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어울리지 않게도 피칠갑 영화는 눈뜨고 보지 못하는 필자건만, 의 연쇄 피칠갑 살인행각을 보는 2시간 내내, 통쾌했다.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고 석고로 질식시켜 죽이고 독극물로 죽이고 가위로 페니스를 싹둑 잘라 죽이고 차를 전복시켜 죽이고 면도날로 동맥을 끊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오로라 공주 스티커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피칠갑에 대한 역겨움은 기다림으로, 카타르시스로 변해갔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어찌 보면 단 하나,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도로 싸가지 없는 인생이 어디 피살자들뿐이겠냐 싶어, 오로라 공주의 응징은 실정법상(!) 너무 과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로라 공주에게는 법도, 과학수사를 입에 달고 다니는 국가권력도,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종교도, 끝내 해결해주지 못하는 억울함이 있다.
어린아이를 인간이기보다 하나의 소유물쯤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하는 아동폭력과, 타인의 안녕이 나의 데이트에 비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무관심과, 여자가 첫 손님이면 재수 없는 관습과, 같은 접촉사고를 내도 ‘아줌마’가 사고를 내면 쌍시옷 가득한 육두문자부터 나가는 미풍양속(!)과, 돈이면 정의도 사고파는 자본주의의 도덕률과…, 또 뭐가 있었더라?
이렇게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혹은 겪는지 인식하지도 못하고 지나치는 일상의 억울함들이 자로 잰 듯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면서 여섯 살배기 여자아이의 비참한 최후를 이끌어냈고, 중키에 눈이 크고 착하게 생긴(!) 한 여자를 연쇄살인마로 만들었다.
오로라 공주가 겪은 억울함은 내가, 이 사회가 생명과 사람(남녀 모두를 포함한) 중심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억울함이다. 단지 그 억울함이 연쇄살인을 감행할 용기와 광기를 불러일으킬 만큼 아귀가 맞아주지 않았을 뿐이다. 나 역시 마음으로는 언제나 복수를 꿈꾼다.
지금까지 영화사에 수많은 복수극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가까운 예로는 그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이 있다.
그러나 똑똑한 여배우에서 감독으로 새로운 명함을 내민 방은진이라는 여자가 만든 복수는 이전에 만들어진 복수보다 명쾌하고 거침없고 철저하다. 여자의 복수는 도덕률로부터 자유롭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개인의 됨됨이와는 별개로 이 사회에서 늘 가해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남자가 아무리 피해자 입장에서 복수를 그린다 하더라도, 남자가 그리는 복수는 가해자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리는 순간에는 주저함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가해자와 잡은 손을 끝내 놓지 못할 테니까.
오로라 공주의 복수극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지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통쾌함이 아니라 우울함과 절망감 때문이었다.
오로라 공주는 어쨌든 복수를 완성했지만, 혹은 완성 직전까지 갔지만, 이 세상은 지금도 제2, 제3의 오로라 공주를 만들고 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오로라 공주
여자들은 언제나 복수를 꿈꾼다
모든 여자들의 대리살인극
세상에, 이렇게 앞뒤 들어맞게 명쾌한 살인극을 본 적이 있던가?
평소 어울리지 않게도 피칠갑 영화는 눈뜨고 보지 못하는 필자건만, 의 연쇄 피칠갑 살인행각을 보는 2시간 내내, 통쾌했다.
삼지창으로 찔러 죽이고 석고로 질식시켜 죽이고 독극물로 죽이고 가위로 페니스를 싹둑 잘라 죽이고 차를 전복시켜 죽이고 면도날로 동맥을 끊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오로라 공주 스티커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피칠갑에 대한 역겨움은 기다림으로, 카타르시스로 변해갔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어찌 보면 단 하나,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정도로 싸가지 없는 인생이 어디 피살자들뿐이겠냐 싶어, 오로라 공주의 응징은 실정법상(!) 너무 과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로라 공주에게는 법도, 과학수사를 입에 달고 다니는 국가권력도,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종교도, 끝내 해결해주지 못하는 억울함이 있다.
어린아이를 인간이기보다 하나의 소유물쯤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하는 아동폭력과, 타인의 안녕이 나의 데이트에 비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무관심과, 여자가 첫 손님이면 재수 없는 관습과, 같은 접촉사고를 내도 ‘아줌마’가 사고를 내면 쌍시옷 가득한 육두문자부터 나가는 미풍양속(!)과, 돈이면 정의도 사고파는 자본주의의 도덕률과…, 또 뭐가 있었더라?
이렇게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혹은 겪는지 인식하지도 못하고 지나치는 일상의 억울함들이 자로 잰 듯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면서 여섯 살배기 여자아이의 비참한 최후를 이끌어냈고, 중키에 눈이 크고 착하게 생긴(!) 한 여자를 연쇄살인마로 만들었다.
오로라 공주가 겪은 억울함은 내가, 이 사회가 생명과 사람(남녀 모두를 포함한) 중심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억울함이다. 단지 그 억울함이 연쇄살인을 감행할 용기와 광기를 불러일으킬 만큼 아귀가 맞아주지 않았을 뿐이다. 나 역시 마음으로는 언제나 복수를 꿈꾼다.
지금까지 영화사에 수많은 복수극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가까운 예로는 그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이 있다.
그러나 똑똑한 여배우에서 감독으로 새로운 명함을 내민 방은진이라는 여자가 만든 복수는 이전에 만들어진 복수보다 명쾌하고 거침없고 철저하다. 여자의 복수는 도덕률로부터 자유롭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개인의 됨됨이와는 별개로 이 사회에서 늘 가해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남자가 아무리 피해자 입장에서 복수를 그린다 하더라도, 남자가 그리는 복수는 가해자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리는 순간에는 주저함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가해자와 잡은 손을 끝내 놓지 못할 테니까.
오로라 공주의 복수극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지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통쾌함이 아니라 우울함과 절망감 때문이었다.
오로라 공주는 어쨌든 복수를 완성했지만, 혹은 완성 직전까지 갔지만, 이 세상은 지금도 제2, 제3의 오로라 공주를 만들고 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도 일상의 억울함과 직면하며, 복수를 꿈꾼다.
/월간「평화와 참여」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