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의 기원...

김용200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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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국사책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을 알리면서......//

 

 

 일본사관련해 '무사' 관련 부분을 발췌하겠습니다....

 

 

 

 

 

 -무사의 출발은 무장한 지주그룹

 

 무사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9세기경이다.  743년의 간전 영년 사재법으로 율령제도가 붕괴하고 전국에 장원이 난립하기 시작하면서

 

 개발 영주는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무장 그룹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무사단의 출발이다.

 

 이윽고 무사단은 지방의 사성 황족과 귀족을 지도자로 받들어 대규모 무사단을 형성한다. 그리고 경쟁과 도태가 계속된 결과

 

 간무헤이시와 세이와겐지가 남았다.

 

 9세기 후반 무사는 점차 귀족의 신변 경호에도 쓰이기 시작하며 무사는 귀족 주위에서

 

 '사부라우(대기하다라는 뜻의 일본어' 존재라는 뜻에서 '사무라이' 라 불렸다.

 

 

 

 % 간전 영년 사재법과 장원 에 대한 설명

 

 - 이전 세기까지 일본의 토지는 국가의 소유였다.  토지를 분배하여 조세를 받았다. 하지만

 

    이를 매우 가혹한 세법이라 토지를 버리고 유랑/도망하는자가 속출하여 토지는 황폐해지고 국세도 줄어갔다

 

  그래서 삼세일신이라는 법을 발령...-> 황폐해진 토지를 개간한자는 평생 또는 3대에게 사유를 인정한다라는 법률

 

   하지만 국가의 접수기간이 다가오면 경작을 포기 했다.

 

 그래서 나온것이 간전영년사재법... 개간한 토지는 본인 소유.....로 공인하였으며 이러한 토지를 장원이라 한다.

 

 

  -강력한 '친위대'를 가진 시라카와 상황

 

 원정의 중추기관은 '원청' 이다. 원청은 상황의 거처인 원 에 설치된 사적 기관이지만 여기서 나오는 명령인 원선은 절대적인

 

 효력이 있어 조정은 거스릴수가 없었다. 상황의 힘이 이토록 강력해진 데에는 직속 무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북면의 무사'(원의 북쪽에 두거 경비를 맡겼다) 라 하여 무예의 달인을 모아 만든 친위대이다.

 

 당시 무사의 활약은 귀족에게 놀라운 일이였다. 당시 귀족은 예외없이 불교신자 였다.

 

 그래서 승병이 무리한 요구를 거듭하여도 부처의 벌이 두려워 손을 쓸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승병들을 살해하는 매우 용감하고 믿을수 있는 존재였다.

 

 즉 상황에게 직속 무사가 있다는 사실이 원청의 권위를 증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원정은 시라카와, 도바 , 고시라카와  상황의 3대 100년에 걸쳐 계속된다.

 

 그후 무사를 지나치게 중용한 결과 점점 강력해진 그들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된다.

 

 

  %제맘대로 용어 설명.

 

 원정-> 천황의 친아버지(상황) 또는 친 할아버지(법황)가 실권을 장악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정치형태

 

 1086년 원정의 시작...

 

 

-상황과 천황의 다툼이 원인이 된 호겐의 난은 무사의 힘을 세상에 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 줄여서 써볼라고 했는데 이게 워낙 복잡한 일이라...그대로 발췌할께요!!!!!

 

 1156년 스토쿠 상황과 고시라카의 천황의 아집이 무력 투쟁으로 발전했다. ' 호겐의 난' 이다.

 

 그 원인은 좀 복잡하다

 

 도바 상황의 큰아들 스토쿠 천황은 돌연 아버지로부터 동생인 다이닌 친왕(고노에 천황)에게 양위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때 스토쿠 천황은 자신의 아들 사케히토 친왕을 고노에 다음의 천왕으로 삼는다고 약속을 받고 퇴위하였다.

 

 그러나 고노에 천황 사후 도바 상황은 약속을 깨고 마사히토 친왕(스토쿠 천황의 동생,뒤의 고시라카의 천황)을 옹립하고 더구나

 

 황태자도  마사히토 친왕의 아들로 세웠다.

 

 스토쿠 천황은 원한을 품었다. 도바 상황이 스토쿠 천황을 냉대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도바 상황은 스토쿠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여겼던 것이다. 자신의 부인과  조부인 시라카와 법황이 간통하여 태어났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무엇보다 스토쿠를 천황으로 삼은것도 시라카와 법황이지 도바 상황은 원치 않은 일이였다. 그러나 억지로 양위를 시킨 것은

 

 실패였다. 그 결과 대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156년 도바 법황이 세상을 떠났다.

 

 이를 기회로 스토쿠 파와 고시라카와 파의 주도권 다툼은 일시에 격화하여 서리 자기편의 무사를 모았다.

 

 이제까지 무사가 조정의 명령으로 승병을 토벌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처럼 조정의 내분 해결에 직접 관여한것은 처음이었다.

 

 정쟁이 더이상 귀족끼리 해결되지 못하고 무사의 힘을 빌려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결국 고시라카와 천황파의 야습으로 스토쿠 파는 패배하였다.

 

 전쟁의 처리는 매우 엄격하여 200년만에 처음으로 사형이 부활해 주모자급의 무사는 처형되었다.

 

 이 싸움으로 무사는 자신들이 정권을 좌우할 힘을 가졌다는것을 깨다랐으며

 

 타이라씨 정권의 탄생이 가능해졌다.

 

 조그마한 불륜 소동이 결국은 귀족 사회의 붕괴를 낳은것이다.

 

 

 

 ->>> 시대의 주역은 공가에서 무사로... 

 

 이전 시대의 주인공이 공가나 귀족이라면 중세의 주역은 무사이다.

 

 이제까지 공가의 변견으로 살아온 무사는 드디어 자신이 가지고있는 무력이라는 강대한 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힘을가진 자신들이 왜 공가가 하라는대로 하지않으면 안될까...이러한 단순한 의문과 불만으로 무사들의 반항이 시작된것이다.

 

 12세기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창건한것이 본격적인 무가정권의 시작이다.

 

 한때 공가정권인 겐무 정권이 부활했지만 곧 붕괴하고 무라마치  바구후와 전국시대 를 거쳐 에도 바쿠후로 이어져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기 까지, 약 700년에 걸쳐 무사가 일본 정계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