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는 신앙을 증거할 수 없다!

최용일200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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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예수, 나름대로 파격이지만 파문감은 아니다.

 


예수를 흑인 유태인으로 설정한 사상 첫 영화 '컬러 오브 크로스' 가 10월 미국에서 개봉되면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이어 또 한 차례 종교논쟁이 할리우드에서 펼쳐질 전망이다. 영화의 각본도 썼으며 직접 예수로 출연하기도 한 흑인 장 클로드 라마르 감독은 영화제작비 250만 달러를 자비로 부담했다고 한다. 아마 흑색 예수 영화에 돈 댈 사람이 없었겠지 싶다. 

 

 

 "난 예수가 흑인이었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가 백인, 라틴아메리칸, 심지어는 아시아인일 수도 있다. 컬러 오브 크로스는 사람들의 편을 가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넓히자는 것이다.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가 어떻게 생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번 영화 '컬러 오브 크로스'는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달리 예수의 겪는 잔혹한 고문이나 형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다. 대신 예수와 12제자, 그리고 그의 가족이 감내해야 하는 인간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지금까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웨스턴영화 '갱 오브 로지즈'와 '브라더스 인 암스' 등 도발적인 영화들을 주로 만들어왔던 그의 전력에 비하면 상당히 얌전한 축에 속한다. 그럼에도 논란이 될 것처럼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예수가 흑인으로 묘사됐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화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예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에 그려진 대로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백인으로 묘사돼 온 것에 비해 파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흑인 예수’를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 1월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논란이 됐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마크 돈포드메이 감독의 ‘선 오브 맨(Son of Man·사진)’이 그랬다. 2000여년 전 팔레스타인 땅의 예수를 현대 아프리카의 흑인 혁명가로 바꿔 그렸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온화한 서구인 모습으로 각인된 예수 이미지를 부수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마찬가지로 라마르 감독의 영화도 그럴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흑인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정립하고자 하는 소망이 이번 영화를 만들기로 한 중요한 계기였다. 할리우드가 흑인 예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가? 곧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위험도도 크지만 필요한 일이다"는 라마르 감독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세부적으로는 더 많은 다양성을 가질 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3색인종이 모여 살며, 그 모든 인종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하느님이나 예수가 반드시 백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중근동이 역시 백인들만 사는 땅이 아님에도 유럽인이 자기 시각으로 그려놓은 백색 예수를 흑색으로 그렸다는 사실만으로 파문이 인다면 그야말로 블랙코메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종교를 빙자한 테러의 근원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종교를 빙자한 테러리즘이 극성을 떨고 있다. 마치 성전이라는 이름하에 타종교에 속한 자를 이른바 마귀로 단죄하려던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사냥을 다시 보는 듯하여 환멸을 느낀다.

 

 

칼로는 신앙을 증거할 수 없다!
서방세계는 지하드라는 이름하에 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비난하지만 성전이 지하드로 십자군이 테러리스트로 바뀐 것 말고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니 중세로부터 성전과 지하드, 십자군과 반십자군이 공존했던 것은 아닌가? 작용이 있으니 반작용이 있는 것이지 손뼉은 혼자서 쳐지지 않는 법이다.


미국이 대변자가 된 서양세계는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손에 칼을 든”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중세가 아닌 지금 현존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지만, 그런 미국 역시 “한손에 총을 들고 한손에 성경을 들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은 되고 코란은 안된다는 설법이라면 그 역시 억설이다.  아니 더욱 심각한 것은 양측 모두 성경이든 코란이든 그런 것조차 이제는 들 양심조차 없는지, 들 힘조차 없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서구세계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을 교조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고 그 프로파겐다가 어느 정도는 먹혀서 성경에서와 같은 악마를 응징하는 선악대결로 반테러전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 세계에 조화와 평화를 심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내세우는 성경에는 비신자를 악마로 몰아가도록 요구하는 지침이 많이 있지 않은가?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거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 내 탓이라는 말까지도 악마가 아닌 사람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비신자는 일단 교화되기 전까지는 악마이기에 사랑할 이웃도, 심지어 사랑할 원수도 아니요, 그저 제거함에 있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 모르게 할 대상이거나 제거하지 못한 게 내 탓이라고 말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게 기독교의 교리인 듯하다.

 

칼로는 믿음을 얻지도, 심지어는 지킬 수조차 없다.


