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에서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하게하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 모든 성도들이 힘이 들어 있을때 힘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입의 권세를 주셔서 우리가 말하는 데로 이뤄주신다는 약속까지 하셨으니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성도의 삶의 귀중한 자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믿는 신자는 뭐든지 잘 할 수 있다고, 뭐든지 잘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 화두가 된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모든 일을 힘 있게 자신 있게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믿음을 주고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잘 살고, 늘 행복하고,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느냐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말대로 된다고 해놓고선 풀리지 않고, 걱정거리와 근심이 있는 삶을 두고서 믿음이 없다고, 신앙심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고귀하다면 고난받는 수많은 목사들과 죽어가는 선교사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목사는 다 부자가 되어야하고, 선교사들은 다 복음을 위해 멋있게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라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무엇이 달라도 확실히 달라야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할 화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성도는 다 잘되고, 부유하고, 행복하다면 불교나 다른 기복신앙의 면면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말입니다. 불교나 기복신앙도 다 같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잘 되는 것은 부처의 도움이며, 신의 도움이란 말입니다. 잘 되지 않으면 그분을 노엽게 했거나 잘 섬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잘 되게 하시는 분이시라면 안될 때에는 하나님이 노하셔서 그런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말입니다. 우리는 이 심각한 왜곡된 신앙을 좋은 신앙이며, 긍정적인 신앙의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에 어느 나이 드시고, 딱딱하게 판에 박힌 설교를 하시면서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회개합시다라고 말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사는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꿀같은 달콤한 말을 잘하는 목사가 부임해서 행복한 목회를 또 시작할 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 목사는 성도들을 웃기기도 하며, 잘 되게 되는 복을 강조하고, 축복기도를 통해서 마치 목사를 통해서 시작되는 영광스런 복을 받게 될것을 기도로 그 자리를 메울지도 모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초두의 말은 잘 되시죠? 행복하시죠? 잘 될겁니다. 긍정적으로 사세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것은 종교의 타락의 한 단면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무서운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공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이며, 교회에 헌금과 헌신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부정과 비리, 죄라는 죄는 다 짓고 사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인입니다. 부자가 되고, 잘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은 아무런 양심의 거릴것이 없어진지 오랩니다. 저는 이 심각한 도덕적 타락의 최정상에 목사가 강단에서 잘못교육을 시키고 있지않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6일 동안 온갖 부정과 착취는 다 해놓고는 목사와 함께 옆에 있는 성도와 함께 행복하시죠! 잘 될겁니다. 모든 일은 다 잘 될겁니다.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수많은 성도들이 있고,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이 있는 나라임에도 부정과 부패가 깊숙이 베어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날 목사가 성도들과 함께 이 행복 놀음을 하기 때문입니다. 잘 될꺼라고 자기네들끼리 수군덕거리며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최대한 그들의 마음에 시원하고 즐거운 설교를 하면서 웃음과 감동을 주는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종교의 타락입니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회개는 사라졌고, 죄를 자복하라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미국 뉴욕의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잘 차려입은 부인이 목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처럼 설교하시는 분을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마치 저의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듯 제 영혼을 깨워 주셨어요. 저는 지금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교회에 오는 걸 그만두든지 해야 할 것 같아요.’ 만약에 종교의 타락의 최전선에서 강단위에서 호화롭게 차려입은 부인이 교회당에 들어오게 된다면 혹시나 상처받을까 최선을 다하여 온화한 설교를 할는지 모릅니다.
