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문화인이다. 그리고 세계인이다. 1년에 200일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고,그곳에선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을 찾는다. 아침에 KTX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저녁에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와 스폰서 조인식에 참여한다. 그런데도 그는 여유가 넘쳐보인다. 희끗한 머리에 선한 눈,마음 좋고 친절해 보이는 그는 얼핏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다. 그런데 속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지독한 열정과 철저한 자기관리가 숨어있다. 바로 김동호(68)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다. “바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니 행복하다”는 그를 서울 광화문 부산국제영화제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경기고 서울대법대를 나와 문화부 차관,영화진흥공사 사장,예술의 전당 사장 등을 거쳐 1995년부터 부산영화제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벌써 10년인데,성공적으로 유지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직원들에게는 최대한 자율성을 주고 책임은 제가 집니다. 1회부터 부산시와의 협력관계에 신경을 썼고 문화예술인 언론인과 긴밀한 유대관계,스폰서 구하기,예산 확보 등 대외적인 일이 바로 제 일입니다. 대신 영화선정은 프로그래머에게 위임했어요. 개·폐막작 정도만 회의를 합니다. 내가 관여하면 아마 판타스틱 영화제가 될걸요(웃음).”
-좋아하는 영화는.
“1년의 평균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내면서 한해에 200여편을 보는 셈인데,히치코크의 ‘새’같은 추리물을 좋아합니다. ‘샤인’ ‘피아니스트’ ‘몬순웨딩’도 재미있게 봤고요. 약간은 상업적이고 재미있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부산영화제의 자리와 앞날을 어떻게 보는지.
“타임스는 부산영화제가 아시아의 대표적인 영화제로 자리잡았다고 평했습니다. 아시아의 신인감독을 발굴하고 해외에 소개시키는 역할이 막중합니다. 부산에서 상영되는 아시아 월드 프리미어가 해가 갈수록 늘고 있고,세계 영화제를 맡은 집행위원장들이 부산에 와야만 새로운 영화를 보고 간다고 말합니다. 3회부터 진행된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도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가장 어려웠을 때는.
“시작할 때이지요. 영화계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말렸지요. 충무로도,부산도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았지요. 가장 어려운 것은 스폰서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첫 해를 예로 들면 총 22억원 중 부산시 3억 입장료 4억을 뺀 나머지 15억원은 협찬이었는데 순탄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10회로 자리잡아 든든한 대기업 후원이 생길만 한데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폭탄주 10잔은 거뜬할 정도의 체력이라는데.
“뭐,깡으로 버티는 거죠. 33년째 틈틈이 테니스를 하고 있고요. 또 장거리 비행이 부담스럽다고 웬만하면 거절하는 사람도 봤는데 나는 아니에요. 표를 주면 무조건 갑니다. 비행기에선 주로 잡니다. 첫번째 기내식 나올 때까지 억지로 졸음을 참고 먹은 후 푹 자다가 마지막 기내식 전에 일어납니다.”
-해외 영화인과 친분이 두텁다고 하는데.
“교류하고 있는 해외 영화인,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50∼60명,넓게 보면 200∼300명 정도 됩니다. 그중 ‘타이거 클럽’이라고 대만의 허우 샤오센 감독,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로테르담영화제 전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네덜란드 언론인 피터 반 뷰어론과 나,이렇게 모임을 만들어 자주 만납니다. 올 부산영화제에서도 이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실력이 상당한데.
“대학 때까진 과락이었고,문공부시절에도 손을 놓고 있다가 1970년 청량리에 있는 영어학원에 1년 동안 다녔어요. 1988년(그의 나이 51세) 영화진흥공사에 있을 땐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많아 4년 동안 코리아헤럴드학원에서 수강했고,그때 단어를 많이 외웠어요. 예술의 전당 그만 두는 날 다시 등록해서 또 학원에 다녔지요. 지금은 해외 나갈 일이 많다보니 많이 부딪치게 되고,그럭저럭 통용되는 정도이지요.”
-앞으로 계획은.
“책을 두어권 내볼까 합니다. ‘김동호가 만난 세계영화제 사람들’ ‘부산영화제 야사’에 관한 책이 될 듯합니다. 미술관기행에 관한 것도 있고요. 그림을 좋아해서 중요한 미술관을 많이 다녔지요. 영화제에 가서도 근처 미술관이 있으면 꼭 들렀습니다. 가끔 그림도 그립니다. 서예는 1962년 국전 입상했는데 그동안 바빠서 못했어요. 위원장 그만두면 제대로 한번 써볼까 합니다.”
-벌써 그만둘 것을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영화제 전용관이 개관되는 날 그만두고 싶어요. 앞으로 길어야 3∼4년후이지요. 외국 영화제의 경우 20년 이상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서양의 정서이지요. 우리나라에선 ‘권불십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속으로 이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웃음).”
멋지셔##
그는 문화인이다. 그리고 세계인이다. 1년에 200일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고,그곳에선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을 찾는다. 아침에 KTX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저녁에 비행기로 서울에 올라와 스폰서 조인식에 참여한다. 그런데도 그는 여유가 넘쳐보인다. 희끗한 머리에 선한 눈,마음 좋고 친절해 보이는 그는 얼핏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다. 그런데 속에는 젊은이 못지않은 지독한 열정과 철저한 자기관리가 숨어있다. 바로 김동호(68)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다. “바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니 행복하다”는 그를 서울 광화문 부산국제영화제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경기고 서울대법대를 나와 문화부 차관,영화진흥공사 사장,예술의 전당 사장 등을 거쳐 1995년부터 부산영화제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벌써 10년인데,성공적으로 유지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직원들에게는 최대한 자율성을 주고 책임은 제가 집니다. 1회부터 부산시와의 협력관계에 신경을 썼고 문화예술인 언론인과 긴밀한 유대관계,스폰서 구하기,예산 확보 등 대외적인 일이 바로 제 일입니다. 대신 영화선정은 프로그래머에게 위임했어요. 개·폐막작 정도만 회의를 합니다. 내가 관여하면 아마 판타스틱 영화제가 될걸요(웃음).”
