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소설가 김영하, 그의 이름을 들으면 새내기 시절 도서관 구석에서 키득거리며 읽었던 그의 소설집들, 학생수첩에 소설 속 문장을 옮겨적었던 일, 대부분의 작품이 대출중이어서 애를 태웠던 기억, 목돈이 생긴 날 온라인 서점에서 '김영하'로 검색된 책을 몽땅 주문해버리곤 종일 배실배실 설레했던 어떤 날 등이 포털사이트의 자동검색기능처럼 떠오른다.
새 장편 에 관한 이야기는 꽤 오래 전 신문 지면에서 읽은 적이 있다. 구상중이라고 했는지 집필중이라고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인터넷과 핸드폰에 익숙해지고, 문화 취향도 꽤나 세련되어진 간첩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 때부터 나는 소설을 기다렸다, 고 적으면 좀 남세스런 구석이 있고, 좌우지간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마치 집필에 관여라도 했었던 것마냥 괜히 반가웠다. 예상보다 심한 두께의 책을 손에 들었을 때도 때 그의 문장이 보여준 흡입력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본론부터 불어보자면 이전만큼의 날카로운 감각이나 유머가 좀 뭉툭해진 느낌. 요즘 기분탓인가, 의아해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책을 읽는 이틀 동안 누가 무얼 읽느냐고 물으면 나는 자동으로 "작가가 늙었나봐"라며 과장을 섞어 징징댔다. 어린 시절 많은 우상들을 떠나보냈듯 '김영하 오빠'의 약발도 다되어 가는 듯한 불안이 엄습한다.
권태
소설은 오전 7시부터 다음날 7시까지 딱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21년간 남한에서 조용히 지내던 간첩 기영에게 복귀 명령이 내려온다. 기영은 서울 거리를 헤매며 자신의 '옮겨다 심은 삶'을 반추한다. 그의 아내 마리는 자신보다 스무살 어린 애인의 '쓰리썸' 요구에 응하고 나서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중학생인 딸 현미는 남자친구의 집에 초대되고 (거의) 첫 키스를 경험한다. 여기에 학교에서 현미에게 국어를 가르치며 기영의 옛 애인인 지현과 기영의 뒤를 쫓는 철수의 이야기가 덧붙는다.
김영하는 을 흉내내고 싶었을까. 북한에서 21년, 남한에서 21년을 살아온 기영의 삶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소설에 이념이나 선택의 문제 등이 그렇게 날카롭게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 김영하는 학생운동사로 무협지를 썼던 이력이 있는 만큼 '이념의 세기' 당시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나 읽고 나면 쉽게 휘발된다. 두고두고 곱씹을 대목이 없다. 오히려 삶의 권태 문제를 건드릴 때의 장면들이 더 오래 남는다. '옮겨다 심은 사람'의 삶은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우선 자신의 정체가 들켜선 안되고, 더불어 자연스레 익혀야 할 문화적 감각은 물론 그 이후의 권태까지 그럴듯하게 꾸며야 한다. 따라서 이방인이 이야기 하는 권태는 일상의 권태보다 몇번 꼬여있고, 뒤틀려있다.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몇 번을 꼬아도 권태는 권태다. 간첩들은 '혁명의 그날이 와봤자 만화방도 못 가고 전자오락도 못가고,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온다 쳐도, 그 다음엔 뭘하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정신적 시민권'을 얻기 위해 '빠삐용과 대탈추를 학습하고 김추자와 나훈아를 쪽지시험...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대답이 뭘 의미하는지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회로와 마이크로칩으로 만들어진 사이보그 같은 삶'을 택하고 '진부함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들 역시 권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목적은 이념이었으나 문화의 '저주 섞인 세례'(문화가 인간을 충만하게 하는지 황폐하게 하는지에 평가는 잠시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주와 세례를 섞는 정도의 균형감이면 되지 않을까)를 받아 그들은 권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기형적으로 이식된 삶이든, 토착 식물같은 삶이든 혹은 거창한 꿈을 꾸었든, 처음부터 꿈을 거세당했든간에 인간은 누구나 권태에 시달린다. 특히나 '사람'에 온전히 기대지 않고 핸드폰, 인터넷 등 혼자 놀거리가 많아진 지금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선택
한편으로 기영은 남파된 다른 요원들에게 어울리는 이름, 직업과 그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임무를 맡고 있다. 신을 연상케 한다. 어떤 소설가들은 소설 속에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소설가나 미술가 등 무언가를 창작하는 인물을 자주 등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제한된 상황에서나마 '전지전능'을 경험하는 기영은 행복했을까? 그것보다는 기영의 정체를 알고 그를 맹비난하는 아내 마리의 모습이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새내기 시절 마리는 굽이 높은 새 구두를 신고 '차밍워크스쿨'이라는 걸음걸이 강습을 받으러 간다. 마리는 세련된 강남 길의 도회적인 분위기에 매혹당한다. 그러나 다리를 삐어 꼼짝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 쿨하고 세련된 주민들의 '호기심을 감출 줄 아는 도회적 태도'에 그녀는 질려버린다. 이날 그녀를 도우러 온 이가 운동권 선배였고 결국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하고 기영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마리는 기영이 정체를 밝히자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집요한 악의와 음모에 의해 '잘 나가고 있던 내 삶의 행로를 슬쩍 뒤틀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오열한다. 마리는 모든 억울함을 남편이자 간첩인 기영에게 덮어 씌우려 한다.
