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텔레비전과 영화, 연극무대에서 활동한 중견 연기자로 현재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다. 1990년 현대건설 성공 신화를 다룬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젊은 이명박’을 연기한 것을 계기로 이 당선인과 인연을 맺었다. 문화행정과 언론 부문에서 전문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약점이다. 부인 강혜경(47)씨도 중앙대 성악과 교수를 지낸 문화예술인이다. △서울(57) △한성고·중앙대 연극영화과 △서울문화재단 대표 △대통령직인수위 사회교육문화분과 자문위원
대선때 공동선대위유인촌 뉴라이트 활동 관련뉴스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16580 유인촌 할아버지 유치진(柳致眞, 1905∼1974)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희곡 〈토막 土幕〉(문예월간, 1931. 12~1932. 1)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어 3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의 문학세계는 작품이 씌어진 시기와 성격에 따라 초기·중기·후기로 나뉜다. 초기는 1930년대 중반까지이며, 주로 일제에 수탈당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썼다. 〈토막〉·〈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소〉·〈마의태자〉등이 이에 속한다. 〈마의태자〉를 제외한 세 작품은 일제시대에 고통받는 농민의 삶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씌어졌으며, 특히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소〉는 1935년 도쿄학생예술좌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내용이 불온하다고 해서 박동근·이해랑 등과 종로경찰서에 3개월 정도 구금되었다. 〈마의태자〉는 〈소〉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나서 현실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쓴 작품이며,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등장시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중기는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진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친일을 내세우는 희곡을 쓰거나 연출했다. 희곡 〈흑룡강〉·〈북진대〉·〈대추나무〉 등이 이에 속하며, 〈흑룡강〉은 일제의 군국주의를 합리화하고 홍보하는 내용이고 〈대추나무〉는 조선 농민에게 만주로 이민갈 것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후기는 해방 이후부터 활동한 시기이며, 민족분단과 전쟁의 참혹상을 드러낸 사실주의극을 주로 썼다. 이 시기에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1950년 4월 국립극장 창립공연으로 올려진 〈원술랑〉을 비롯해 역사에서 소재를 취한 〈자명고〉·〈별〉·〈사육신〉 등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연극의 대중성〉(신흥영화, 1932. 6)·〈신극수립의 전망〉(동아일보, 1934. 1. 6~12)·〈조선연극운동의 당면과제〉(동아일보, 1938. 4. 22~24) 등을 발표했고, 저서로 〈유치진 역사극집〉·〈유치진 희곡전집〉과 〈동랑자서전〉이 있다. 195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북진대]라는 작품은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년 8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사이에 일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위해 경의선 군용철도의 부설에, 혹은 군수품의 수송에,혹은 러시아 국내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색하는 등, 일부 배일파(排日派)의 치열한 박해와 매도 속에서도 과감하게 일한 양국의 합병에 헌신하는 모습"과 '대동합방론'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일진회를 이끌었던 이용구야말로 "한국을 열국의 세력쟁탈장에서 구하고, 동양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 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선각자"로 인식시키려는 내용으로 되어 있 는 일종의 역사극이다.([북진대], {삼천리}, 1942. 7) 이 공연을 기획한 경성대화숙은 "이 연극은 내선일체 의 심화철저를 기하고, 대동아전쟁하에 있어서의 반도청년의 궐기를 촉하려고 한 작품으로, 내선일체의 철저는 일한병합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의도로 기획된 것으로서, 이 연극을 보면, 당시 조선반도가 남진하는 러시아의 호구(虎口)에 놓여 있었던 것과, 반도민중이 일한병합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또한 일한병합이 무력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도민중의 자발적 열망을 일본이 용인한 것 이었음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북진대를 기획하고], {국민문학}, 1942. 6) 유인촌 작은 할아버지 유치환(柳致環1908~1967)친일시인(학창시절 국어책에서 봤던 청마 유치환)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친일문학 연구가인 박태일 경남대 국문과 교수가 1942년 2월 6일자 <만선일보>에서 발견해 공개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에는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옹호하는 청마 유치환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 조고마한 개인적 생활의 불편가튼 것은 수(數)에 모들 수 업는 만큼 여간 커다란 보람이 안입니다. (중략) 나라가 잇서야 산하도 예술도 잇는 것을 매거(枚擧)할 수 업시 목격하고 잇지 안습니까. 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 -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뉴라이트 소속 유인촌 어쩐지 냄새가 나더라..친일파 후손이라
» 유인촌 문화관광(문화)30여년 텔레비전과 영화, 연극무대에서 활동한 중견 연기자로 현재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다. 1990년 현대건설 성공 신화를 다룬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젊은 이명박’을 연기한 것을 계기로 이 당선인과 인연을 맺었다. 문화행정과 언론 부문에서 전문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약점이다. 부인 강혜경(47)씨도 중앙대 성악과 교수를 지낸 문화예술인이다. △서울(57) △한성고·중앙대 연극영화과 △서울문화재단 대표 △대통령직인수위 사회교육문화분과 자문위원
