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거듭납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명하지는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 사람이 되는 것과 침례받는 것의 관계를 뚜렷하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침례가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의식이고
그 의식을 치름으로써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례를 성사(聖事)라고 부릅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서둘러서 침례를 받게 합니다. 새 사람과 침례, 이 두 가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그 의미들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새 사람은 내적인 체험에서 되는 것이고 침례는 외적인 행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두 가지의 조건을 꼭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거듭남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둘째는 인자의 들림입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4-15)
예수께서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도박꾼도 아니고 술 취한 자나 도적도 아니며 자유사상가나 이교도도 아닌, 바로 유대인의 관원이자 바리새인이며 대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서 성경과 율법을 철저히 지킨 당대의 종교지도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로서 모든 특혜를 지닌 니고데모였지만 예수께서 육으로 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무척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한복음 3:4)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모태에서 두 번 난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은 거듭나야 할까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한복음 3:6)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살인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습니다. (요한복음 8:44)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
거듭남이란, 옛 성품이 개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새 성품으로 바뀌는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개선은 육신만을 이롭게 할 뿐이고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쐐기풀을 정원이나 온실에 심고 매일 정성스럽게 가꾸었다고 합시다. 때가 되면 쐐기풀들은 무성하고 아름답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쐐기풀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그저 쐐기풀입니다. 그 쐐기풀에서 무화과나 포도가 열리진 않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태복음 7:16)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예레미야 13:23)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새 성품이 심어지고 새 생명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물 가운데 스스로 생겨난 생명체는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이미 존재하던 생명체에서 태어나거나 비롯됩니다. 생명이 없는 무기물과 생명있는 유기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무기물인 돌은 스스로 생명있는 유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세계 사이에는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은 반드시 생명의 세계 편에서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돌은 무기물의 세계에 속하므로 그 문을 열 수 없지만 유기물인 한 포기 풀의 연한 뿌리는 흙 속에서 뻗어나가고 돌을 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물 세계와 동물 세계에도 문이 있는데 이 문은 동물 세계 편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이는 식물이 동물처럼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동물이 식물을 먹으면 식물은 동물의 몸속에서 살이 되고 결국은 동물의 생명으로 화(化)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도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 문은 육의 세계에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조각가가 대리석으로 아무리 훌륭한 조각품을 빚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대리석이며 생명 없는 조각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이고,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사람의 마음이 모체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23)
만약 식물이나 동물 혹은 사람의 씨앗이 생명이 없는 죽은 씨앗이라면 새 생명이 싹틀 수 없습니다. 새 생명이 싹트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사람의 마음밭에서 성령에 의해 생명으로 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40)라는 말씀을 수천 번 읽고 듣기도 하였습니다.
어느날 그가 길을 걷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가와서 이 구절이 인쇄된 종이를 건네줍니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를 구원받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데 대해서 무척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그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하수구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마음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저녁때에 영화를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했지만 종이에 적혀 있던 그 말씀이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잠도 편하게 잘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래 생명이 없던 그 문장이 성령으로부터 생기를 받아 그의 마음에 떨어져서 그 사람 속에서 새 생명으로 변화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무런 도움이 없이도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 사람이 그 구절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그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거듭나게 했던 구절이 있다면 바로 그 구절이 생기를 받아 우리의 마음에 새 생명을 싹트게 한 성령의 씨앗인 것입니다.
어떻게 거듭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명하지는 않으십니다.
놋뱀과 바람
바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람이 지나간 뒤의 흔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니고데모와 말씀을 나누시면서 세 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첫째는 거듭나는 것이고, 둘째는 놋뱀이며, 셋째는 바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거듭남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놋뱀에 대해 알아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14)
니고데모는 성경에 열심인 바리새인이라서 놋뱀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불뱀을 내려 백성을 물게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뉘우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도록 명했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나았습니다. (민수기 21:4-9)
불뱀은 마귀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놋뱀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이 뱀에 물린 사람들을 고친 것처럼 예수께서도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높이 들려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놋뱀을 높게 매달았기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들이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이 들리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한복음 12:32-33)
그날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와 장례 치를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요셉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요셉, 나는 예수께서 요한의 집에 머물러 계실 때 밤에 그 분을 뵈러 갔었소. 그때 나에게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예수께서 그렇게 들린 것이오. 이 분은 진정 우리의 구세주이시오.”
이제 광야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단계를 설명해 줍니다.