사실 목사들이 강단에서 회개하라고 하면 ‘너나 잘하십시요’라고 말하며 비웃음을 받을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필자 또한 이러한 판단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 1년에 한번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설교를 수천 번을 들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후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앞으로 내릴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피하라고 했느냐? 너희는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보여 줄 만한 바른 행동을 하여라. 속으로나마 &#-9;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9;라고 말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자기 타작 마당에서 모든 곡식을 키질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세례요한의 피끓는 절규는 우리의 강단에는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이 심각한 종교의 타락의 언덕에서 변화를 꿈꾸는 자들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예전에 습관처럼 무능력하고 피동적인 신앙의 모습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가운데 우리자신을 비추어보고 교정할 것은 온전히 바꾸어가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 믿고 복받아보세’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보세’라는 새로운 화두로 신앙생활해야겠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1
진정한 기독교인1
오늘날 교회에서 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하게하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좋은 의미로 모든 성도들이 힘이 들어 있을때 힘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입의 권세를 주셔서 우리가 말하는 데로 이뤄주신다는 약속까지 하셨으니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성도의 삶의 귀중한 자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믿는 신자는 뭐든지 잘 할 수 있다고, 뭐든지 잘 되게 되어있다는 것이 화두가 된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고, 모든 일을 힘 있게 자신 있게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믿음을 주고 신뢰를 줄 수 있는 것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잘 살고, 늘 행복하고, 늘 좋은 일만 일어나느냐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말대로 된다고 해놓고선 풀리지 않고, 걱정거리와 근심이 있는 삶을 두고서 믿음이 없다고, 신앙심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고귀하다면 고난받는 수많은 목사들과 죽어가는 선교사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목사는 다 부자가 되어야하고, 선교사들은 다 복음을 위해 멋있게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라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무엇이 달라도 확실히 달라야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할 화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성도는 다 잘되고, 부유하고, 행복하다면 불교나 다른 기복신앙의 면면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말입니다. 불교나 기복신앙도 다 같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잘 되는 것은 부처의 도움이며, 신의 도움이란 말입니다. 잘 되지 않으면 그분을 노엽게 했거나 잘 섬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잘 되게 하시는 분이시라면 안될 때에는 하나님이 노하셔서 그런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말입니다. 우리는 이 심각한 왜곡된 신앙을 좋은 신앙이며, 긍정적인 신앙의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에 어느 나이 드시고, 딱딱하게 판에 박힌 설교를 하시면서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회개합시다라고 말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사는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꿀같은 달콤한 말을 잘하는 목사가 부임해서 행복한 목회를 또 시작할 지도 모릅니다. 그 젊은 목사는 성도들을 웃기기도 하며, 잘 되게 되는 복을 강조하고, 축복기도를 통해서 마치 목사를 통해서 시작되는 영광스런 복을 받게 될것을 기도로 그 자리를 메울지도 모릅니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초두의 말은 잘 되시죠? 행복하시죠? 잘 될겁니다. 긍정적으로 사세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것은 종교의 타락의 한 단면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무서운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공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이며, 교회에 헌금과 헌신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부정과 비리, 죄라는 죄는 다 짓고 사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인입니다. 부자가 되고, 잘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은 아무런 양심의 거릴것이 없어진지 오랩니다. 저는 이 심각한 도덕적 타락의 최정상에 목사가 강단에서 잘못교육을 시키고 있지않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6일 동안 온갖 부정과 착취는 다 해놓고는 목사와 함께 옆에 있는 성도와 함께 행복하시죠! 잘 될겁니다. 모든 일은 다 잘 될겁니다.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수많은 성도들이 있고,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이 있는 나라임에도 부정과 부패가 깊숙이 베어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날 목사가 성도들과 함께 이 행복 놀음을 하기 때문입니다. 잘 될꺼라고 자기네들끼리 수군덕거리며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최대한 그들의 마음에 시원하고 즐거운 설교를 하면서 웃음과 감동을 주는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종교의 타락입니다. 오늘날의 강단에서 회개는 사라졌고, 죄를 자복하라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미국 뉴욕의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잘 차려입은 부인이 목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처럼 설교하시는 분을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마치 저의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듯 제 영혼을 깨워 주셨어요. 저는 지금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교회에 오는 걸 그만두든지 해야 할 것 같아요.’ 만약에 종교의 타락의 최전선에서 강단위에서 호화롭게 차려입은 부인이 교회당에 들어오게 된다면 혹시나 상처받을까 최선을 다하여 온화한 설교를 할는지 모릅니다.
사실 목사들이 강단에서 회개하라고 하면 ‘너나 잘하십시요’라고 말하며 비웃음을 받을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필자 또한 이러한 판단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 1년에 한번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설교를 수천 번을 들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후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앞으로 내릴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피하라고 했느냐? 너희는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보여 줄 만한 바른 행동을 하여라. 속으로나마 &#-9;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9;라고 말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자기 타작 마당에서 모든 곡식을 키질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세례요한의 피끓는 절규는 우리의 강단에는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이 심각한 종교의 타락의 언덕에서 변화를 꿈꾸는 자들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예전에 습관처럼 무능력하고 피동적인 신앙의 모습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가운데 우리자신을 비추어보고 교정할 것은 온전히 바꾸어가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 믿고 복받아보세’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보세’라는 새로운 화두로 신앙생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