물론 이슬람처럼 기독교가 먼저 도발을 한 건 아닌 듯하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도 장담 못하겠지만 적어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세계적 차원의 테러의 경우는 그렇다. 그러나 그런 테러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의 사조는 기독교 세계가 만들어 전파하고 강요해온 것임을 어쩌랴! 최근 영화 다빈치코드에 대해서, 마돈나의 엽기적 예수재현 공연에 대해서 기독교계가 보여준 속좁고 배타적인 정신세계와 이슬람의 지하드와 원리적으로 다를 게 무엇인가? 그저 다르다면 하나는 가진 게 없는 자의 극단적 분노 표출이고, 다른 하나는 가진 게 많으나 마음이 가난한 자의 정신적 분노 표출 아니겠는가?   


올해는 기독교계는 두 번의 중요한 예술 탄압을 시도한 바 있다. 예수의 일생과 사후를 잘못 그린 영화 다빈치코드가 기독교에 대한 명예를 훼손한다 하여 한기총에서 상영금지 압력에 나선 것만으로도 충분히 코미디 대상감일 것이다. (물론 세계 각국이 그러했다고 강변은 하겠지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까지 나서 법적으로 그걸 막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친히 발언하여 웃음꺼리가 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한류아닐까? 바코드가 닮은 대형교회와 거대정당, 이 둘이 벌이는 명랑.발칙한 러브스토리가 보는 이의 속을 뒤집어놓는 엽기.주접의 결정판이 되고 말았으며 다빈치 코드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의 명예를 훼손하는 주범이 '다빈치 코드'라는데, 한국 교회에 더 이상 훼손될 명예가 남아 있기나 한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지난 4월의 일이다.

 

칼로는 신앙을 증거할 수 없다!

 

다빈치코드가 한바탕 교회를 휘저은 뒤 7월에는 마돈나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마돈나가 무대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에 대해 이번에는 발끈하기 좋아하는 개신교 말고 진득하고 장중하다는 평을 그래도 받아온 천주교가 먼저 나서 비난을 퍼부었다. 교황까지 나섰고 유태교와 이슬람까지 가세한다. 초록은 동색이랄까? 지들끼리는 칼질을 해도 종교 지도자를 희화화하는 작태는 같이 응징해야 하는 것이어서?


마돈나의 퍼포먼스에 대해 비판자들은 “예수 이미지 차용이며 모욕이자 위험한 행동이므로 다음 콘서트에서는 십자가 장면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순전히 종교인들의 편협한 관점일 뿐이라는 점이다. 마돈나의 이번 공연은 팝 마니아들이 뽑은 “올해 가장 가보고 싶은 공연”으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공연 중 십자가에 스스로 자신을 묶어 놓는다거나 바에 올라가 매달리는 등의 퍼포먼스를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타이트하고 섹시한 의상에 젊은 백업 댄서보다 더욱 몸놀림이 가벼웠던 것에 대해 해외언론들은 “마돈나의 참 모습은 공연에서 느낄 수 있다”며 극찬했다.

 

다빈치코드가, 마돈나가 성전의 대상인가?


우리는 정치가나 연예인에 대해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갖는다. 일반인에 대해서 그랬다면 모욕이 될 수 있고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는 선을 넘나드는 패러디를 하기도 하지만 그 대상자라 하여 그 하나하나를 반박하지 못한다. 공인(?)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그저 그런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범접할 수 없는 공인중의 공인이고, 또 공인이어야 한다. 예수가 일개 촌부라면 다빈치든 누구든 그렇게 많은 대가들이 명작으로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대가들은 예수를 신성시했다 하여 괜찮고 다빈치코드라는 영화나 마돈나의 퍼포먼스는 예수를 비하했다 하여 안 되는 것은 무슨 논리일까? 예수교도들  스스로 예수를 공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사유화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다.