1.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했던 첫 번째 것은 자신이 불뱀에 물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건강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도 그 죄가 그의 영혼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영혼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2. 그리고 두 번째 것은 불뱀에게 물린 상처가 낫도록 하나님께서 치료제를 내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놋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죄가 자신의 생명을 파멸시킨다는 것은 알면서도 구출 받을 길이 있음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치료할 치료제 즉, 예수님을 내려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3.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치료제라고 해도 그것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설령 놋뱀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쳐다보지 않으면 결국 죄 가운데서 죽고 맙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도 “아니, 한낱 쇠붙이가 어떻게 사람을 낫게 한단 말인가?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집에서 찜질을 하고 약을 발라야지.”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현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대신 양심에서 오는 심한 가책을 달래보려고 선행이나 고행, 음악, 세상적인 오락, 종교적 열심 등 인간이 만든 치료제에 눈을 돌립니다.
다음의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불뱀에게 물린 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물린 사람이 나은 그 원리를 알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만약 하나님께서 놋조각을 약초와 함께 끓인 다음 그것으로 약을 만들어서 물린 부위에 바르라고 하셨다면 수긍할 수 있겠지만 장대에 달린 놋뱀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란다고 그대로 하는 것은 바보짓이야. 그렇게 하기 전에 죽어 버릴지도 몰라.”
현대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죄의 원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의 일을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명백하게 설명해 주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불뱀에 물린 또 다른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일까지 기다려 보겠어. 내일까지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가서 놋뱀을 쳐다봐야지. 혹시 놋뱀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사람처럼 현대의 어떤 사람들은 내일쯤이면 영적인 상태가 호전되리라는 희망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호전되지 않으면 그때서야 종교에 의탁해 보려 합니다.
또 어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상처와 이웃 사람의 상처를 비교해 본 뒤, “나의 상처는 그 사람의 상처에 비하면 훨씬 양호하므로 만약 그 사람이 낫는다면 나도 나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는 것으로 우리의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제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처를 낫게 한 것은 놋뱀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바라본 그것이었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나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계획이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이웃이나 율법으로부터 눈을 돌려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미 일을 마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입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한 것은 놋뱀 뿐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12)
놋뱀 쳐다보기를 거절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쳐다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후서 1:8-9)
자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문제의 올바른 답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람’에 대한 예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8)
바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람이 자나간 뒤의 흔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흔들리거나 먼지가 이는 것은 바람이 남긴 흔적입니다. 성령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타락하고 악한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한 것을 보면 성령께서 그의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녀임을 구분할 수 있는 거듭남의 증표들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한1서 5:10)
2.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한1서 3:24)
3.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한1서 3:14)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한1서 5:4)
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새 성품을 갖게 되고 새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그는 가나안의 말을 즐겨 쓰며 하늘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그는 새 식물을 먹습니다.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 따위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새 노래를 간직하게 됩니다.
가요나 팝송보다는 하나님의 노래를 즐겨 부르게 됩니다.
옛 친구들과의 관계가 서서히 끊어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게 됩니다.
침례의 의미와 목적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해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또 그것은 내적인 체험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침례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알아봅시다.
침례는 거듭남을 상징해 주는 외적인 행위입니다. 침례는 이미 거듭났기 때문에 받는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받는 것이 아님을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물은 침례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 데는 거듭남과 물 침례, 둘 다 필요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은 물 침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물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23) 침례는 반드시 믿는 자들만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8:35-38)
침례를 받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 침례나 혹은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침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선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로마서 6:3-5)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 15:1-4)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형태의 침례 즉, 물속에 잠기는 침례만이 완전하며, 죽음, 장사, 부활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침례는, 거듭난 자의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공적인 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 사람은 침례를 통해서 물 무덤 속에 묻히고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부활의 삶을 걷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뒤로 눕혀져서 단 한 번 물 속에 잠깁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얼굴을 땅으로 향하게 한 채 묻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반드시 한 번 죽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과 침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영적인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침례는 거듭남의 결과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새 사람에게 주는 외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침례 그 자체에는 구원을 받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침례를 왜 받습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16)
둘째,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36-37, 16:14-15, 16:27-33)
셋째, 거듭난 자는 거듭난 자들이 모인 무리의 몸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침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첫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1-42)
새 사람과 침례
(성경적으로 보면 이 그림은 틀린 그림이 되겠지요
침례의 의미는 씻는 것이 아니고 수장이므로..)
