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과거사를 일별할 때 빼놓을 수 없고, 또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로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일본군이 이 땅에서 물러가기 전까지 이 민족이 겪었던 쓰라린 아픔이다. 그것은 대동아 공영권을 만든다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주도로 치른 전쟁터에서 고단한 식민지의 백성이 겪었던 아픔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나 나이든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일제 치하에서 겪은 나라 잃은 차별과 설움이 오죽했을까!
어제 오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자리한 위안부 역사관과 나눔의 집을 다녀왔다. 시중에 나와있는 그 곳 소개 책자에 의하면 기념관(박물관)입장은 오후 네시까지 해야하고 다섯시에 문을 닫는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그 곳에 전화로 확인해보니, 지금 해가 긴 까닭에 다섯시 반까지 와도 된단다. 창문을 열고 그 곳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 여름 오후의 바깥 더위가 그대로 전해진다.
판교 방향으로 서울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가다 하남시 쪽에서 43번 국도로 접어들어 가다보면 왼쪽에 퇴촌면 입구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한참 가다 보면, 나눔의 집과 위안부 역사관을 가리키는 팻말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3.5 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뒤에는 산자락을 그리고 그 주변에는 논과 밭을 두고 서있는 역사관과 나눔의 집이 서 있다.
그 곳 사무실의 안 선생이 친절히 안내해준다. 일제 치하에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이 겪은 참상의 하나, 곧 전쟁터에 끌려가서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은 이른바 위안부들의 아픔이 그 곳 역사관(박물관) 곳곳에 짙게 배어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피해 당사자였던 분들로서, 나눔의 집에 기거하시는 분들이 당신들의 쓰라린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표현해 낸 벽에 걸린 그림들이다. 몇 분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이미 고인이 되신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과 아직 그 곳에서 건강히 지내시는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고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들에는 당신이 겪은 참상에 대한 짙은 분노와 원한이 표출되어 있다. 반면에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들에는 과거 숫기없는 처녀가 위안부로서 겪은 비애가 드리워져 있어 안쓰럽다.
그 날은 마침 일본에서 온 몇 명의 고등학생과 한국의 고등학생 몇 명으로 이루어진 한 그룹의 캠프가 있었다.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인식의 공유와 생각의 나눔이 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안 선생 사무실에서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 그 사무실로 들어오신 나눔의 집의 김순덕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무얼 마시겠느냐 물으신다. 괜찮다고 사양하는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그분의 눈길은 뭐라도 마셔야되지 않겠느냐는 듯 다그치는 분위기다.
그래서 뭐 마실 것 주신다면, 나는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잠시 후 김순덕 할머니께서 쟁반에 받쳐들고 오셔서 내려놓는 것은 차가 아니라 커피였다. 이를 보고 함께 동반한 분과 나는 안 선생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색하게 눈웃음을 건내고 나서는 하는 수 없이 김순덕 할머니가 준비해 오신 커피 잔을 들었다.
내가 커피 잔을 들고 마시기 전에 할머니는 내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탕과 프림은 각각 얼마나 넣으면 되느냐며 손님의 기호에 신경을 쓰시면서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련하신 커피를 권한다. 고집스러운 듯 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성품의 김순덕 할머니를 뵈면서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것은 당신이 원하시는 일은 기어이 하고야 말것 같은 그분의 고집스런 성격 때문이었다. 마침 그 때 안 선생과 나눈 화제가 미국의 한국학 연구에 관한 것이었다. 스탠포드 대학 산하 아시아 연구(Asian study) 파트에서 한국학을 하는 이가 관심을 같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위안부 기념관(박물관)과 관련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그 때 미국 이야기가 나오니 김순덕 할머니께서는 당신도 미국에 다녀오셨다고 한 말씀하신다.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안 선생이 한마디 거드신다.
연세에 비하여 비교적 건강해 보이시는 김순덕 할머니는 일전에 한국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생생한 증언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의 초대를 받고 미국의 이곳 저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시체말로 미국의 사립 명문으로 분류되는 코넬 대학과 브라운 대학도 방문하여 강연도 하였다는 김순덕 할머니는 개인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딛고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피해자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내는 의연함과 당당함을 지니고 있어 보기 좋았다.
그 뒤에 할머니의 자진 안내로 나는 함께 간 분과 함께 십여 명의 일본인들과 합류하여 비디오 상영실에서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그린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함께 시청하였다.
