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南京)대학살 70주년(2007년 12월 13일)을 앞두고 중·일, 미·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1월까지 일본군이 난징에서 중국인 30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희생자 중에는 중국군 포로도 일부 포함돼 있으나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중국은 현재 2만5000여평 규모의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내년 12월 7만여평 규모로 확대 개관할 계획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해 현재 증축 공사를 벌이고 있으며 기념관 주변에 평화공원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중국 측의 의도는 일제의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중국은 이밖에 난징대학살 70주년이 되는 내년에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은 당시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학살인원이 수만 명 수준이라고 축소 주장해 중·일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일본 우익은 한술 더 떠 난징대학살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중국인을 격분케 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관계자는 “난징대학살 30만명의 희생자는 전쟁 후 극동군사재판에서 인정한 것”이라며 “당시 시체를 묻은 사람, 생존자, 외국인 증인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사건의 전모가 생생히 드러나고 희생자 수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중국과 대만이 같이 만든 영화 '난징 1937'중·일 간의 대치 국면에 미국도 가세했다. 난징대학살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해 내년 12월 개봉할 예정이다. 지난 7월에 크랭크인한 이 영화는 당시 난징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의 눈을 통해 일본군이 중국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리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그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열연했던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다. 또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사제지간으로 등장했던 장쯔이와 양쯔충이 이 영화에서는 모녀지간으로 출연할 계획이다. 이 영화에는 영국 정부도 200만달러를 무상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70년이 다 돼 가는 해묵은 이 사건이 새삼스레 국제적인 핫이슈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일본군의 만행(蠻行) 자체가 워낙 잔혹했던 데다 가해자인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기는커녕 사건을 축소·은폐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중국의 국력이 커지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도 사건을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우선 사건의 진상은 어떠했는가? 흔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할 때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이라는 말이 상투어로 붙어다닌다. 난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은 불과 한 달 보름 남짓한 짧은 기간에 30만명이라는 인명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 강간, 고문했다는 점에서 흔히 전쟁 중 있을 수 있는 군인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사건은 20세기 발생한 어떤 집단학살 사건과도 비교가 안된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일반 군대가 아니라 ‘악마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파죽지세로 중국 땅을 유린하던 일본군은 11월 난징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12월, 일본 화중군(華中軍)사령관 마쓰이 이시네(松井石根)가 난징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 최고사령부는 비행기로 난징 곳곳에 투항권고서를 뿌렸다. 12월 10일 오전 11시40분, 난징시 중산문(中山門)에 일본군 승용차가 도착, 화중군단 참모장 무토(武藤) 등 4명의 일본 군관이 내렸다. 그들은 중국군 관계자들이 백기를 들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시 정각이 돼도 중국군 관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지나자 무토 부참모장은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가면서 코웃음을 쳤다. “흥! 가소로운 놈들, 자비로운 은혜를 거절하다니. 일찍이 역사에 없는 피의 장강을 보게 해주마!” 사흘 뒤에 벌어질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예고하는 발언이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생매장하고 있다. 난징을 지키던 중국군이 투항을 거절하자 드디어 일본군은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13일 오전 0시10분, 일본군 제6사단의 선봉 부대가 난징 19개 성문 중 제일 견고한 중화문(中華門)을 점거하고, 이어 오카모토(岡本)부대가 성 안으로 진격했다. 당시 중국의 수도이던 난징은 이날 이렇게 무너졌다. 12월 13일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1808년 나폴레옹에게 함락된 날이며,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동진정책을 펴온 제정 러시아가 1898년 중국의 뤼순(旅順)항을 점령한 날이기도 했다. 이후 난징에서는 20세기 최대의 참극이 벌어진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천인공노(天人共怒) 등 그 어떤 말로도 난징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일본은 중·일전쟁 개전 후 가는 곳마다 학살과 강간 등을 자행했지만 특히 난징에서 대학살을 감행한 배경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본 지도층은 전쟁이 장기화될지 모른다는 초조감을 느꼈고 병사들은 점차 전쟁에 지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에 저항하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모든 중국인에게 알려줄 희생양이 필요했고,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이 그 대상으로 선택됐던 것이다.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기 전에 치밀한 사전학살계획을 세웠다. 마쓰이 화중군사령관은 “난징은 중국의 수도로 난징을 점령한 것은 국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필히 상세한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김으로써 일본군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서 난징 13곳에서 거의 동시에 학살이 저질러졌다.
