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 글을 꼭 쓰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세종대왕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에 이런 글을 적어봅니다.글이 길고 두서가 없지만 분명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4대왕 세종은 피의 혁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체계를 잡은 3대왕 태종의 3째 아들입니다.(잠깐 언급하지만 과거에 학문을 한분들 중에는 조선을 이조라고 부르는 분들이 계십니다.분명 말하지만 이조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회를 깍아내리기 위한 용어입니다.과거의 분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씨조선이라는 식민사관적 용어는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세종때는 과학, 군사, 경제, 지리, 문화 등..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합니다.한글 역시 세종때 창제되어 반포된 우리의 문자입니다.세종 당시엔 우리말은 있으되 우리글이 없었습니다. 말은 지금처럼했으나 그것을 문자로 표현할 수단이 없어 사대부들(양반)은 한자를 차용하여 썼으며, 관에 있던 아전들의 경우이두라는 신라때 원효의 아들 설총이 한자를 차용하여 음과 훈으로 문자를 쓰고있어 일반 백성들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답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은 공자의 사상인 유교(주자학)였습니다. 유교는 여러가지로 말을 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물질적이고 탐욕적이기보다 금욕적이고정신적인 문화를 강조한 사상으로 조선때는 송대의 사상가인 주자의 주자학이 들어왔습니다.그래서 충효사상이나 들어봤을 삼강오륜을 강조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죠.이런 시대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인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요즈음은 예전보단 흔한일이되었지만 당시엔 충격적이었죠) 이 일로 세종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삼강행실도라는 그림책을 만듭니다.이름에서 짐작되겠지만 충효사상을 그림과 간단한 설명으로 해둔 책입니다. 그러나, 간단한 그림한장은 충효사상을 전달하기 힘들었고, 간단한 설명은 한자로 되어있어별 효과가 없었답니다. 그뿐 아니라 관청에 갖힌 범죄자들중에는 글을 몰라실제 자신의 죄보다 더한 처벌을 받기도 하고 심한 경우엔 자신이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글을 몰라 자신의 죄인 것처럼 수긍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여 세종이 가끔 직접죄인들의 죄를 다시 평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이 모든 것은 백성의 천성이 문제가 아닌 글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훈민정음을창제하게 됩니다. 훈민정음.누가 만든지, 언제 창제되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자이며 지금이야 외국학자들로부터 최고의 문자라 찬사도 받았으며 가장 과학적, 진보적 문자라고 인정도 받고 있으며 문맹퇴치에 힘쓴 이를 일년에 한번 세종대왕상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에서 주고 있으며일류가 훗날 한가지 문자만 쓸 수 있을 때 어느 문자를 택하겠느냐라는 세계언어학회의회의에서 한국인 학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자들의 전원동의를 통해 한글이채택되는 영광을 가졌었지만 국내에선 휴일의 기념일로 자격도 갖지 못한 문자입니다. 이런 상황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입니다.당시 한글은 언문, 화장실에서 익히는 글, 3일만에 익힐 수있는 글, 교방문 등으로 불리며찬대접을 받았으며 문화를 독점하던 당시 양반들은 일반 백성들이 글을 익혀 자신들의 문화독점상태의 위치가 손상될까 하여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이라며, 그 근거를 일제시대에 있었던기초적인 교육이 식민지 백성들을 지배하기 쉽다는 것을 언급하곤 합니다.하지만 식민지 교육에서 최초 헌병정치 이후 문화정책을 폈지만 실패함에 따라 민족말살정책을폈던 것을 아실 겁니다. 즉, 그것은 정책의 실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 창제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부제학은 당시 집현전의 실제적 수장을 뜻합니다. 대제학은 명예직이었기 때문에모든 것은 부제학이 주관했다고하며 집현전의 수장이 이런 말을 통해 반대상소를 했습니다."백성들이 글을 알게되면 그것을 통해 문화를 습득하고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그를 통해이를 악용하여 범죄를 저지를까 걱정되며, 이미 문자가 있으므로(한자)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훈민정음때문에 중국의 한자를 쓰지 못해 오랑캐가 되어 버리는 것이 두렵습니다."이것이 바로 당시 문화를 독점하던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강행하게 되고, 신하들은 더욱 거세게 반대합니다.이에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겠다는 세종은 자신들이 아끼던 신하들을하옥하면서까지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됩니다. 당시 훈민정음의 가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르며, 세종이 정치적 타격을 감수하면서까지만들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하나, 위민의 정신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훈민정음을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했다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같이했다.그리고 세종 혼자서 했다는 말이 많은데.. 이는 분명 세종이 그 가족들과 함께 했던 일로집현전 학자들과는 크게 상관없습니다.훈민정음은 창제와 반포로 나뉘는데, 창제는 세종과 그 가족들에 의해 이루어졌고반포와 관련 훈민정음이 실제 사용가능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등..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한 것이 정설입니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시면아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최근 한글에 대해 더 좋은 평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한국이 IT강국의 이유들이나 디자인쪽으로도 한글이 기존에다가 새로운 평가까지 받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외국의 권위있는 언어학자가 한글을 칭하길..한글은 문자의 사치이며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문자를 쓰는 민족이다..가슴찡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런 사치스러운 문자를 쓰는 여러분, 한글이 어떤 목적으로 왜 만들어졌는지..왜 과학적인지 조금은 알아야 되지 않을까요?저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문자를 쓰는 민족이니까요..