가해국의 시민들로서 자신들이 비록 직접적인 가해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해도, 같은 일본인으로서 아마도 그 선대의 만행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의 감정으로 그 비디오를 지켜보았을 저들은 비디오 상영이 끝나자, 조용히 바깥으로 나와서는 이곳 저곳 경내를 소리없이 둘러본다.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독립국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당국자들의 처신은 독립국의 국민들을 대표할 정도로 그리 당당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설왕설래 말도 많은 독도 영유권 문제는 물론이려니와 일제 치하의 종군 위안부 문제를 풀어나가는 한국 정부의 소극적 자세는 당당한 독립국의 자세라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한일 양국의 과거사에 대하여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 해야할 저들에게 한편으로는 큰소리를 치는듯해도 실질적인 문제의 처리에 있어서는 오히려 머리를 숙이는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명실공히 독립국가 정부의 당국자라면, 과거역사 바로잡기라는 일반론에서 벗어나서 종군 위안부들의 입장에 서서 그분들의 과거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되고,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자존감을 지킬수 있도록 가해국이었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하여 좀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외교적 노력을 다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할 때, 과거사 바로잡기라는 과제의 해결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수 있으려니와, 지금도 매주 수요일 계속되고 있는 일본국 대사관 앞에서의 정례 시위도 사라지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자기 탓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사회의 통념에 압도되어 오랫동안 괜히 얼굴 한 번 제대로 들고 사시지 못하다 이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들 영전에 삼가 명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아직 생존해 계셔서 나눔의 집에 함께 모여 서로의 등받이가 되어주시는 열분의 할머니를 비롯하여 혹시라도 아직도 이 하늘 아래 어느 그늘진 곳에서 여전히 외롭게 머무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이 계시다면, 물심양면으로 그동안 제대로 보상과 위로를 받지 못하신 그 분들 모두 과거의 상처가 제대로 치유되고 남은 여생만큼은 밝은 태양 아래서 마음껏 숨쉬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란다. (2003.8.2.)
* 이 글 가운데 나오는 김순덕 할머니는 서울 아산 병원에서 뇌출혈로 지난 2004년 6월30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귀천歸天하셨다.
위안부와 국가의 주권 - 8.15. 광복절을 맞으며
위안부와 국가의 주권
글. 양재오
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과거사를 일별할 때 빼놓을 수 없고, 또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로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일본군이 이 땅에서 물러가기 전까지 이 민족이 겪었던 쓰라린 아픔이다. 그것은 대동아 공영권을 만든다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주도로 치른 전쟁터에서 고단한 식민지의 백성이 겪었던 아픔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나 나이든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일제 치하에서 겪은 나라 잃은 차별과 설움이 오죽했을까!
어제 오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자리한 위안부 역사관과 나눔의 집을 다녀왔다. 시중에 나와있는 그 곳 소개 책자에 의하면 기념관(박물관)입장은 오후 네시까지 해야하고 다섯시에 문을 닫는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그 곳에 전화로 확인해보니, 지금 해가 긴 까닭에 다섯시 반까지 와도 된단다. 창문을 열고 그 곳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 여름 오후의 바깥 더위가 그대로 전해진다.
판교 방향으로 서울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가다 하남시 쪽에서 43번 국도로 접어들어 가다보면 왼쪽에 퇴촌면 입구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한참 가다 보면, 나눔의 집과 위안부 역사관을 가리키는 팻말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3.5 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뒤에는 산자락을 그리고 그 주변에는 논과 밭을 두고 서있는 역사관과 나눔의 집이 서 있다.
그 곳 사무실의 안 선생이 친절히 안내해준다. 일제 치하에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이 겪은 참상의 하나, 곧 전쟁터에 끌려가서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은 이른바 위안부들의 아픔이 그 곳 역사관(박물관) 곳곳에 짙게 배어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피해 당사자였던 분들로서, 나눔의 집에 기거하시는 분들이 당신들의 쓰라린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표현해 낸 벽에 걸린 그림들이다. 몇 분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이미 고인이 되신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과 아직 그 곳에서 건강히 지내시는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고 강덕경 할머니의 작품들에는 당신이 겪은 참상에 대한 짙은 분노와 원한이 표출되어 있다. 반면에 김순덕 할머니의 작품들에는 과거 숫기없는 처녀가 위안부로서 겪은 비애가 드리워져 있어 안쓰럽다.