다빈치 코드'란 영화가 신성모독적이고 반기독교적이어서 기독교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과 초신자들에게 위험할 수 있다하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영금지 움직임이 있었다고 반박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대부분 기독교 후진국에서 나타난 일이었다. 이 영화의 상영을 둘러싼 국내 개신교 일각의 대응방식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교계 안팎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지엽적인 사고다. 이 영화의 주제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했고 아이를 두었다’는 주장에 있지 않으며, 그동안 기독교가 어떤 특정한 교리적 신념 때문에 얼마나 잘못된 일을 저질렀고, 지금도 그럴 수 있다는 하나의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점도 당연히 여기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국내 뿐 아니라 국외의 보수교회에서는 예수이해의 부당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정작 이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를 피해가려 한 것이며,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지은 잘못된 역사조차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겠다는 태도, 즉 보수 기독교 권력층의 오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마돈나는 또 뭘 어쨌길래... 종교계가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할수록 그녀의 몸짓은 더욱 격렬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스스로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본떠 예명을 지은 마돈나가 예전에도 종교계의 비위를 거스른 적이 여러 차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종교계의 비난이 그의 기행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마돈나가 이 콘서트 무대의 비디오 영상을 통해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인물들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를 히틀러, 오사마 빈 라덴,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과 비교하며 한껏 조롱했듯이 그의 공연에는 (비록 개똥철학일지 모르지만) 그의 철학과 사상이 담긴 것이고, 그것을 특정 종교가 좌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들, 특히 교조주의에 더 빠져 탐닉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의 사유물도 아니고, 예술이 예수의 사유물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가 사적인 존재였다면 다빈치 코드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마돈나가 그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 이슬람교나 다른 어떤 종교도 마찬가지겠지만 종교의 참모습을 알리는 것은 한편의 영화나 소설, 시나 퍼포먼스가 아니라 교회 자신이고 그 목회자나 신자들일 것이다. 한 편의 시나 소설이 창시자나 교주를 욕했다고 현상금을 걸거나, 기사 한줄이 모욕적이라고 언론사를 점거하거나, 영화나 퍼포먼스가 교리를 부정했다 하여 불매운동을 하는 것은 종교를 빙자한 테러임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교회여, 당연히 두려워할 것은 그런 비신자나 냉담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니라 예수 없는 한국 교회일 것이다. '다빈치 코드'를 탓하기 전에 모래보다 부실한 자신의 발밑부터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특히 그런 비난을 하고 있는 스스로 자신들이 목을 치고 구덩이에 쳐 박았던 이민족의 신들, 내지는 조상신들이 당한 치욕과 통한의 역사를 돌이켜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기독교도들이, 그나마 이슬람교도들에 비해 그런 면에서는 덜 호전적인 것이 사실이고 같은 기독교라도 개신교보다는 천주교나 성공회가 덜 호전적이긴 하지만 개념상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돈나가, 다빈치코드가 한 작은 일탈에 그토록 슬퍼하고 분노하는 그들이 가랑잎은 아닌지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게 비기독교도의 마음일 것이다.

 

 

예수는 기독교의 사유물도 아니고 예술이 예수의 전유물도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혹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악마의 범주에 이교도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던가? 예수는 기독교의 독점물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는 생각, 기독교인들 스스로 예수에 대한 이해를 보다 확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생각이라면 비기독교인에 대해서 그렇게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고, 최소한  그렇게 악마 대하듯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하니 "예술을 예수라고 맘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결단코 말할 수 있다. "예수, 아니 세상의 주재자인 하느님이라한들 예술을 맘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고. 마치 모든 세상의 피조물을 다 창조한 듯 말해지는 하느님조차 악마에 대해서는 자신의 피조물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치라고나 할까? 사탄을 물리쳐야 할 경쟁자처럼 말하면서 신도들의 도움을 청하면서도 만물을 창조했다고 억지부리는 것처럼 예술 역시 그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신격화하는 예술은 내 편이요, 나를 폄하하는 불경스런 외설은 이단이라 한다면 그것은 사탄의 영역인가 보다. 창조해놓고도 다스리지 못하는 무기력함과 내가 낳은 자식 내맘대로 못하는 어버이 심정이 비슷하다는 것을 다빈치코드가, 마돈나의 퍼포먼스가 증거한다.  예술이 사탄이라는 생각은 사유를 골방에 가두어놓았던 중세에도 없었던 발상이다.  

 

그 동안 예수를 포함한 많은 종교를 둘러싼 많은 논쟁들이 이미 도그마(Dogma)가 된 이해(내용)를 전제한 것이기에, 논쟁은 여지없이 말의 성찬이 아닌 피의 성찬이 되는 것이다. 단 한줄의 내용의 첨삭조차 신성모독이 되는 기독교 내부 상황을 직시했다면 다빈치코드가, 마돈나가 준 다른 시각을 기뻐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다양성이든 뭣이든, 아니면 냉담자를 기다리다 돌아온 탕아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이제 기독교계도 교회와 교인 밖의 예수에 대한 이해에 눈을 돌림으로써 예수 이해의 틀(형식) 그 자체를 넓혀야 할 때다. ‘남’의 예수 또한 ‘우리’의 예수의 한 모습이라는, 보다 폭넓은 수용 자세가 기독교인들에게 요청되는 것이며, 또한 예수라는 존재에 대한 다양한 종교들의 이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도 넓혀지는 대화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점이 바로 서구 기독교 국가들보다 한국 기독교에 더 더욱 요구되는 것은 그런 전철을 밟아 스스로도, 국가까지도 쇠멸시켜버린 주자학의 역사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