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도려내고 사지를 찢어내는 듯한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질문을 가슴에 품게 된다.
신(神)은 왜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는가?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통이 찾아 오는가?
* * *
인생은 내 마음대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내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는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여정(旅程)이다. 보편한 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이라는 여정 속에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본능적으로 그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보상해줄 무언가를 갈망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개 그 불안의 영역을 대체물을 통한 자기기만(自己欺滿)으로 채우거나, 신(神)이라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존재를 밀어 넣어 안정을 얻어낸다. 대체물로 그 공간을 채워서 안정감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그 대체물의 상실은 크나큰 고통을 가져오게 되며, 다른 대안인 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는(전도연 분) 사랑하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남편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밀양이라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그가 비록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지만 -동생과의 대화를 들어보면 남편을 잃은 것이 교통사고 때문인지, 외도(外道) 때문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밀양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남편이 살아있다. 더구나 남편을 닮은 사랑하는 아들이 있으며, 삶에 안정을 주리라 여겨지는 물질이 있다. 대체물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신을 부를 만한 이유도, 각성도 필요치 않다.
그런 그에게 ‘은혜’약국 여주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한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며,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햇살(sunshine)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약국 여주인은 비밀스런 햇살(secret sunshine/ 밀양)을 신애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크리스찬들에게 익숙한 ‘은총’ 이라는 종교적 단어대신 ‘밀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시, 그녀에게 약국주인의 각성은 의미 없는 것이었으나,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대체물이었던 아들이 유괴범에게 살해당하고 난 뒤, 그 각성은 신애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신애는 아들을 잃는 동시에 순수한 남편을 상징하는 밀양을 잃었고, 아들을 찾기 위해 물질마저 잃게 되어 대체물이 없는 진공상태로 빠져든 것이다.
그런 그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는 그에게 어설프고 주술적인 종교적 아편을 주사한다. 아편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발휘하여 신애의 결핍된 공간을 충만하게 채운다. 그에게 하나님은 느낌의 하나님이며 피상(皮相)의 하나님이다.
그러던 중, 그녀를 종교적 환각상태에서 깨우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녀에게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되어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간 신애는, 그 살인사건을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었다는 원수의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 신애를 사랑한다던 하나님은 신애의 소중한 아들을 죽이는 일을 통해서 살인범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렸고, 살인범에게 구원을 선사한 것이다. 작은 햇볕(sunshine)에도 하나님의 뜻(secret), 밀양(secret sunshine)이 있다고 믿었던 신애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되살아난다.
아들의 죽음을 이용해 살인범의 마음을 돌리셨다는 하나님은 이미 신애에게는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꾸며내고 실행하셨다면, 하나님은 결코 좋은 분은 아니라는 이성적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하나님은 살인범의 구원 계획을 위해 신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 분인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애의 행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무자비한 신인 것이다.
정말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일까?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이라면 그러했을 터요, 그러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인 신(神)인가. 이런 신이라면 신앙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척결(剔抉)해 버려야할 우상이다.
그러고도 고상한 모습을 지닌 체, 근엄을 떨고 있는 가식적인 신(神)이 역겨워서 신애는 구토(嘔吐)한다. 신애는 촌스럽고 유치하며 속물스럽더라도 오히려,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는 편이 현명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인간의 중심에는 종찬(송강호 분)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의도적으로 종찬을 무척이나 정감어린 인물로 묘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 물론, 그 사랑은 자기본위의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보다 훨씬 정감 어리게 그려지고 있다. 다방레지의 팬티나 훔쳐보고, 어떻게 하면 신애와 잘 수 있을까를 골몰하는 사람. 얼기설기 얽어놓은 인맥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속물 중의 속물. 그러나 그에게는 납득이 가는 인간미가 있고, 편안함이 있고 위트가 있다.