-좋아하는 영화는.
“1년의 평균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내면서 한해에 200여편을 보는 셈인데,히치코크의 ‘새’같은 추리물을 좋아합니다. ‘샤인’ ‘피아니스트’ ‘몬순웨딩’도 재미있게 봤고요. 약간은 상업적이고 재미있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부산영화제의 자리와 앞날을 어떻게 보는지.
“타임스는 부산영화제가 아시아의 대표적인 영화제로 자리잡았다고 평했습니다. 아시아의 신인감독을 발굴하고 해외에 소개시키는 역할이 막중합니다. 부산에서 상영되는 아시아 월드 프리미어가 해가 갈수록 늘고 있고,세계 영화제를 맡은 집행위원장들이 부산에 와야만 새로운 영화를 보고 간다고 말합니다. 3회부터 진행된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도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가장 어려웠을 때는.
“시작할 때이지요. 영화계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말렸지요. 충무로도,부산도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았지요. 가장 어려운 것은 스폰서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첫 해를 예로 들면 총 22억원 중 부산시 3억 입장료 4억을 뺀 나머지 15억원은 협찬이었는데 순탄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10회로 자리잡아 든든한 대기업 후원이 생길만 한데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폭탄주 10잔은 거뜬할 정도의 체력이라는데.
“뭐,깡으로 버티는 거죠. 33년째 틈틈이 테니스를 하고 있고요. 또 장거리 비행이 부담스럽다고 웬만하면 거절하는 사람도 봤는데 나는 아니에요. 표를 주면 무조건 갑니다. 비행기에선 주로 잡니다. 첫번째 기내식 나올 때까지 억지로 졸음을 참고 먹은 후 푹 자다가 마지막 기내식 전에 일어납니다.”
-해외 영화인과 친분이 두텁다고 하는데.
“교류하고 있는 해외 영화인,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50∼60명,넓게 보면 200∼300명 정도 됩니다. 그중 ‘타이거 클럽’이라고 대만의 허우 샤오센 감독,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로테르담영화제 전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네덜란드 언론인 피터 반 뷰어론과 나,이렇게 모임을 만들어 자주 만납니다. 올 부산영화제에서도 이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실력이 상당한데.
“대학 때까진 과락이었고,문공부시절에도 손을 놓고 있다가 1970년 청량리에 있는 영어학원에 1년 동안 다녔어요. 1988년(그의 나이 51세) 영화진흥공사에 있을 땐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많아 4년 동안 코리아헤럴드학원에서 수강했고,그때 단어를 많이 외웠어요. 예술의 전당 그만 두는 날 다시 등록해서 또 학원에 다녔지요. 지금은 해외 나갈 일이 많다보니 많이 부딪치게 되고,그럭저럭 통용되는 정도이지요.”
-앞으로 계획은.
“책을 두어권 내볼까 합니다. ‘김동호가 만난 세계영화제 사람들’ ‘부산영화제 야사’에 관한 책이 될 듯합니다. 미술관기행에 관한 것도 있고요. 그림을 좋아해서 중요한 미술관을 많이 다녔지요. 영화제에 가서도 근처 미술관이 있으면 꼭 들렀습니다. 가끔 그림도 그립니다. 서예는 1962년 국전 입상했는데 그동안 바빠서 못했어요. 위원장 그만두면 제대로 한번 써볼까 합니다.”
-벌써 그만둘 것을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영화제 전용관이 개관되는 날 그만두고 싶어요. 앞으로 길어야 3∼4년후이지요. 외국 영화제의 경우 20년 이상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서양의 정서이지요. 우리나라에선 ‘권불십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속으로 이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웃음).”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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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정무직공무원, 행정공무원, 영화기관단체인
출생일:1937년 8월 6일
소속: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前 문화부 차관 (제2대)
학력:서울경기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행정학 - 한양대학교행정대학원
신 체:165cm, 63kg
출 생 지:강원 홍천
혈 액 형:B형
경력
1961 - 1972 문공부 國內과장·문화과장
1962 - 국전 입선
1965 - 한국미협 회원
1973 - 문공부 문화국 국장
1973 - 문공부 보도국 국장
1977 - 문공부 공보국 국장
1979 - 문공부 국제교류국 국장
1980 - 문공부 기획관리실 실장
1988 - 영화진흥공사 사장
1992 - 예술의전당 사장
1992 - 문화부 차관
1993 -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1995 - 1996 동신대학교 객원교수
1995 - 1998/02 마이TV 대표이사 사장
1996/03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1996 -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1997/03 -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객원교수
1998/11 - 1999/03 강원겨울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1999/06 - 세종문화회관 이사
1999 - 아시아영화진흥기구 부의장
2000 - 중앙대 첨단영상전문대학원 연구교수
2001/09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수상경력
2005년 제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공로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2000년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기사장
1993년 황조근정훈장
1972년 홍조근정훈장
1963년 근정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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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뷰 나의 30년후&부산국제영화제.
올해엔 꼭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