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ango Reinhardt

이준희200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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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ango Reinhardt

재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모드 스케일이나, 텐션 코드톤의 따듯함, 블루지한 멜로디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이는 예술에 접근하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결과물의 일부일 것이고, 이보다 더욱 사람들을 재즈로 접근하게 하는 만유인력과도 같은 힘의 근원은 음악의 자유성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노래하고, 인생을 연주하며, 철학을 담아낼 수 있는 자유의 음악- 재즈의 즉흥연주만의 부분은 아니고- 이라는 것이 이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의 변질되고 양 극단으로 이끌려가는 모순된 사회의 데카당스를 치유해내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예술의 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무미건조한 색채 앞에서 나의, 너의, 우리 모두의 공허한 마음을 음악이란 이름의 장작불로 따듯하게 데워주는, 데워주는 듯 하면서 다시금 차가움을 불어넣는 악기가 있다. 바로 여섯 줄의 현으로 구성된 ‘기타’라는 악기가 이런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흐르는 듯 한 적막한 공기를 꽈악 잡아놓고 풀리지 않는 신비의 요술을 걸어 사람들을 센티멘털하게 만들어버리는 매력적인 악기. 하지만 재즈에서 기타의 폭은 넓지 않다. 재즈의 탄생시기에는 레스 폴이 존재하기 전의 드라이브 걸린 증폭적인 사운드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관악기의 커다란 소리에 묻혀 뒷전에 있거나, 그마저도 밴조에 자리를 내주고 마는 실정이었다.


 이런 재즈에서는 약간은 문외시하였던 기타 연주자의 계보를 연결하고 이후 수많은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천·탈 팔로우·짐 홀·조 패스·웨스 몽고메리·팻 메스니·마크 휘트필드·커트 로젠윙클-에게 영향을 주었던 연주자는 바로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 1910. 1. 23~1953. 5. 16)였다.


 장고 라인하르트는 1910년 1월 23일 벨기에의 리베르치즈(프랑스 국경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집시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어머니는 가수 겸 댄서였다. 정처 없이 유럽을 떠돌던 중 12살 때 어머니에게 밴조를 선물 받아 현악기를 익히게 되었다. 집시 무리를 떠나 프랑스로 가서 파리의 뮤지션과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음악세계는 크게 변하였다. 장고 라인하르트가 18세가 되던 해,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해 집시 무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이 씨앗이 되고만다. 1928년에 야외텐트에 화재가 발생해 다리와 왼손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된다. 왼손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에 심한 부상을 입어 기타를 연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에게 그의 동생 조셉이 기타를 선물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6개월간의 혼신의 연습으로 재활한다. 이후부터 장고 라인하르트는 핑거링시 두 손가락을 질질 끌며 지판일 이동하는 특이한 모션으로 기타리스트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그에게 재즈의 전설로 남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 -프랑스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와의 만남이 그의 행로를 뒤바꾸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9년 거리를 떠돌던 19세의 장고 라인하르트는 두 살 위의 스테판 그라펠리와 조우하면서 재즈에 개안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33년 클라리제 호텔에서 루이 볼라 오케스트라 연주 사이에 장고 라인하르트의 동생 조셉 라인하르트와 함께 간간이 잼 세션을 벌이며 서로의 의지가 되었다. 평론가들의 호평에 고무받아 이들은 1934년 핫 클럽에서 공식적인 캄보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 그룹이 ‘유럽 재즈의 효시’라고 칭해지는 핫 클럽 퀸텟(Quintette Du Hot Club De France. 이하 QHCF)이다. 세 대의 기타, 한 대의 베이스, 바이올린으로 클래식 현악 트리오를 변형시킨 독특한 양식의 QHCF의 인기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미국으로까지 넓게 번졌다. 1930년대 유럽 전역을 재즈 열풍으로 몰아넣은 QHCF와 장고 라인하르트는 수많은 히트작을 양산해냈다.(http://blog.naver.com/ivydrew, 굿인터내셔널의 장고라인하르트에 대한 전기적 배경을 인용함을 밝힌다.)


 당시의 장고 라인하르트의 기타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기존의 재즈와는 차별화된 사운드에 귀를 먼저 기울일 수 있다. 빅 밴드와, 관악기의 위주로된 캄보가 주류였던 시대에, 약간은 클래식컬한 실내악적인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사운드가 흥겨움과 현악기의 세련됨을 스윙의 맛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맑은 기타소리와 그의 집시적인 느낌을 가득 닮은 낙천적이며 활발한 연주에 넋을 빼앗기기도 전에, 그의 신비스러운 마술과도 같은 두 손가락만으로 코드를 옮기는 신기의 테크닉에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1943년, 유럽에 제2차대전의 폭풍이 몰아치면서 스테판 그라펠리는 영국으로 떠나고, 장고 라인하르트는 그 공백을 클라리넷 주자 허버트 로스타잉을 영입하여  QHCF를 지켰다. 전쟁이 끝나고 스테판 그라펠리는 장고 라인하르트 곁을 찾아왔고, 1946년 장고 라인하르트는 듀크 엘링턴의 부름을 받아 난생 처음 미국 땅을 밟게 된다. 재즈의 본고장 미국에서  찰리 크리스천과 프레디 그린, 그리고 팝 기타리스트 레스 폴이 주도한 앰프에 의해 증폭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흡입하기도 한다. 미국 여행을 마친 뒤, 장고 라인하르트는 새로운 사운드, 보다 진보된 주법을 개설하고, 스테판 그라펠리와 함께 더욱 분방한 레코딩 작업을 쌓아 갔다.