백기를 든 중국군 포로는 물론이고 젊은 남성은 마치 가축처럼 묶여 도시 외곽으로 끌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또 목베기 시합이나 총검술 훈련의 연습물이 됐으며 가솔린 세례를 받은 후 산 채로 태워지기도 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산 채로 파묻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 건 예사였다. 한 생존자는 “마치 하늘에서 비 아닌 피가 쏟아져 내린 듯했다”며 몸서리를 쳤다.
당시 종군기자인 오마타 유키오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넣어야 했다.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학살했으며, 100명 먼저 죽이기 시합도 벌였다. 미국 새너제이 머큐리지는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항저우(杭州)의 ?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t”이라며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난징대학살의 현장. 난징대학살에 참가했던 일본 군인의 일기가 전후에 우연히 발견됐다. 이 일기는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없는 중국인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고 적혀 있다.
난징대학살에서 잔혹한 수법의 살인 외에 세계의 지탄을 받은 것으로 강간(强姦)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수의 강간이 이뤄졌다. 난징대학살은 역사상 최대 집단강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이란 책을 쓴 여성운동가 수전 브라운밀러는 “난징대학살 동안 일어난 강간은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강간”이라고 지적했다. 일본군은 중국 여성을 강간한 후에는 강간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서 대부분의 여성을 살해했다.
‘선간후살(先姦後殺·먼저 강간하고 나중에 죽임)’이 당시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수법이었다. 난징의 거리 곳곳에는 하의가 벗겨진 상태에서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강간한 후 살해한 중국 여성의 성기에 병이나 나무막대를 꽂아놓기 일쑤였다. 일본 종군 사진기자 고노 고키(河野公輝)는 “상하이(上海)에서 쿤산(昆山)까지 도처에서 여자 음부에 대나무 작대기를 쑤셔 넣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 집회. 일본군은 난징의 거의 모든 여성을 철저하게 능욕했다. 농부의 아내, 학생, 교사, 전문직 여성과 노동자, YMCA 직원의 아내, 대학 교수, 비구니에 이르기까지 강간을 당했고, 많은 경우 여러 명의
▲ 도서출판 팔복원이 펴낸 난징대학살 관련 서적.일본군의 만행은 난징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중국 땅 어디에서든 계속됐다. 말 그대로 그들은 피와 색욕에 굶주린 아귀였다.
일본군의 만행은 목숨을 건 의인(義人)들에 의해서 외부에 폭로됐다. 당시 특명 사령부의 긴급 지시에 따라 모든 외국인에게 촬영 금지령이 내려졌다. 물론 이미 촬영된 모든 사진은 압수됐다. 그러나 난징성공회의 존 마기 목사는 일본 사령부의 지시를 어기고 필사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16밀리 무비 카메라에 수록했다.
그는 난징대학살을 두고 “단테의 신곡(神曲)에 묘사된 연옥이 난징시가 함락당한 그 날의 모습이며, 침략자 일본군은 피에 굶주린 지옥의 아수라 떼였다”고 증언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촬영한 ‘난징대학살’의 기록 필름은 55년이 지난 1991년 7월, 아이러니컬하게도 가해자였던 일본의 NHK TV에 의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이밖에 중국인들이 목숨 걸고 사진을 찍어 외부에 폭로했고 일본인들이 기념삼아 찍은 사진이 2차 세계대전 후 전범재판 법정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중국의 작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린위탕(林語堂)은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져 내려오는 어린아이를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을 가리운 포로가 참호 옆에서 총검술 등과 같은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본은 전후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인하려고 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일본인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중국인이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말해 중국인은 물론 전 세계의 공분을 샀다.