대선때 공동선대위유인촌 뉴라이트 활동 관련뉴스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16580
유인촌 할아버지 유치진(柳致眞, 1905∼1974) 친일 '국민연극' 주도한 근대연극사의 거두 희곡 〈토막 土幕〉(문예월간, 1931. 12~1932. 1)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어 30여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의 문학세계는 작품이 씌어진 시기와 성격에 따라 초기·중기·후기로 나뉜다. 초기는 1930년대 중반까지이며, 주로 일제에 수탈당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썼다. 〈토막〉·〈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소〉·〈마의태자〉등이 이에 속한다. 〈마의태자〉를 제외한 세 작품은 일제시대에 고통받는 농민의 삶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씌어졌으며, 특히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소〉는 1935년 도쿄학생예술좌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내용이 불온하다고 해서 박동근·이해랑 등과 종로경찰서에 3개월 정도 구금되었다. 〈마의태자〉는 〈소〉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나서 현실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쓴 작품이며,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등장시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중기는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진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친일을 내세우는 희곡을 쓰거나 연출했다. 희곡 〈흑룡강〉·〈북진대〉·〈대추나무〉 등이 이에 속하며, 〈흑룡강〉은 일제의 군국주의를 합리화하고 홍보하는 내용이고 〈대추나무〉는 조선 농민에게 만주로 이민갈 것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후기는 해방 이후부터 활동한 시기이며, 민족분단과 전쟁의 참혹상을 드러낸 사실주의극을 주로 썼다. 이 시기에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1950년 4월 국립극장 창립공연으로 올려진 〈원술랑〉을 비롯해 역사에서 소재를 취한 〈자명고〉·〈별〉·〈사육신〉 등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연극의 대중성〉(신흥영화, 1932. 6)·〈신극수립의 전망〉(동아일보, 1934. 1. 6~12)·〈조선연극운동의 당면과제〉(동아일보, 1938. 4. 22~24) 등을 발표했고, 저서로 〈유치진 역사극집〉·〈유치진 희곡전집〉과 〈동랑자서전〉이 있다. 195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북진대]라는 작품은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1904년 8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사이에 일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을 위해 경의선 군용철도의 부설에, 혹은 군수품의 수송에,혹은 러시아 국내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색하는 등, 일부 배일파(排日派)의 치열한 박해와 매도 속에서도 과감하게 일한 양국의 합병에 헌신하는 모습"과 '대동합방론'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일진회를 이끌었던 이용구야말로 "한국을 열국의 세력쟁탈장에서 구하고, 동양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은 그 동맹국인 일본과 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선각자"로 인식시키려는 내용으로 되어 있 는 일종의 역사극이다.([북진대], {삼천리}, 1942. 7) 이 공연을 기획한 경성대화숙은 "이 연극은 내선일체 의 심화철저를 기하고, 대동아전쟁하에 있어서의 반도청년의 궐기를 촉하려고 한 작품으로, 내선일체의 철저는 일한병합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의도로 기획된 것으로서, 이 연극을 보면, 당시 조선반도가 남진하는 러시아의 호구(虎口)에 놓여 있었던 것과, 반도민중이 일한병합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또한 일한병합이 무력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도민중의 자발적 열망을 일본이 용인한 것 이었음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북진대를 기획하고], {국민문학}, 1942. 6) 유인촌 작은 할아버지 유치환(柳致環1908~1967)친일시인(학창시절 국어책에서 봤던 청마 유치환)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친일문학 연구가인 박태일 경남대 국문과 교수가 1942년 2월 6일자 <만선일보>에서 발견해 공개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에는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옹호하는 청마 유치환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 조고마한 개인적 생활의 불편가튼 것은 수(數)에 모들 수 업는 만큼 여간 커다란 보람이 안입니다. (중략) 나라가 잇서야 산하도 예술도 잇는 것을 매거(枚擧)할 수 업시 목격하고 잇지 안습니까. 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 -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지금까지 청마의 작품 가운데 시 「들녘」, 「전야」, 「북두성」 등이 친일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은 있었지만 산문 형식의 친일 글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태일 교수는 “이번 청마의 산문은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글”이라면서 “청마의 친일문학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이번 글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친일성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1454100아고라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