그 날은 마침 일본에서 온 몇 명의 고등학생과 한국의 고등학생 몇 명으로 이루어진 한 그룹의 캠프가 있었다.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인식의 공유와 생각의 나눔이 양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안 선생 사무실에서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 그 사무실로 들어오신 나눔의 집의 김순덕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무얼 마시겠느냐 물으신다. 괜찮다고 사양하는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그분의 눈길은 뭐라도 마셔야되지 않겠느냐는 듯 다그치는 분위기다.
그래서 뭐 마실 것 주신다면, 나는 차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잠시 후 김순덕 할머니께서 쟁반에 받쳐들고 오셔서 내려놓는 것은 차가 아니라 커피였다. 이를 보고 함께 동반한 분과 나는 안 선생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색하게 눈웃음을 건내고 나서는 하는 수 없이 김순덕 할머니가 준비해 오신 커피 잔을 들었다.
내가 커피 잔을 들고 마시기 전에 할머니는 내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탕과 프림은 각각 얼마나 넣으면 되느냐며 손님의 기호에 신경을 쓰시면서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마련하신 커피를 권한다. 고집스러운 듯 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성품의 김순덕 할머니를 뵈면서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것은 당신이 원하시는 일은 기어이 하고야 말것 같은 그분의 고집스런 성격 때문이었다. 마침 그 때 안 선생과 나눈 화제가 미국의 한국학 연구에 관한 것이었다. 스탠포드 대학 산하 아시아 연구(Asian study) 파트에서 한국학을 하는 이가 관심을 같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위안부 기념관(박물관)과 관련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그 때 미국 이야기가 나오니 김순덕 할머니께서는 당신도 미국에 다녀오셨다고 한 말씀하신다.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안 선생이 한마디 거드신다.
연세에 비하여 비교적 건강해 보이시는 김순덕 할머니는 일전에 한국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생생한 증언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의 초대를 받고 미국의 이곳 저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시체말로 미국의 사립 명문으로 분류되는 코넬 대학과 브라운 대학도 방문하여 강연도 하였다는 김순덕 할머니는 개인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딛고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피해자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내는 의연함과 당당함을 지니고 있어 보기 좋았다.
그 뒤에 할머니의 자진 안내로 나는 함께 간 분과 함께 십여 명의 일본인들과 합류하여 비디오 상영실에서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그린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함께 시청하였다.
가해국의 시민들로서 자신들이 비록 직접적인 가해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해도, 같은 일본인으로서 아마도 그 선대의 만행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의 감정으로 그 비디오를 지켜보았을 저들은 비디오 상영이 끝나자, 조용히 바깥으로 나와서는 이곳 저곳 경내를 소리없이 둘러본다.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독립국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당국자들의 처신은 독립국의 국민들을 대표할 정도로 그리 당당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설왕설래 말도 많은 독도 영유권 문제는 물론이려니와 일제 치하의 종군 위안부 문제를 풀어나가는 한국 정부의 소극적 자세는 당당한 독립국의 자세라고 보기에는 아쉬움이 크다.
한일 양국의 과거사에 대하여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 해야할 저들에게 한편으로는 큰소리를 치는듯해도 실질적인 문제의 처리에 있어서는 오히려 머리를 숙이는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명실공히 독립국가 정부의 당국자라면, 과거역사 바로잡기라는 일반론에서 벗어나서 종군 위안부들의 입장에 서서 그분들의 과거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되고,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자존감을 지킬수 있도록 가해국이었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하여 좀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외교적 노력을 다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할 때, 과거사 바로잡기라는 과제의 해결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될 수 있으려니와, 지금도 매주 수요일 계속되고 있는 일본국 대사관 앞에서의 정례 시위도 사라지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나라 잃은 힘없는 백성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자기 탓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사회의 통념에 압도되어 오랫동안 괜히 얼굴 한 번 제대로 들고 사시지 못하다 이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들 영전에 삼가 명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아직 생존해 계셔서 나눔의 집에 함께 모여 서로의 등받이가 되어주시는 열분의 할머니를 비롯하여 혹시라도 아직도 이 하늘 아래 어느 그늘진 곳에서 여전히 외롭게 머무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이 계시다면, 물심양면으로 그동안 제대로 보상과 위로를 받지 못하신 그 분들 모두 과거의 상처가 제대로 치유되고 남은 여생만큼은 밝은 태양 아래서 마음껏 숨쉬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란다. (2003.8.2.)
* 이 글 가운데 나오는 김순덕 할머니는 서울 아산 병원에서 뇌출혈로 지난 2004년 6월30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귀천歸天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