대신 수장해주는 의미가 있으므로 뒤로 눕혀
물에 담궜다가 잃으켜 세웁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
어떻게 거듭납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명하지는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 사람이 되는 것과 침례받는 것의 관계를 뚜렷하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침례가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한 의식이고
그 의식을 치름으로써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례를 성사(聖事)라고 부릅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서둘러서 침례를 받게 합니다. 새 사람과 침례, 이 두 가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그 의미들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새 사람은 내적인 체험에서 되는 것이고 침례는 외적인 행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두 가지의 조건을 꼭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거듭남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둘째는 인자의 들림입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4-15)
예수께서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도박꾼도 아니고 술 취한 자나 도적도 아니며 자유사상가나 이교도도 아닌, 바로 유대인의 관원이자 바리새인이며 대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서 성경과 율법을 철저히 지킨 당대의 종교지도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로서 모든 특혜를 지닌 니고데모였지만 예수께서 육으로 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무척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한복음 3:4)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모태에서 두 번 난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은 거듭나야 할까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한복음 3:6)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살인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서 났습니다. (요한복음 8:44)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
거듭남이란, 옛 성품이 개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새 성품으로 바뀌는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개선은 육신만을 이롭게 할 뿐이고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쐐기풀을 정원이나 온실에 심고 매일 정성스럽게 가꾸었다고 합시다. 때가 되면 쐐기풀들은 무성하고 아름답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쐐기풀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그저 쐐기풀입니다. 그 쐐기풀에서 무화과나 포도가 열리진 않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태복음 7:16)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예레미야 13:23)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새 성품이 심어지고 새 생명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물 가운데 스스로 생겨난 생명체는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이미 존재하던 생명체에서 태어나거나 비롯됩니다. 생명이 없는 무기물과 생명있는 유기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무기물인 돌은 스스로 생명있는 유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세계 사이에는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은 반드시 생명의 세계 편에서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돌은 무기물의 세계에 속하므로 그 문을 열 수 없지만 유기물인 한 포기 풀의 연한 뿌리는 흙 속에서 뻗어나가고 돌을 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물 세계와 동물 세계에도 문이 있는데 이 문은 동물 세계 편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이는 식물이 동물처럼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동물이 식물을 먹으면 식물은 동물의 몸속에서 살이 되고 결국은 동물의 생명으로 화(化)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도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 문은 육의 세계에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조각가가 대리석으로 아무리 훌륭한 조각품을 빚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대리석이며 생명 없는 조각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이고,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사람의 마음이 모체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23)
만약 식물이나 동물 혹은 사람의 씨앗이 생명이 없는 죽은 씨앗이라면 새 생명이 싹틀 수 없습니다. 새 생명이 싹트는 것은 영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사람의 마음밭에서 성령에 의해 생명으로 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40)라는 말씀을 수천 번 읽고 듣기도 하였습니다.
어느날 그가 길을 걷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가와서 이 구절이 인쇄된 종이를 건네줍니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를 구원받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데 대해서 무척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그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하수구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마음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저녁때에 영화를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했지만 종이에 적혀 있던 그 말씀이 떠올라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잠도 편하게 잘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원래 생명이 없던 그 문장이 성령으로부터 생기를 받아 그의 마음에 떨어져서 그 사람 속에서 새 생명으로 변화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무런 도움이 없이도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 사람이 그 구절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그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거듭나게 했던 구절이 있다면 바로 그 구절이 생기를 받아 우리의 마음에 새 생명을 싹트게 한 성령의 씨앗인 것입니다.
어떻게 거듭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명하지는 않으십니다.
놋뱀과 바람
바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람이 지나간 뒤의 흔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니고데모와 말씀을 나누시면서 세 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첫째는 거듭나는 것이고, 둘째는 놋뱀이며, 셋째는 바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거듭남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놋뱀에 대해 알아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14)
니고데모는 성경에 열심인 바리새인이라서 놋뱀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불뱀을 내려 백성을 물게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뉘우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도록 명했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나았습니다. (민수기 21:4-9)
불뱀은 마귀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놋뱀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이 뱀에 물린 사람들을 고친 것처럼 예수께서도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높이 들려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놋뱀을 높게 매달았기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들이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이 들리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한복음 12:32-33)
그날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와 장례 치를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요셉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요셉, 나는 예수께서 요한의 집에 머물러 계실 때 밤에 그 분을 뵈러 갔었소. 그때 나에게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예수께서 그렇게 들린 것이오. 이 분은 진정 우리의 구세주이시오.”
이제 광야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단계를 설명해 줍니다.
