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이승희2007.05.24
조회51

지난주 토요일 이었다.

원래 금요일 밤에는 퇴근 후 부모님 집으로 오는게 나의 일상인데, 지난주 금요일 저녁때 강남 지역에서 저녁 약속이 늦어지다 보니

창동 집까지 가는 시간도 늦었고 하여 그냥 신사동 내 집에서 잤다.

 

토요일. 늘어져라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오전 10시.

먹을거라곤 진짜 과자 한 봉다리 없는 상황이므로 최대한 빨리 창동 집으로 가야 했다.

 

대충 대충 하고 집을 나서려니...

압구정동, 토요일. 그 얼마나 휘까리 번쩍하고 샬랄라 하게 꾸민 사람들로 넘쳐나겠어. 근데 거기에 내가 자다 부시시 한 몰골로 지나다니면.. 매우 안될것 같은 이상한 생각에 휘둘렸다.

 

하여, 평소 같으면 절대로 안하는 토요일 오전의 샤워와 머리감기까지 감행해 줬다. 일단 그렇게 깨끗이 씻고 나니, 복장도 웬지 봄날의 압구정동에 맞추어 입어줘야 할것 같았고,

화장 역시 대충 자외선 차단제만 바를게 아니라 곱게 분칠 까지 해주고 싶은거다.

 

하여, 주린 배를 움켜 잡고, 곱게 드라이 하시고, 화장도 나름 해 주셨다. 맙소사.. 누가 본다고!!

 

봄날의 샬랄라 분위기에 맞추어 꽃무늬 스커트 까지 입고 매우 상큼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압구정역까지 걸어가면서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거리의 유리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 아주 흡족 스러우셨다.

(그래, 나 공주 암이다.)

 

근데 한시간 가까이 걸리는 집까지 가기는 매우! 배가 고픈거다.

하여, 지하철에 타기전에 빵집에 들러서 빵을 몇개 샀다.

정글짐 이란 빵집인데, 빵맛 아주 좋고, 내가 그 빵집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각종 빵 코너 마다 무료 시식이 된다는 점이다.

배고픈데 뭔들 안 맛있겠어?

한바퀴 돌면서 시식 되는 빵은 다 한쪽씩 먹고 지하철 타고 가면서 간단히 먹을 빵도 두어개 샀다.

 

각종 파이로 입안은 달달 하게 되었겠다, 기분도 상큼하시겠다, 오랜만의 밝은 주말 날씨에 매우 만족하며 지하철에 탔다.

 

원래 지하철 타면 무조건 자는 타입인데, 예전 부터 읽으려고 사놓고 표지 한번 열어본 적이 없는...."하룻밤에 읽는 삼국지"란..

다소 구리구리한 제목의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날에는 무슨 시집이나 수필집 같은거 읽어줘야 하는데, 거금 만원이나 주고산 책.. 읽어주는게 예의다 싶어 읽기 시작한게지.

 

나름 복잡한 삼국지의 인간관계에 심취하며 책을 읽고 있는데, 내 앞으로 할아버지 한분이 오시더니 매우 흐믓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시는게다.

 

으윽~~

여기서 또 잠깐 말하자면... 난 지하철이나 버스나, 이런 대중교통을 타고 가다가 보면.. 가끔 내 아빠 뻘이나 막내삼촌 뻘 되는 할아버지, 혹은 매우 연세 지긋하신 아저씨들이 나에게 참.. 수작을 많이 거신다.  좀 젊고 쌔끈하신 분들은 나를 정말, 거들떠도 안 보는데 내가 나름 매우 연로하신 분들에게 인기있는 안면구조인지, 아니면 매우 만만하게 보이는지. 반갑지 않은 이러한 할배과 아저씨들의 쓰잘데기 없는 수작은 나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곤 한다.

 

근데! 이 기분좋은 토요일.삼국지 하이라이트에 심취한 나에게 보내는 이 중절모의 할아버지의 끈끈한 미소와 시선은 뭐란 말이냐.

 

실로.. 짜증났다. 여느 할배들 마냥 주책없이 나에게 말을 걸면 어쩌나, 내가 왜 하필 삼국지 썸띵 책을 들고 있단 말이냐.. 저 할배가 나에게 삼국지에 대하여 토론이라도 하자고 덤비면 어쩌냐....아쓰...이거 자리를 옮겨 말아.. 이렇게 맘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급기야 이 할아버지 나를 보고 말을 건다, 그것도 아주 크~~게.

 

할배 : "아가씨, 거~ 책 읽고 있는 도중 미안한데 말야~"

나 : (아쓰... 이럴줄 알았어, 진작에 자리를 옮겼어야 하는데...)

 

난 할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을 덮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몸을 돌려 발걸음을 떼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말씀을 이어 하셨다.

 

.......

 

할배 : "근데 아가씨, 입에 뭐가 아주 큰 빵 쪼가리가 붙어있어!"

 

할아버지의 '빵 쪼가리" 발음은 유난히 매우 크셨다.

 

순간... 얼마되지 않던 지하철 칸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일시에 나에게 꽂혔다.... 아... 아... 아......

 

난 너무 당황하여

"아..네.." 얼버무리며 입 주변을 닦아냈다.

 

아무리 꽃치마 입고 화장 곱게 하고 샬랄라 하면 뭐해..

배고파서 급하게 시식한 빵조가리 하나를 입에 자랑스럽게 붙이고..  한참을 서울 지하철을 활보하고 다닌게다...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매우 황당해 하고 있는 나에게

그 할아버지는 다시한번 아주 큰~~ 목소리로 나를 knock-down

시키셨으니...

 

할배 :"원래~ 지하철에서 책읽는 아가씨들은 멋을 안내!"

 

아악~~~~~~

 

할아버지, 나 나름대로 오늘 신경 무지쓰고 나온거란 말이에여..엉엉...

 

다행인지 우연인지, 다음역이 내가 내릴역이라서 황급히 내렸다.

 

쪽팔리기도 하고, 나의 칠칠치 못함이 화가 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할아버지의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여자들은 멋을 안내" 라는 말에 더더욱 상처 입었다.

나.. 나름 꾸몄었단 말이다. 흑흑흑...

 

집에오자 마자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 너무 황당했었다고 말하는데.. 엄마는 나를.. 두번 .. 죽이시더군.

 

엄마 :"네가 화장을 안해서 그렇게 말씀하신거 아닐까?"

 

아... 악... 악....

 

엄마.. 나 화장 공들여서 했단 말이에요....

 

....

 

토요일. 기분좋게 샬랄라 상큼했던 나의 기분은....

공짜 빵 시식에 눈멀고

지성피부 특징상 화장 후 20분 후면 개기름으로 변하며

화장 다 지워져버리는 내 선천적 결함에 슬퍼지며

나름 꾸미고 스타일링 한다해도 "멋을 안내"로 보이는

후지디 후진 감각에 좌절하면서,

 

완죤.. 뭉개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