차이

 

 조선.중국의 임금과 일본의 장군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가 달랐다.

 실질적인 일본 국왕인 막부 장군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 영지의 여탈권을 장악했다. 장군은 심지어 다이묘들에게 할복을 명할 수도 있었다. 할복을 거부하면 군사를 일으켜 더욱 가혹하게 보복했다. 그러나 이는 장군에게 힘이 있을 경우였다.

 전국을 장악한 도요토미가 불과 13년 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에게 망해 버렸듯이 장군의 힘이 약화되는 순간 반란은 싹텄고, 그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면 그 막부는 망했다.

 중국의 황제권은 여타 국가와는 비교가 안 된다. 평민 출신으로 명조를 개창한 주원장은 중서성 자체를 폐지시켜버렸다. 중서성의 승상이 황제권을 견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6부를 황제에게 직속시키고, 대도독부를 5군도독부로 고쳤으며, 어사대를 도찰원으로 고쳐 황제에게 직속시켰다.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권력이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신하들이 권력을 두고 황제와 다툰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웠다. 중국이 대신들보다는 주로 환관들의 전횡이 문제가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보니 황제와 지근거리에 있던 환관들이 힘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왕조 국가인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절대권이었을 뿐 실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무조건적인 숭배나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도 많았다.

 조선의 국왕은 의중의 인물을 정승으로 임명하기 위해 신하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 때의 일이다.

 재위 13년에 좌의정 남구만을 면직시킨 후 그 후임으로 우의정 이단하를 승진 발령한 숙종은 공석이 된 우의정을 임명하기 위해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이단하를 불러 적당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김수항과 이단하가 이숙을 추천했으나 숙종은 낙점을 거부했다. 숙종은 이어 두 대신이 추천한 이민서, 신정, 여성제도 차례로 모두 거부했다.

 국왕이 4번씩이나 추천을 거부하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두 대신은 숙종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특정 인물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입대를 청했다. 예상대로 숙종의 입에서 한 인물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조판서 조사석이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음을 내가 알고 있다.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숙종이 의중에 두고 있던 인물은 이조판서 조사석이었다. 신하들은 국왕이 4명을 거부한 끝에 직접 추천한 인물을 거절할 수 없었다.

 "선조 경자년(1600)에도 심희수, 한응인, 윤승훈, 김명원이 추천받았다가 김명원이 성상의 분부에 따라 먼저 정승이 된 일이 있었는데, 오늘의 일이 그때와 대략 유사합니다. 신들이 어찌 다른 의논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사석이 우의정이 되었찌만 이 인사는 항간에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대신들이 추천한 인물을 국왕이 연거푸 거부한 전례도 없거니와 숙종이 의중에 둔 인물이 조사석인 데 대해 흥미로운 소문이 떠돌았다. 그 소문은 다름 아닌 조사석과 장희빈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본명이 장옥정인 장희빈의 어머니는 원래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그녀가 장옥정을 낳은 후에도 옛 주인인 조사석의 처가를 왕래했던 게 소문의 진원지였다. 또한 조사석은 당시 대궐의 웃어른이 자의대비 조씨의 재종제였는데, 당시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가 장희빈을 미워한 반면 대비 조씨는 장희빈을 총애했다. 그리하여 장옥정은 대궐에서 쫓겨났을 때 대비의 명으로 옥정을 돌보아준 동평군 이항과 함께 대비 조씨를 자주 찾아 보았다.

 이렇듯 얽히고설킨 사연 때문에 조사석이 장희빈 덕택에 우의정이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한 조사석은 거듭 차자를 올려 사직을 요청했으나 숙종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계속 확대되어 경연 자리에서까지 논란이 되었다. 숙종이 조사석에게 대해 묻자 지경연사 김만중이 이렇게 대답했다.

 "후궁 장씨의 어미가 평소 조사석의 집과 친밀했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조사석이 우의정이 된 것은 이 연줄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유독 전하께서만 듣지 못하고 계십니다."

 후궁의 베겟머리송사에 움직여 정승을 임명했다는 말이었다. 숙종이 화를 벌컥 냈다.

 "조사석이 연줄을 대어 정승이 되었다면 내가 금을 받았다는 말이냐, 은을 받았다는 말이냐? 그 말의 근거를 분명히 대라.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김만중도 항의했다.

 "전하께서는 신에게 말을 하도록 해놓고 또한 그 말의 근거를 물으십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어찌 말의 근거를 들어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주륙을 받더라도 달게 여기겠습니다만, 이는 전하께서 신을 형륙에 빠뜨리시려는 것입니다."