인간의 선택이란 미약하고 헛된 것일까? 누군가의 음모에 내 삶이 뒤틀렸다는 결론은 그저 강하지 못한 마리의 섣부른 투정이었을까? 몇 가지 경험을 되뇌어 보면 오래 생각해 결정했던 선택이 그 빛을 잃는 것은 한 순간이곤 했다. 분명히 나의 선택과 결단만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망해버린 선택에 대해 내 자유의지의 무능을 원망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 결국엔 자신도 모르게 권태를 탐닉하며 견디고 있는 것은 또 아닐까? 권태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며, 삶을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마리가 쓰리썸을 적극적으로 승인하거나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자신이 권태 속에 있다고 오해함으로써, 그것을 한 번 슬쩍 벗어나보고 싶다는 욕망에 따르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선택과 자유의지의 무능에 대해서는 마음 속에서조차 언급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와 착각과 자기방어기제 안에서 마리는 결국 어린 애인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남는 것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다. 소설을 덮으면서 딸 현미 역시 마리의 삶을 재연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읽는다. 현미의 첫키스는 '날카로운 첫키쓰의 추억'이 아니라 앞으로 무한 반복될 권태어린 삶의 시작처럼 그려진다.
은 기대보다 지루한 편이었지만 작가에 대해 아주 관심을 놓아버릴 지독한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은 그의 다음 소설을 또 초조하게 기다려본다.
[빛의 제국] 권태와 선택과 약발
오빠가 돌아왔다. 소설가 김영하, 그의 이름을 들으면 새내기 시절 도서관 구석에서 키득거리며 읽었던 그의 소설집들, 학생수첩에 소설 속 문장을 옮겨적었던 일, 대부분의 작품이 대출중이어서 애를 태웠던 기억, 목돈이 생긴 날 온라인 서점에서 '김영하'로 검색된 책을 몽땅 주문해버리곤 종일 배실배실 설레했던 어떤 날 등이 포털사이트의 자동검색기능처럼 떠오른다.
새 장편 에 관한 이야기는 꽤 오래 전 신문 지면에서 읽은 적이 있다. 구상중이라고 했는지 집필중이라고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인터넷과 핸드폰에 익숙해지고, 문화 취향도 꽤나 세련되어진 간첩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 때부터 나는 소설을 기다렸다, 고 적으면 좀 남세스런 구석이 있고, 좌우지간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마치 집필에 관여라도 했었던 것마냥 괜히 반가웠다. 예상보다 심한 두께의 책을 손에 들었을 때도 때 그의 문장이 보여준 흡입력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본론부터 불어보자면 이전만큼의 날카로운 감각이나 유머가 좀 뭉툭해진 느낌. 요즘 기분탓인가, 의아해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책을 읽는 이틀 동안 누가 무얼 읽느냐고 물으면 나는 자동으로 "작가가 늙었나봐"라며 과장을 섞어 징징댔다. 어린 시절 많은 우상들을 떠나보냈듯 '김영하 오빠'의 약발도 다되어 가는 듯한 불안이 엄습한다.
권태
소설은 오전 7시부터 다음날 7시까지 딱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21년간 남한에서 조용히 지내던 간첩 기영에게 복귀 명령이 내려온다. 기영은 서울 거리를 헤매며 자신의 '옮겨다 심은 삶'을 반추한다. 그의 아내 마리는 자신보다 스무살 어린 애인의 '쓰리썸' 요구에 응하고 나서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중학생인 딸 현미는 남자친구의 집에 초대되고 (거의) 첫 키스를 경험한다. 여기에 학교에서 현미에게 국어를 가르치며 기영의 옛 애인인 지현과 기영의 뒤를 쫓는 철수의 이야기가 덧붙는다.
