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의 생애 최후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일본 유학시절 교토 도시샤대 재학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찍은 윤동주 사진과 여기에 대한 해설이 현대문학 9월호에 게재됐다. 이 사진을 찍은 후 한 달 뒤 윤동주는 연행 되었고 얼마 뒤 생체실험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어갔다.
윤동주는 이육사,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꼽힌다. 이육사의 시가 '광야'와 같이 남성적이고 의지적이며 참여적이라면, 한용운은 여성적 이고 부드러운 어조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시를 썼으며, 윤동주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자기성찰의 시를 썼다.
지난해에는 동주의 여동생이 오랜 침묵을 깨고 오빠에 관한 회고를 세상에 알렸다. 그녀의 기억을 통해 윤동주의 사적인 모습을 조금 엿보기로 하자.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 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 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 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 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 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 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 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 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 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 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오빠의 우스개는 조금 싱겁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허리를 부여잡곤 했다. 할머니는 오빠가 고향에 오면 두부를 만들어서 먹이시곤 했는데, 오빠랑 나를 데리고 콩을 맷돌로 갈아서 두부를 만드셨다.
한참동안 말없이 맷돌질을 하던 오빠가 “어서 오세요” 하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서 “오빠, 누가 왔어?” 하고 물으면 “아니, 그냥 심심해서”라고 대답한다. 할머니께선 “요 녀석이 또 할미를 놀렸구나” 하시며 웃으시곤 했다.
오빠의 싱거운 우스개는 그가 쓴 여러 편의 동시에도 나온다. ‘만돌이’ 같은 동시에 오빠의 장난기가 잘 배어 있다. 오빠의 시를 읽어보면 오빠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난다.
오빠는 과묵하긴 했지만 사진 속의 모습처럼 늘 심각한 건 아니었다. 딱 한 번 아주 심각한 오빠의 모습을 목격했는데, 연희전문을 지원하면서 의대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때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인 오빠가 문과에 가는 것보다 의대로 진학하는 것 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다. 그때 오빠가 밥까지 굶어가면서 문과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오빠가 문과로 가게 됐다.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도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지낸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 보니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
문익환 목사와 동갑으로서 문목사의 어머니 젖을 함께 나눠먹고 자랐다는 일화가 눈에 띈다. 문목사 어머니의 젖은 아마도 애국지사를 길러내는 젖이었던 듯 하다. 단순히 같은 젖을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만큼 각별한 인연의 두 집안이었으니 어찌 보 면 두 사람의 인생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니었을까. 윤동주는 일제시대의 시국사범 이었고 문익환 목사는 우리 시대의 시국사범으로서 고초를 겪었으니...
시인 윤동주는 소설가 이광수에게 무엇을 느꼈을까? 당대의 문학천재였던 이광수. 그는 신문 기자가 연재 소설 원고를 받으러 오면 잠시 기다리라 일러놓고 돌아앉아 즉석에서 써서 건네어 줄 만큼 타고난 글쟁이 였다. 그러나 그의 생은 당시 많은 글쟁이들이 그랬듯 타인에게 빚을 지며 사는 것이었으니, 그는 당시 조선 최초의 여의사였던 허영숙을 만남으로써 평생을 그녀에게 의지하여 살게 되었다. 유부남이었던 그가 처음부터 불륜을 작심한 건 아니었다. 가난했던 소설가였던 그는 결핵에 걸려 병원을 찾았는데 진찰비조차 없는 그를 딱하게 여긴 허영숙(당시 의전에 다니던 여학생이었다) 진찰비를 빌려줌으로써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다. 결혼을 한 뒤에도 계속 병이 재발했고 그때마다 허영숙의 도움으로 회복하였고 생활 역시 병원을 개업한 허영숙이 꾸려가다시피 했다. 신여성과의 사랑에 빠져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 그리고 일제의 요구에 조국을 배반하는 친일 문학을 한 남자. 겉으로만 보기에 그는 윤동주와 너무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한국문학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어쩌면 그렇게 누군가 의 도움을 받고 시대와 타협하면서 가늘고 길게 살려 발버둥쳤기에 한국 의 톨스토이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에 비하면 윤동주의 생은 얼마나 철저하게 외로웠던가. 오직 문학이 좋아 의대에 가라던 아버지의 뜻을 거부했던 청년. 단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 게 살기 위해 시대의 양심을 노래했건만 그 사적인 노래가 공적인 표적인 되어 그의 삶을 그렇게 어이없이 토막내어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이 해방후의 공간에서조차 문학속의 자아와 생활속의 자아가 일치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 위태로웠던 시절, 그는 그 두 자아의 일치를 꿈꿨던 순진 한 글쟁이였던 것이다. 아, 윤동주! 그의 이러한 결벽증이 그 자신을 시대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했던 것이 아닐까.
'자화상'과 '십자가'를 읽을 때마다 그 모습은 더욱 선연하다.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최후의 사진과 여동생의 회고 ..
일본 유학시절 교토 도시샤대 재학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찍은 윤동주 사진과 여기에
대한 해설이 현대문학 9월호에 게재됐다. 이 사진을 찍은 후 한 달 뒤 윤동주는 연행
되었고 얼마 뒤 생체실험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어갔다.
윤동주는 이육사,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꼽힌다.
이육사의 시가 '광야'와 같이 남성적이고 의지적이며 참여적이라면, 한용운은 여성적
이고 부드러운 어조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시를 썼으며, 윤동주는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자기성찰의 시를 썼다.
지난해에는 동주의 여동생이 오랜 침묵을 깨고 오빠에 관한 회고를 세상에 알렸다.