 그의 기념적인 1949년의 앨범 ‘Djangology’는 이탈리아 재즈 팬의 제안으로 녹음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의 소설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앨범 ‘Djangology’는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녹음한 것이 아니라, 장고와 그라펠리가 1949년에 로마의 한 나이트 클럽에 출연할 당시, 어떤 이탈리아인 재즈 팬이 개인적으로 세션 자리를 마련하여 거기에서 녹음한 것이다. 그래서 음질은 그다지 칭찬 받을만한 것이 못 되지만, 그런 부정적인 요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피커 저편에서 당시 유럽 땅에 깔려 있었던 공기 같은 것이 직접 연결되어 온 방을 가득 채운다. 이 박진감은 음의 좋고 나쁨과는 무관하다고 할까, 점차 “이 음악에는 이 정도의 음질이 마침 적당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라면? 이에 덧붙여 표현하기를, 라인하르트는 그 밖에도 탁월한 연주를 많이 남겼지만, “장골로지”에서 장고와 그라펠 리가 보여준 물 한 방울 새지 않을 긴밀성과 적당히 남겨둔 컬래버레이션은 언제 들어도 황홀감에 젖기에 충분하다.(무라카미 하루키 재즈에세이, 장고 라인하르트 편중에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언제나 병고로 고생해야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낚시를 하곤 했었는데 1953년 어느 날 낚시를 하던 도중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사인은 폐결핵, 예정되었던 대대적인 미국 투어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집시적인 자유로움으로 가득했었는데, 갑작스럽게 호텔방에서 사라져 집시들 무리로 가서 며칠을 묵는가 하면, 기분이 좋으면 돈을 받지 않고 기타를 연주했으며, 몇 주일동안 번 돈을 단 하루의 도박으로 모두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의 사후 모던 재즈 쿼텟의 피아니스트 존 루이스는 장고 라인하르트에게 바치는  ‘Django’를 작곡하였다. 후에 유럽 재즈의 권위있는 상인, ‘장고 라인하르트상’을 통해 미셸 페트루시아니가 발굴되었고, 로젠베르크 트리오·필립 캐더린·비렐리 라그렌·크리스천 에스코우드 등은 ‘Djangology’의 현재적 계승자들이다. (굿 인터내셔널 인용)


 종종 박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프레이징을 선보였으며 옥타브를 뛰어넘는 멜로디 연주를 선보였고, ‘터미널 비브라토’라는 고유의 비브라토법을 개발해 내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장고 라인하르트를 기억하기를,


장고는 재즈음악 세계에서는 듀크 엘링턴 이후에 최고의 흥미로운 뮤지션이다. 그리고 그는 작곡가만큼의 편곡자이기도 하다.

-CONSTANT LAMBERT(작곡가, 지휘자, 음악이론가)-


장고는 나에게 첫 번째 영감을 준 사람이다. 나는 한 번도 그의 연주처럼 매끄럽고 현대적인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의 연주방식이나 방법은 내가 원하던 연주방법과 일치했다. -JOE PASS-


미국인인 EDDIE LANG은 최고였다, 하지만 프랑스인인 장고는 모든 면에서 그를 능가하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JAMES JONES ..From Here To Eternity-


그리고 그는 들어오고 벌써 웃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매력적 이였지 ! 그는 하얀 치아와 멋진 검은 수염과 함께 공연장의 관객을 향해 근사한 웃음을 던졌다.

그는 여기에 한 부분을 연주하려 왔다. 그리고 그가 줄수 있는 최고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FUD CANDRIX-


한 마리의 온순한 맹수 같은 존재인 장고가 죽었다. 그는 우리가 꿈꾸는 삶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

-JEAN COCTEAU-


실내악 음악처럼 세 개의 기타, 하나의 바이올린과 베이스가 함께 연주한 재즈는 완전 새로운 것이었다. 장고의 연주기법 : 완전한 필하모닉 사운드

-STEPHANE GRAPPELLI-


장고는 우리 음악인들에게는 여기 20세기에 불쑥 나타난 희귀한 진주, 특별한 불사조 같은 존재이다. -ANDRE EKYAN-


즉흥연주는 장고에게 여러 프레이즈를 병렬시키는 것만 있지는 않다. 형식을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반대하여, 역동적인 움직임과 즉흥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CHARLES DELAUNAY-


그라펠리가 장고와 조제프는 집시라고 말했다. 장고는 아주 어린 나이에 왼손을 다치는 사고를 겪었고, 3개의 손가락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한손으로 열개의 손가락이 연주하는 것 처럼 연주했다. -BILL COLEMAN-


쟝고는 그의 기타로 간단한 튜닝 소리를 들을때도 완벽한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보여준다. -HUBERT ROSTA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