난징대학살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공방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우리로서는 난징대학살 당시 중국인이 겪었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전시실에 게시된 중국인의 결의는 우리도 되새겨봄 직하다.
“다시는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 나라가 약해지면 또 다시 치욕을 당할 수밖에 없으니 절대로 과거와 같이 낙후되지 말고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자.”
난징은 어떤 도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역사·문화 도시다. 처음 수도가 된 것은 229년 삼국시대 오나라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게 효시다. 이후 서진과 동진, 송·제·양·진도 모두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명 태조 주원장도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고 1842년에는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이 이곳에서 영국과 조약을 맺었다. 근대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孫文)이 이곳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고, 그의 후계자 장제스(蔣介石) 역시 난징을 수도로 정했다. 총 면적은 6516㎢이고 인구는 530만명이다.
병사로부터 윤간(輪姦)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기간 동안 벌어진 강간의 3분의 1은 대낮에 일어났다. 길 가운데서, 주위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여성을 강간한 일본 병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생존자가 많다.
난징의 어떤 장소도 강간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수녀원,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일본군의 강간은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은 마치 난징의 모든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서 쳐들어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행동했다. 나이 역시 일본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열 살이 채 안 된 어린이부터 80대 노파까지 강간의 대상이었다. 임신 중인 여성과 태아 역시 일본군의 범행 대상이 됐고 이 경우 태아는 엄마와 함께 살해됐다.
중국의 다공일보는 “매일 24시간 내내 끔찍한 일들이 계속됐다. 일본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불쌍한 중국 여성을 언제나 발견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은 가정파괴형 강간을 즐겼다. 한마디로 당시 일본인이 중국인을 사람으로 안 봤다는 명백한 증거다
난징대학살 70주년
난징대학살 70주년
‘난징대학살’ 중국ㆍ일본 갈등에 미국ㆍ영국도 가세
중국, “일본군이 30만명 무자비하게 학살”
20세기 최대의 참극 알리기 위해 기념관 건립
미국에선 내년 12월 개봉 예정인 영화 제작 중, 영국도 제작 비용 200만달러 지원해
난징(南京)대학살 70주년(2007년 12월 13일)을 앞두고 중·일, 미·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1월까지 일본군이 난징에서 중국인 30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희생자 중에는 중국군 포로도 일부 포함돼 있으나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중국과 대만이 같이 만든 영화 '난징 1937'중·일 간의 대치 국면에 미국도 가세했다. 난징대학살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해 내년 12월 개봉할 예정이다. 지난 7월에 크랭크인한 이 영화는 당시 난징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의 눈을 통해 일본군이 중국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그리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그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열연했던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다. 또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사제지간으로 등장했던 장쯔이와 양쯔충이 이 영화에서는 모녀지간으로 출연할 계획이다. 이 영화에는 영국 정부도 200만달러를 무상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생매장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2만5000여평 규모의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내년 12월 7만여평 규모로 확대 개관할 계획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해 현재 증축 공사를 벌이고 있으며 기념관 주변에 평화공원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중국 측의 의도는 일제의 반인륜적 전쟁범죄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중국은 이밖에 난징대학살 70주년이 되는 내년에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은 당시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학살인원이 수만 명 수준이라고 축소 주장해 중·일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일본 우익은 한술 더 떠 난징대학살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중국인을 격분케 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관계자는 “난징대학살 30만명의 희생자는 전쟁 후 극동군사재판에서 인정한 것”이라며 “당시 시체를 묻은 사람, 생존자, 외국인 증인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사건의 전모가 생생히 드러나고 희생자 수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70년이 다 돼 가는 해묵은 이 사건이 새삼스레 국제적인 핫이슈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일본군의 만행(蠻行) 자체가 워낙 잔혹했던 데다 가해자인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기는커녕 사건을 축소·은폐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중국의 국력이 커지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도 사건을 재조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우선 사건의 진상은 어떠했는가?