김영하는 을 흉내내고 싶었을까. 북한에서 21년, 남한에서 21년을 살아온 기영의 삶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소설에 이념이나 선택의 문제 등이 그렇게 날카롭게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 김영하는 학생운동사로 무협지를 썼던 이력이 있는 만큼 '이념의 세기' 당시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나 읽고 나면 쉽게 휘발된다. 두고두고 곱씹을 대목이 없다. 오히려 삶의 권태 문제를 건드릴 때의 장면들이 더 오래 남는다. '옮겨다 심은 사람'의 삶은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우선 자신의 정체가 들켜선 안되고, 더불어 자연스레 익혀야 할 문화적 감각은 물론 그 이후의 권태까지 그럴듯하게 꾸며야 한다. 따라서 이방인이 이야기 하는 권태는 일상의 권태보다 몇번 꼬여있고, 뒤틀려있다.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몇 번을 꼬아도 권태는 권태다. 간첩들은 '혁명의 그날이 와봤자 만화방도 못 가고 전자오락도 못가고,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이 온다 쳐도, 그 다음엔 뭘하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정신적 시민권'을 얻기 위해 '빠삐용과 대탈추를 학습하고 김추자와 나훈아를 쪽지시험...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대답이 뭘 의미하는지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회로와 마이크로칩으로 만들어진 사이보그 같은 삶'을 택하고 '진부함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들 역시 권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목적은 이념이었으나 문화의 '저주 섞인 세례'(문화가 인간을 충만하게 하는지 황폐하게 하는지에 평가는 잠시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주와 세례를 섞는 정도의 균형감이면 되지 않을까)를 받아 그들은 권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기형적으로 이식된 삶이든, 토착 식물같은 삶이든 혹은 거창한 꿈을 꾸었든, 처음부터 꿈을 거세당했든간에 인간은 누구나 권태에 시달린다. 특히나 '사람'에 온전히 기대지 않고 핸드폰, 인터넷 등 혼자 놀거리가 많아진 지금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선택
한편으로 기영은 남파된 다른 요원들에게 어울리는 이름, 직업과 그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임무를 맡고 있다. 신을 연상케 한다. 어떤 소설가들은 소설 속에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소설가나 미술가 등 무언가를 창작하는 인물을 자주 등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제한된 상황에서나마 '전지전능'을 경험하는 기영은 행복했을까? 그것보다는 기영의 정체를 알고 그를 맹비난하는 아내 마리의 모습이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새내기 시절 마리는 굽이 높은 새 구두를 신고 '차밍워크스쿨'이라는 걸음걸이 강습을 받으러 간다. 마리는 세련된 강남 길의 도회적인 분위기에 매혹당한다. 그러나 다리를 삐어 꼼짝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 쿨하고 세련된 주민들의 '호기심을 감출 줄 아는 도회적 태도'에 그녀는 질려버린다. 이날 그녀를 도우러 온 이가 운동권 선배였고 결국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하고 기영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마리는 기영이 정체를 밝히자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집요한 악의와 음모에 의해 '잘 나가고 있던 내 삶의 행로를 슬쩍 뒤틀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오열한다. 마리는 모든 억울함을 남편이자 간첩인 기영에게 덮어 씌우려 한다.
인간의 선택이란 미약하고 헛된 것일까? 누군가의 음모에 내 삶이 뒤틀렸다는 결론은 그저 강하지 못한 마리의 섣부른 투정이었을까? 몇 가지 경험을 되뇌어 보면 오래 생각해 결정했던 선택이 그 빛을 잃는 것은 한 순간이곤 했다. 분명히 나의 선택과 결단만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망해버린 선택에 대해 내 자유의지의 무능을 원망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 결국엔 자신도 모르게 권태를 탐닉하며 견디고 있는 것은 또 아닐까? 권태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며, 삶을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마리가 쓰리썸을 적극적으로 승인하거나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자신이 권태 속에 있다고 오해함으로써, 그것을 한 번 슬쩍 벗어나보고 싶다는 욕망에 따르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선택과 자유의지의 무능에 대해서는 마음 속에서조차 언급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해와 착각과 자기방어기제 안에서 마리는 결국 어린 애인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남는 것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다. 소설을 덮으면서 딸 현미 역시 마리의 삶을 재연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읽는다. 현미의 첫키스는 '날카로운 첫키쓰의 추억'이 아니라 앞으로 무한 반복될 권태어린 삶의 시작처럼 그려진다.
은 기대보다 지루한 편이었지만 작가에 대해 아주 관심을 놓아버릴 지독한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은 그의 다음 소설을 또 초조하게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