그녀의 기억을 통해 윤동주의 사적인 모습을 조금 엿보기로 하자.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이 있다.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면서 남몰래
눈물을 훔쳐내던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나 젊은 나이
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것은 언제부턴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슬퍼하기보다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려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북간도 룽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공산당을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중기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에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시가 31편밖에 실려 있
지 않다. 현재 116편이 게재된 증보판의 시편들 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 채 월
남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오빠 얘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던 윤혜원씨는 윤동주 시인 60주기를 맞는
2005년을 기점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오빠의 추모행사
를 통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화들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중 하나가 ‘오빠 윤동주의
장난기’다. 세상엔 입을 꼭 다문 사진만 공개되어 윤동주는 과묵한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데, 늘 조용하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짓궂은 오빠였다는 것이다.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 그것들은 오빠의 밝은
내용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껏 언론의 인터뷰를 한사코 피해온 그는 “동주 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
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 연유로 윤씨는 남편 오형범씨와 함께 서울, 부산, 필리핀, 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
다.
단식투쟁 끝 문과 진학
윤혜원씨는 1924년생으로 윤동주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 그러나 몸이 허
약한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 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이 외삼
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때다. 다음은
윤씨의 회고.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젖이 부족하자 동주 오빠는 같은 해에 태어난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 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듣기로는 동주 오빠가 열한 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
다.
오빠는 워낙 책읽기를 좋아해서 오전 일찍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
옷 잠방이와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오빠의 우스개는 조금 싱겁기는 했지만 할머니는 허리를 부여잡곤 했다. 할머니는 오빠가
고향에 오면 두부를 만들어서 먹이시곤 했는데, 오빠랑 나를 데리고 콩을 맷돌로 갈아서
두부를 만드셨다.
한참동안 말없이 맷돌질을 하던 오빠가 “어서 오세요” 하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서 “오빠, 누가 왔어?” 하고 물으면 “아니, 그냥
심심해서”라고 대답한다. 할머니께선 “요 녀석이 또 할미를 놀렸구나” 하시며 웃으시곤
했다.
오빠의 싱거운 우스개는 그가 쓴 여러 편의 동시에도 나온다. ‘만돌이’ 같은 동시에 오빠의
장난기가 잘 배어 있다. 오빠의 시를 읽어보면 오빠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난다.
오빠는 과묵하긴 했지만 사진 속의 모습처럼 늘 심각한 건 아니었다. 딱 한 번 아주 심각한
오빠의 모습을 목격했는데, 연희전문을 지원하면서 의대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때였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인 오빠가 문과에 가는 것보다 의대로 진학하는 것
이 좋겠다고 판단하셨다. 그때 오빠가 밥까지 굶어가면서 문과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오빠가 문과로 가게 됐다.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도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지낸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 보니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
문익환 목사와 동갑으로서 문목사의 어머니 젖을 함께 나눠먹고 자랐다는 일화가 눈에
띈다. 문목사 어머니의 젖은 아마도 애국지사를 길러내는 젖이었던 듯 하다. 단순히
같은 젖을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만큼 각별한 인연의 두 집안이었으니 어찌 보
면 두 사람의 인생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니었을까. 윤동주는 일제시대의 시국사범
이었고 문익환 목사는 우리 시대의 시국사범으로서 고초를 겪었으니...
시인 윤동주는 소설가 이광수에게 무엇을 느꼈을까?
당대의 문학천재였던 이광수. 그는 신문 기자가 연재 소설 원고를 받으러 오면
잠시 기다리라 일러놓고 돌아앉아 즉석에서 써서 건네어 줄 만큼 타고난 글쟁이
였다. 그러나 그의 생은 당시 많은 글쟁이들이 그랬듯 타인에게 빚을 지며 사는
것이었으니, 그는 당시 조선 최초의 여의사였던 허영숙을 만남으로써
평생을 그녀에게 의지하여 살게 되었다. 유부남이었던 그가 처음부터
불륜을 작심한 건 아니었다. 가난했던 소설가였던 그는 결핵에 걸려 병원을
찾았는데 진찰비조차 없는 그를 딱하게 여긴 허영숙(당시 의전에 다니던
여학생이었다) 진찰비를 빌려줌으로써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다. 결혼을
한 뒤에도 계속 병이 재발했고 그때마다 허영숙의 도움으로 회복하였고
생활 역시 병원을 개업한 허영숙이 꾸려가다시피 했다. 신여성과의 사랑에
빠져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 그리고 일제의 요구에 조국을 배반하는 친일
문학을 한 남자. 겉으로만 보기에 그는 윤동주와 너무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한국문학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어쩌면 그렇게 누군가
의 도움을 받고 시대와 타협하면서 가늘고 길게 살려 발버둥쳤기에 한국
의 톨스토이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에 비하면 윤동주의 생은 얼마나 철저하게 외로웠던가. 오직 문학이 좋아
의대에 가라던 아버지의 뜻을 거부했던 청년. 단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
게 살기 위해 시대의 양심을 노래했건만 그 사적인 노래가 공적인 표적인
되어 그의 삶을 그렇게 어이없이 토막내어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이 해방후의 공간에서조차 문학속의 자아와 생활속의 자아가 일치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 위태로웠던 시절, 그는 그 두 자아의 일치를 꿈꿨던 순진
한 글쟁이였던 것이다. 아, 윤동주! 그의 이러한 결벽증이 그 자신을 시대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했던 것이 아닐까.
'자화상'과 '십자가'를 읽을 때마다 그 모습은 더욱 선연하다.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