흔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할 때 ‘살인, 방화, 약탈, 강간’이라는 말이 상투어로 붙어다닌다. 난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은 불과 한 달 보름 남짓한 짧은 기간에 30만명이라는 인명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 강간, 고문했다는 점에서 흔히 전쟁 중 있을 수 있는 군인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사건은 20세기 발생한 어떤 집단학살 사건과도 비교가 안된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일반 군대가 아니라 ‘악마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파죽지세로 중국 땅을 유린하던 일본군은 11월 난징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12월, 일본 화중군(華中軍)사령관 마쓰이 이시네(松井石根)가 난징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 최고사령부는 비행기로 난징 곳곳에 투항권고서를 뿌렸다. 12월 10일 오전 11시40분, 난징시 중산문(中山門)에 일본군 승용차가 도착, 화중군단 참모장 무토(武藤) 등 4명의 일본 군관이 내렸다. 그들은 중국군 관계자들이 백기를 들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시 정각이 돼도 중국군 관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지나자 무토 부참모장은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가면서 코웃음을 쳤다. “흥! 가소로운 놈들, 자비로운 은혜를 거절하다니. 일찍이 역사에 없는 피의 장강을 보게 해주마!” 사흘 뒤에 벌어질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예고하는 발언이었다.
난징을 지키던 중국군이 투항을 거절하자 드디어 일본군은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13일 오전 0시10분, 일본군 제6사단의 선봉 부대가 난징 19개 성문 중 제일 견고한 중화문(中華門)을 점거하고, 이어 오카모토(岡本)부대가 성 안으로 진격했다. 당시 중국의 수도이던 난징은 이날 이렇게 무너졌다. 12월 13일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1808년 나폴레옹에게 함락된 날이며,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동진정책을 펴온 제정 러시아가 1898년 중국의 뤼순(旅順)항을 점령한 날이기도 했다. 이후 난징에서는 20세기 최대의 참극이 벌어진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천인공노(天人共怒) 등 그 어떤 말로도 난징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일본은 중·일전쟁 개전 후 가는 곳마다 학살과 강간 등을 자행했지만 특히 난징에서 대학살을 감행한 배경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본 지도층은 전쟁이 장기화될지 모른다는 초조감을 느꼈고 병사들은 점차 전쟁에 지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에 저항하면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모든 중국인에게 알려줄 희생양이 필요했고,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이 그 대상으로 선택됐던 것이다.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기 전에 치밀한 사전학살계획을 세웠다. 마쓰이 화중군사령관은 “난징은 중국의 수도로 난징을 점령한 것은 국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필히 상세한 계획을 세워 행동에 옮김으로써 일본군의 위상을 높이고 중국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서 난징 13곳에서 거의 동시에 학살이 저질러졌다.
백기를 든 중국군 포로는 물론이고 젊은 남성은 마치 가축처럼 묶여 도시 외곽으로 끌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또 목베기 시합이나 총검술 훈련의 연습물이 됐으며 가솔린 세례를 받은 후 산 채로 태워지기도 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산 채로 파묻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 건 예사였다. 한 생존자는 “마치 하늘에서 비 아닌 피가 쏟아져 내린 듯했다”며 몸서리를 쳤다.
난징대학살의 현장.
▲ 중국 난징에서 열린 난징대학살 희생자 추모 집회.
당시 종군기자인 오마타 유키오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넣어야 했다.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학살했으며, 100명 먼저 죽이기 시합도 벌였다. 미국 새너제이 머큐리지는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항저우(杭州)의 ?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t”이라며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난징대학살에 참가했던 일본 군인의 일기가 전후에 우연히 발견됐다. 이 일기는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없는 중국인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고 적혀 있다.
난징대학살에서 잔혹한 수법의 살인 외에 세계의 지탄을 받은 것으로 강간(强姦)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수의 강간이 이뤄졌다. 난징대학살은 역사상 최대 집단강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의지에 반하여: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이란 책을 쓴 여성운동가 수전 브라운밀러는 “난징대학살 동안 일어난 강간은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강간”이라고 지적했다. 일본군은 중국 여성을 강간한 후에는 강간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서 대부분의 여성을 살해했다.