세종과 한글
언젠가는 이 글을 꼭 쓰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세종대왕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에 이런 글을 적어봅니다.
글이 길고 두서가 없지만 분명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4대왕 세종은
피의 혁명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키고 체계를 잡은 3대왕 태종의 3째 아들입니다.
(잠깐 언급하지만 과거에 학문을 한분들 중에는 조선을 이조라고 부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분명 말하지만 이조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회를 깍아내리기 위한 용어입니다.
과거의 분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씨조선이라는 식민사관적 용어는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세종때는 과학, 군사, 경제, 지리, 문화 등..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글 역시 세종때 창제되어 반포된 우리의 문자입니다.
세종 당시엔 우리말은 있으되 우리글이 없었습니다. 말은 지금처럼했으나 그것을 문자로
표현할 수단이 없어 사대부들(양반)은 한자를 차용하여 썼으며, 관에 있던 아전들의 경우
이두라는 신라때 원효의 아들 설총이 한자를 차용하여 음과 훈으로 문자를 쓰고
있어 일반 백성들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답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은 공자의 사상인 유교(주자학)였습니다.
유교는 여러가지로 말을 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물질적이고 탐욕적이기보다 금욕적이고
정신적인 문화를 강조한 사상으로 조선때는 송대의 사상가인 주자의 주자학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충효사상이나 들어봤을 삼강오륜을 강조하여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죠.
이런 시대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인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즈음은 예전보단 흔한일이되었지만 당시엔 충격적이었죠)
이 일로 세종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삼강행실도라는 그림책을 만듭니다.
이름에서 짐작되겠지만 충효사상을 그림과 간단한 설명으로 해둔 책입니다.
그러나, 간단한 그림한장은 충효사상을 전달하기 힘들었고, 간단한 설명은 한자로 되어있어
별 효과가 없었답니다. 그뿐 아니라 관청에 갖힌 범죄자들중에는 글을 몰라
실제 자신의 죄보다 더한 처벌을 받기도 하고 심한 경우엔 자신이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을 몰라 자신의 죄인 것처럼 수긍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여 세종이 가끔 직접
죄인들의 죄를 다시 평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백성의 천성이 문제가 아닌 글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됩니다.
훈민정음.
누가 만든지, 언제 창제되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자이며
지금이야 외국학자들로부터 최고의 문자라 찬사도 받았으며
가장 과학적, 진보적 문자라고 인정도 받고 있으며
문맹퇴치에 힘쓴 이를 일년에 한번 세종대왕상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에서 주고 있으며
일류가 훗날 한가지 문자만 쓸 수 있을 때 어느 문자를 택하겠느냐라는 세계언어학회의
회의에서 한국인 학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자들의 전원동의를 통해 한글이
채택되는 영광을 가졌었지만 국내에선 휴일의 기념일로 자격도 갖지 못한 문자입니다.
이런 상황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한글은 언문, 화장실에서 익히는 글, 3일만에 익힐 수있는 글, 교방문 등으로 불리며
찬대접을 받았으며 문화를 독점하던 당시 양반들은 일반 백성들이 글을 익혀 자신들의
문화독점상태의 위치가 손상될까 하여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이라며, 그 근거를 일제시대에 있었던
기초적인 교육이 식민지 백성들을 지배하기 쉽다는 것을 언급하곤 합니다.
하지만 식민지 교육에서 최초 헌병정치 이후 문화정책을 폈지만 실패함에 따라 민족말살정책을
폈던 것을 아실 겁니다. 즉, 그것은 정책의 실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 창제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제학은 당시 집현전의 실제적 수장을 뜻합니다. 대제학은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제학이 주관했다고하며 집현전의 수장이 이런 말을 통해 반대상소를 했습니다.
"백성들이 글을 알게되면 그것을 통해 문화를 습득하고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그를 통해
이를 악용하여 범죄를 저지를까 걱정되며, 이미 문자가 있으므로(한자)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훈민정음때문에 중국의 한자를 쓰지 못해 오랑캐가 되어 버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문화를 독점하던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강행하게 되고, 신하들은 더욱 거세게 반대합니다.
이에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겠다는 세종은 자신들이 아끼던 신하들을
하옥하면서까지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됩니다.
당시 훈민정음의 가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르며, 세종이 정치적 타격을 감수하면서까지
만들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하나, 위민의 정신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훈민정음을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했다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같이했다.
그리고 세종 혼자서 했다는 말이 많은데.. 이는 분명 세종이 그 가족들과 함께 했던 일로
집현전 학자들과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훈민정음은 창제와 반포로 나뉘는데, 창제는 세종과 그 가족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반포와 관련 훈민정음이 실제 사용가능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등..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한 것이 정설입니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시면
아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최근 한글에 대해 더 좋은 평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이 IT강국의 이유들이나 디자인쪽으로도 한글이 기존에다가 새로운 평가까지
받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외국의 권위있는 언어학자가 한글을 칭하길..
한글은 문자의 사치이며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문자를 쓰는 민족이다..
가슴찡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치스러운 문자를 쓰는 여러분, 한글이 어떤 목적으로 왜 만들어졌는지..
왜 과학적인지 조금은 알아야 되지 않을까요?
저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문자를 쓰는 민족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