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유산

임은정200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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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국에 귀국하기 전 워싱턴 생활에서 좋은 말벗이셨던 오라버님과 오랜만의 담소를 갖는 시간을 가졌다.  나이가 나이이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대화의 거의 8할 이상이 결혼 및 이성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략 2할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의 대화의 소재 중 하나는 역시나 월드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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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위 티브이 뉴스나 특히 인터넷 뉴스 등에는 그리 민감하지 않은 편이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자신의 집에는 티브이도 없고 신문도 잘 보지 않지만, 어차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은 들려오기 나름이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난다만, 아무튼 난 도올 선생의 경지에는 훨씬 못 미치는 평민이지만, 특히나 인터넷 검색 등으로 뉴스를 일부러 찾아보는 경우는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잘 없다.

그래서인지, 소위 압구정 응원 추태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를 못했다.


어제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의 담소 중에 이번 월드컵 응원 추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오늘 검색을 좀 해보니, 어제 그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외에도 충격적인 영상이 많았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못지 않을 듯한 행각들이다.

 

군중은 늘 우매한 짓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것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만고의 진리나 다름이 없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 국민이라 하여 특별히 더 타락하고 더 우매하며 소위 더 '막가는' 것은 아니란 말을 자위하는 뜻에서라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마음이 아프다.
우리 사회는 어쩌다 이러한 지경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56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사상을 핑계로 내 형제, 내 부모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비극을 일으켰다.
우리의 부모들은 그 전쟁통에 태어나, 군화가죽을 불려서 만든 개도 먹지 못할 음식이라도 먹기 위해 곯는 배를 움켜쥐고 줄을 섰었다.  우리의 형, 누나들은 독재의 핍박 속에서 재봉틀을 돌렸고, 쇠붙이를 녹였으며, 깔려죽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독일의 탄광으로 팔려가다시피 노동을 갔다.  우리의 눈부신 경제 성장의 밑거름은 민중의 고혈이었음을 부정할 이가 과연 누구인가.  일본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고 한다.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벚꽃이 붉은 화려한 이유는 그 시체에서 나오는 피를 빨아올려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벚나무가 온갖 원혼으로 인하여 그토록 붉고 화려하게 핀다는 일본인들의 민담처럼, 우리의 이러한 광영은 우리의 누이들과 어버이들, 오라버니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것이란 말이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피해망상적인 사고를 부추기려는 것은 아니다.  좋은 소리도 한 두번이라는 데 캐캐묵은 이런 과거 운운하는 이야기를 자꾸하여 감격하고 참회하여 회개할 젊은이들이 또 과연 얼마일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저 눈을 뜨고 나면 변해가는 우리 사회에 적응치 못하고 스스로 위화감 마저 느끼고 있는 현실을 함께 고민하고 싶다.  필자는 1997년 이후 줄곧 외국 생활을 하면서 때가 되면 고국을 찾고 있지마는 곧 돌아와야 할 나의 조국이 이리도 다급히 변해가는 것에 이제는 아쉬움이나 슬픔, 혹은 분노 이상의 두려움마저 느낀다.


자유와 방종은 다르다는 일반적인 원리, 정의 보다는 질서가 앞서야 한다는 이 또한 상투적인 논리를 앞세워 우리 국민의 자질과 가능성에 찬 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이었던지는 되새겨 볼 지금이 아니인가를 논하고 싶다.  전 세계 어느 사회에서도 교양없는 졸부들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지탄을 받는다.  하물며 지금 우리 사회는 그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포만감에 겨워 오히려 그것을 게워내고 있는 돼지들 같지는 아니한가.

 

혼란의 시대일 수록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우리 부모들이 우리를 배를 채워 주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식들의 머리를 채워줘야 한다.
톨스토이가 참회하였듯이 좋지 않은 생활은 옳지 않은 사고방식을 낳고 그 옳지 않은 사고방식은 우리의 의식을 미오(迷誤)에 빠뜨린다.
더 깊은 미오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어지기 전에 우리의 가치관을 재정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나 역시 그것을 실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