‘선간후살(先姦後殺·먼저 강간하고 나중에 죽임)’이 당시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수법이었다. 난징의 거리 곳곳에는 하의가 벗겨진 상태에서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강간한 후 살해한 중국 여성의 성기에 병이나 나무막대를 꽂아놓기 일쑤였다. 일본 종군 사진기자 고노 고키(河野公輝)는 “상하이(上海)에서 쿤산(昆山)까지 도처에서 여자 음부에 대나무 작대기를 쑤셔 넣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군은 난징의 거의 모든 여성을 철저하게 능욕했다. 농부의 아내, 학생, 교사, 전문직 여성과 노동자, YMCA 직원의 아내, 대학 교수, 비구니에 이르기까지 강간을 당했고, 많은 경우 여러 명의
▲ 도서출판 팔복원이 펴낸 난징대학살 관련 서적.일본군의 만행은 난징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중국 땅 어디에서든 계속됐다. 말 그대로 그들은 피와 색욕에 굶주린 아귀였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역사·문화 도시다. 처음 수도가 된 것은 229년 삼국시대 오나라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게 효시다. 이후 서진과 동진, 송·제·양·진도 모두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병사로부터 윤간(輪姦)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기간 동안 벌어진 강간의 3분의 1은 대낮에 일어났다. 길 가운데서, 주위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여성을 강간한 일본 병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생존자가 많다.일본군의 만행은 목숨을 건 의인(義人)들에 의해서 외부에 폭로됐다. 당시 특명 사령부의 긴급 지시에 따라 모든 외국인에게 촬영 금지령이 내려졌다. 물론 이미 촬영된 모든 사진은 압수됐다. 그러나 난징성공회의 존 마기 목사는 일본 사령부의 지시를 어기고 필사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16밀리 무비 카메라에 수록했다.
그는 난징대학살을 두고 “단테의 신곡(神曲)에 묘사된 연옥이 난징시가 함락당한 그 날의 모습이며, 침략자 일본군은 피에 굶주린 지옥의 아수라 떼였다”고 증언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촬영한 ‘난징대학살’의 기록 필름은 55년이 지난 1991년 7월, 아이러니컬하게도 가해자였던 일본의 NHK TV에 의해 전 세계에 공개됐다. 이밖에 중국인들이 목숨 걸고 사진을 찍어 외부에 폭로했고 일본인들이 기념삼아 찍은 사진이 2차 세계대전 후 전범재판 법정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중국의 작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린위탕(林語堂)은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져 내려오는 어린아이를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을 가리운 포로가 참호 옆에서 총검술 등과 같은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본은 전후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인하려고 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일본인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중국인이 꾸며낸 거짓말”이라고 말해 중국인은 물론 전 세계의 공분을 샀다.
난징대학살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공방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우리로서는 난징대학살 당시 중국인이 겪었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징대학살 기념관 전시실에 게시된 중국인의 결의는 우리도 되새겨봄 직하다.
“다시는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 나라가 약해지면 또 다시 치욕을 당할 수밖에 없으니 절대로 과거와 같이 낙후되지 말고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자.”
난징은 어떤 도시?
명 태조 주원장도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고 1842년에는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이 이곳에서 영국과 조약을 맺었다. 근대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孫文)이 이곳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세웠고, 그의 후계자 장제스(蔣介石) 역시 난징을 수도로 정했다. 총 면적은 6516㎢이고 인구는 530만명이다.
박영철 주간조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난징의 어떤 장소도 강간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수녀원,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일본군의 강간은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은 마치 난징의 모든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서 쳐들어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행동했다. 나이 역시 일본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열 살이 채 안 된 어린이부터 80대 노파까지 강간의 대상이었다. 임신 중인 여성과 태아 역시 일본군의 범행 대상이 됐고 이 경우 태아는 엄마와 함께 살해됐다.
중국의 다공일보는 “매일 24시간 내내 끔찍한 일들이 계속됐다. 일본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불쌍한 중국 여성을 언제나 발견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은 가정파괴형 강간을 즐겼다. 한마디로 당시 일본인이 중국인을 사람으로 안 봤다는 명백한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