고통스런 삶 속에서 신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가 주는 은총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계획이라는 것이 고작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 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 * *
이창동감독은 영화 을 통해 기독교의 신정론(神正論)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악(惡)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언제나 선(善)하다. 그러나 그가 주관한다는 삶 속에 자리 잡은 악(惡)과 고통의 문제는 진지하게 그를 신앙하는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하나님이 선(善)이고 악(惡)을 싫어한다면 왜 악을 없애버리지 않고 방치하는가? 그는 그 부분에서 있어서만은 전능(全能)하지 않고 무능(無能)한 것일까? 또, 그가 그의 계획을 이루어나가기 위해 악(惡)을 사용(혹은, 허용)하고 있다고 가정해 봐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신을 우리는 결코 선(善)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思考)하기를 좋아하는 사람(혹은, 자기자신)과 대화하게 된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정론은 이래저래 비판꺼리가 되어 질 수밖에 없다. 이창동 감독은 그런 신에 대한 모순과 원망(?)들을 이라는 영화를 통해 매우 잘 표현해 내고 있다. 그리고는 우습게도, 불확실하고 모호한 신(神)보다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는 편이 어떻겠느냐는 인본주의(人本主義)적 발상으로 결론을 지어낸다.
그렇다면, 크리스찬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변호(?)할 수 있겠는가? 어설픈 변호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강조하면 할수록 이 이야기는 모순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며, 자신의 어설픈 논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절대자를 자신의 틀 속에 가두어, 진리를 왜곡(歪曲)할 위험조차 생기기 때문이다. 잘 모른다고 이야기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신정론에 관한 적절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신애와 같이 절대고통에 빠지게 될 때 힘없이 무너질 수 있다. 말씀은 진리를 담고 있다. 말씀 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흔하게 발견되며, 그 질문에 하나님은 여지없는 명확한 답을 해주신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그 답을 찾아보는 것은 여러분이 해보는 것이 어떨까? -무책임한 발상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게시판을 통해 함께 고민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분명 하나님을 한층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참고로 이런 문제를 가장 잘 다룬 성경은 욥기가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신정론(神正論)에 관한 이창동 감독의 진지한 질문 - 밀양 -
밀양 (secret sunshine)
가슴을 도려내고 사지를 찢어내는 듯한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런 질문을 가슴에 품게 된다.
신(神)은 왜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는가?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통이 찾아 오는가?
* * *
인생은 내 마음대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내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는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여정(旅程)이다. 보편한 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이라는 여정 속에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본능적으로 그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보상해줄 무언가를 갈망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개 그 불안의 영역을 대체물을 통한 자기기만(自己欺滿)으로 채우거나, 신(神)이라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존재를 밀어 넣어 안정을 얻어낸다. 대체물로 그 공간을 채워서 안정감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그 대체물의 상실은 크나큰 고통을 가져오게 되며, 다른 대안인 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신애는(전도연 분) 사랑하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남편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밀양이라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그가 비록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지만 -동생과의 대화를 들어보면 남편을 잃은 것이 교통사고 때문인지, 외도(外道) 때문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밀양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남편이 살아있다. 더구나 남편을 닮은 사랑하는 아들이 있으며, 삶에 안정을 주리라 여겨지는 물질이 있다. 대체물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신을 부를 만한 이유도, 각성도 필요치 않다.
그런 그에게 ‘은혜’약국 여주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한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며,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햇살(sunshine)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약국 여주인은 비밀스런 햇살(secret sunshine/ 밀양)을 신애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크리스찬들에게 익숙한 ‘은총’ 이라는 종교적 단어대신 ‘밀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시, 그녀에게 약국주인의 각성은 의미 없는 것이었으나,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대체물이었던 아들이 유괴범에게 살해당하고 난 뒤, 그 각성은 신애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신애는 아들을 잃는 동시에 순수한 남편을 상징하는 밀양을 잃었고, 아들을 찾기 위해 물질마저 잃게 되어 대체물이 없는 진공상태로 빠져든 것이다.
그런 그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는 그에게 어설프고 주술적인 종교적 아편을 주사한다. 아편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발휘하여 신애의 결핍된 공간을 충만하게 채운다. 그에게 하나님은 느낌의 하나님이며 피상(皮相)의 하나님이다.