 임금이 신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는 이 말은 더욱 숙종의 분노를 샀다. 분기가 탱천해 음성과 안색이 엄해진 숙종이 계속 다그쳐 물었으나, 김만중은 굴복하지 않았다.

 "신이 감히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달려나가 의금부에서 대명하겠습니다."

 숙종이 승정원에 전교를 내렸다.

 "즉시 김만중을 잡아다가 문초하라는 전지를 써서 올리고 의금부에서 문초하게 하라."

  하지만 승정원에서는 숙종의 명령이 부당하다며 전지 쓰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임금이 직접 친필로 전지를 내릴 수도 없었다. 숙종은 분개했다.

 "여러 신하가 군부 보기를 일개 시종하는 신하만도 못하게 여긴다."

 김만중을 처벌하려면 승정원의 전지가 꼭 필요했으므로 숙종은 승지를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전지를 봉입하라고 재촉했다. 승지 유명일이 붓이 없어 전지를 못 쓰겠다고 핑계를 대자, 숙종이 사관 송상기에게 붓을 주라고 명했는데, 그는 "사필을 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또 다른 승지 윤성준이 사필도 중요하지만 국왕의 명령도 중요하다며 붓을 내주어 겨우 전지를 쓸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국왕은 때로는 전지 한 장을 쓰기 위해서도 수많은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장군 같았으면 승지와 사관은 물론이고, 김만중의 목도 당장 날아갔을 것이다.

 문제는 숙종의 왕권이 조선 스물일곱 임금 중 그 누구와 비교해도 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숙종이 의중의 신하 한 명을 정승으로 임명하기 위해 이런 소동을 겪었다는 것은 조선 국왕의 권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가 아니었다. 전지전능하기는커녕 전지 한 장을 쓰기 위해 신하들을 위협하고 달래야 했던 나약한 존재였다. 왕조 국가 조선에서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임금의 신하기보다는 소속 당의 당인인 신하들

 

 m조선에서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니라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서 신하들은 왕명이 아니라 당명을 따랐다.

 당쟁이 치열하던 시절 조선의 왕권이 약하다는 사실은 외국인의 눈에도 감지되었다. 이 때문에 숙종은 청나라 예부시랑 오합이 했다는 말을 듣고 분통을 터뜨린 일도 있었다. 오합이 청 황제 성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만약 우리 조정에서 보호하지 않는다면 몇 번이나 왕위 찬탈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여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이처럼 방자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고 말하지 않느냐."

 흔히 숙종을 민비나 장희빈의 치마폭에 감싸여 서인에서 남인으로, 그리고 또다시 서인으로 정권을 바꾸며 무수한 신한의 목숨을 빼앗을 변덕스런 임금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숙종은 잦은 정권 교체가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라고 믿었고, 실제로 당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심지어 숙종은 왕비와 후궁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왕비에 대한 각당의 당론까지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남인가 여인인 장희빈을 총애할 때는 남인들을 집권시키며 서인들을 내쳤고, 서인가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를 총애할 땐 남인을 내치고 서인들을 중용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각 당파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런 잦은 정권 교체 결과 숙종 후반기에는 신하들이 감히 왕권을 넘보지 못했고, 재위 39년에는 신하들이 살아 있는 숙종에게 존호를 올리겠다고 간청하고 나설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까지 왕권 강화의 도구로 이용해야 했다는 사실은 조선 국왕의 왕권이 얼마나 미약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 그리고 숙종의 아들 경종은 모두 독살설에 휘말렸다. 이런 상황이니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하나가 왕비와 후궁을 둘러싼 사랑이었다. 어쩌면 이런 냉혹함이 그를 독살설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이라 하는데, 국왕 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국왕은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것이다. 왕을 갈아치우는 것을 '반정'이라 한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살'이다. '반정'과 '독살'은 둘 다 신하들이 임금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반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있는 데 비해 독살은 은밀히 이루어지므로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이자 왕조 국가 조선이 말기까지 갔다는 증거기도 하다. 조선의 국왕 중 독살설에 휘말린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포함해 9명이나 된다. 여기에 일각에서 주장하는 예종까지 포함시키면 무려 10명이나 되는 셈이다.

 2명의 세자를 제외하더라도 8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이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였음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또한 27명의 임금 중 무려 8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이란 정치 체제에 대해 대해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증거기도 하다.

 이는 또한 단순히 '조선'이란 과거의 왕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비록 36년간의 식민지 통치 기간이 중간에 개재되어 있다 해도,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