1.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했던 첫 번째 것은 자신이 불뱀에 물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건강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도 그 죄가 그의 영혼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영혼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2. 그리고 두 번째 것은 불뱀에게 물린 상처가 낫도록 하나님께서 치료제를 내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놋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죄가 자신의 생명을 파멸시킨다는 것은 알면서도 구출 받을 길이 있음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치료할 치료제 즉, 예수님을 내려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3.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치료제라고 해도 그것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설령 놋뱀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더라도 쳐다보지 않으면 결국 죄 가운데서 죽고 맙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도 “아니, 한낱 쇠붙이가 어떻게 사람을 낫게 한단 말인가? 그런 말은 믿을 수가 없어. 집에서 찜질을 하고 약을 발라야지.”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현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대신 양심에서 오는 심한 가책을 달래보려고 선행이나 고행, 음악, 세상적인 오락, 종교적 열심 등 인간이 만든 치료제에 눈을 돌립니다.
다음의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불뱀에게 물린 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물린 사람이 나은 그 원리를 알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만약 하나님께서 놋조각을 약초와 함께 끓인 다음 그것으로 약을 만들어서 물린 부위에 바르라고 하셨다면 수긍할 수 있겠지만 장대에 달린 놋뱀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란다고 그대로 하는 것은 바보짓이야. 그렇게 하기 전에 죽어 버릴지도 몰라.”
현대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죄의 원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의 일을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명백하게 설명해 주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불뱀에 물린 또 다른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일까지 기다려 보겠어. 내일까지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가서 놋뱀을 쳐다봐야지. 혹시 놋뱀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 사람처럼 현대의 어떤 사람들은 내일쯤이면 영적인 상태가 호전되리라는 희망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호전되지 않으면 그때서야 종교에 의탁해 보려 합니다.
또 어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상처와 이웃 사람의 상처를 비교해 본 뒤, “나의 상처는 그 사람의 상처에 비하면 훨씬 양호하므로 만약 그 사람이 낫는다면 나도 나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는 것으로 우리의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제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처를 낫게 한 것은 놋뱀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바라본 그것이었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나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계획이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이웃이나 율법으로부터 눈을 돌려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미 일을 마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입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한 것은 놋뱀 뿐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이는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12)
놋뱀 쳐다보기를 거절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쳐다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도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후서 1:8-9)
자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문제의 올바른 답을 얻으려면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바람’에 대한 예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8)
바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람이 자나간 뒤의 흔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흔들리거나 먼지가 이는 것은 바람이 남긴 흔적입니다. 성령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타락하고 악한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한 것을 보면 성령께서 그의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녀임을 구분할 수 있는 거듭남의 증표들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한1서 5:10)
2.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한1서 3:24)
3.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한1서 3:14)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한1서 5:4)
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새 성품을 갖게 되고 새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그는 가나안의 말을 즐겨 쓰며 하늘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그는 새 식물을 먹습니다.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 따위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새 노래를 간직하게 됩니다.
가요나 팝송보다는 하나님의 노래를 즐겨 부르게 됩니다.
옛 친구들과의 관계가 서서히 끊어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게 됩니다.
침례의 의미와 목적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해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또 그것은 내적인 체험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침례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알아봅시다.
침례는 거듭남을 상징해 주는 외적인 행위입니다. 침례는 이미 거듭났기 때문에 받는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받는 것이 아님을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물은 침례를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 데는 거듭남과 물 침례, 둘 다 필요하지 않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은 물 침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물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베드로전서 1:23) 침례는 반드시 믿는 자들만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8:35-38)
침례를 받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 침례나 혹은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침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선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로마서 6:3-5)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 15:1-4)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 형태의 침례 즉, 물속에 잠기는 침례만이 완전하며, 죽음, 장사, 부활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침례는, 거듭난 자의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공적인 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 사람은 침례를 통해서 물 무덤 속에 묻히고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부활의 삶을 걷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뒤로 눕혀져서 단 한 번 물 속에 잠깁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은 얼굴을 땅으로 향하게 한 채 묻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반드시 한 번 죽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부활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과 침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영적인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반면 침례는 거듭남의 결과로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새 사람에게 주는 외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침례 그 자체에는 구원을 받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침례를 왜 받습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15-16)
둘째,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36-37, 16:14-15, 16:27-33)
셋째, 거듭난 자는 거듭난 자들이 모인 무리의 몸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침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첫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1-42)
출처 : 말씀사랑선교회 월간지 필로고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