그러던 중, 그녀를 종교적 환각상태에서 깨우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녀에게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되어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간 신애는, 그 살인사건을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었다는 원수의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 신애를 사랑한다던 하나님은 신애의 소중한 아들을 죽이는 일을 통해서 살인범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렸고, 살인범에게 구원을 선사한 것이다. 작은 햇볕(sunshine)에도 하나님의 뜻(secret), 밀양(secret sunshine)이 있다고 믿었던 신애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되살아난다.
아들의 죽음을 이용해 살인범의 마음을 돌리셨다는 하나님은 이미 신애에게는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꾸며내고 실행하셨다면, 하나님은 결코 좋은 분은 아니라는 이성적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하나님은 살인범의 구원 계획을 위해 신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 분인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애의 행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무자비한 신인 것이다.
정말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일까?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이라면 그러했을 터요, 그러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인 신(神)인가. 이런 신이라면 신앙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척결(剔抉)해 버려야할 우상이다.
그러고도 고상한 모습을 지닌 체, 근엄을 떨고 있는 가식적인 신(神)이 역겨워서 신애는 구토(嘔吐)한다. 신애는 촌스럽고 유치하며 속물스럽더라도 오히려,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는 편이 현명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인간의 중심에는 종찬(송강호 분)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의도적으로 종찬을 무척이나 정감어린 인물로 묘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 물론, 그 사랑은 자기본위의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보다 훨씬 정감 어리게 그려지고 있다. 다방레지의 팬티나 훔쳐보고, 어떻게 하면 신애와 잘 수 있을까를 골몰하는 사람. 얼기설기 얽어놓은 인맥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속물 중의 속물. 그러나 그에게는 납득이 가는 인간미가 있고, 편안함이 있고 위트가 있다.
고통스런 삶 속에서 신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가 주는 은총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계획이라는 것이 고작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 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 * *
이창동감독은 영화 을 통해 기독교의 신정론(神正論)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악(惡)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언제나 선(善)하다. 그러나 그가 주관한다는 삶 속에 자리 잡은 악(惡)과 고통의 문제는 진지하게 그를 신앙하는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하나님이 선(善)이고 악(惡)을 싫어한다면 왜 악을 없애버리지 않고 방치하는가? 그는 그 부분에서 있어서만은 전능(全能)하지 않고 무능(無能)한 것일까? 또, 그가 그의 계획을 이루어나가기 위해 악(惡)을 사용(혹은, 허용)하고 있다고 가정해 봐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신을 우리는 결코 선(善)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思考)하기를 좋아하는 사람(혹은, 자기자신)과 대화하게 된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정론은 이래저래 비판꺼리가 되어 질 수밖에 없다. 이창동 감독은 그런 신에 대한 모순과 원망(?)들을 이라는 영화를 통해 매우 잘 표현해 내고 있다. 그리고는 우습게도, 불확실하고 모호한 신(神)보다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는 편이 어떻겠느냐는 인본주의(人本主義)적 발상으로 결론을 지어낸다.
그렇다면, 크리스찬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변호(?)할 수 있겠는가? 어설픈 변호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강조하면 할수록 이 이야기는 모순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며, 자신의 어설픈 논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절대자를 자신의 틀 속에 가두어, 진리를 왜곡(歪曲)할 위험조차 생기기 때문이다. 잘 모른다고 이야기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신정론에 관한 적절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신애와 같이 절대고통에 빠지게 될 때 힘없이 무너질 수 있다. 말씀은 진리를 담고 있다. 말씀 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흔하게 발견되며, 그 질문에 하나님은 여지없는 명확한 답을 해주신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그 답을 찾아보는 것은 여러분이 해보는 것이 어떨까? -무책임한 발상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게시판을 통해 함께 고민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분명 하나님을 한층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참고로 이런 문제를 가장 잘 다룬 성경은 욥기가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끔 도와준 이창동감독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2007년 6월 15일 14기 정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