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外 _ 혼다 히사시

김선미200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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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깨어져 흩어진 대로 손거울은 돌 위에서 비출 수 있는 만큼의 하늘만 비춘다 - 시카모토 요오코



혼다 히사시





쇠사슬을 풀어 놓아 개가 달아나 버리고

정원을 가득 메운 봉선화가

일제히 터진다

바람의 탑이라고 이름 지은 멀구슬나무 그늘에서는

여자 아이가 혼자

매미 허물을 모아 놓고 수를 세고 있다

흙먼지가 쌓인 질경이 잎에는

개미가 기어간 흔적이 있고

마치 천사의 필적 같아 보인다

이윽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무성한 갈퀴덩굴을 적실 것이다

들판에는 한나절 무지개가 설 것이다

그러나 탱자나무 가시에 상처 입은

바람이 언뜻 방향을 바꿀 때

바위 위에 날개 하나가 살랑거리고 있다

여자 잔디

남자 잔디

힘의 잔디

내게 죽음이 찾아오면

족제비가 쐐기풀을 짓밟고

과수원을 뒤로 할 것이다

그때 태양은

겨울처럼 산산이 깨어져

비출 수 있는 만큼의 하늘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 파편을 주워 모아

금이 간 생애를 복원해 놓았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깨부수어 거지덩굴 뿌리 밑에 버려라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인간 세상에 다시는 부르지 마라









4월

혼다 히사시





꽃이 한창일 때 올리브 밭 하늘가로 울려 퍼지는 게 있다

지상을 오가는 개미의 대열이 흐트러지고 있다

먹이를 쪼아 먹던 작은 꿩은

놀라서 숲 그늘에 숨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번개가 무서워 조용해진 마을에

돌연 개 짖는 소리가 울린다

선(先)시르르기(紀)와 백아기 지층이 잠든 낭떠러지에서

암모나이트가 발견되고 갑자기 양치식물들이 살랑거린다



벌써 40년이나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던 50대 남자가

드디어 새 혜성을 발견하고는 채 이름을 짓기 전에 죽었다

그는 밤마다 우주 저쪽을 노려보면서

유년기적 자신의 별명을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제 꿈 속에서 나를 버린 그림자는 어디로 갔을까

1000년 주기로 은하를 순회하는 혜성이 돌아온다고 한다

마가목나무 아래 묻었던 석판의 말[馬]이 일제히 날뛰기 시작한다









과수원의 노래

혼다 히사시





고목에는 이제 열매가 맺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죄의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이 또한

고목과 같은 번개의 신이다

단숨에 잘라 내 쓰러뜨리고 싶지만

허리가 비틀거리고 손놀림이 분명치 않아

모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여름의 끝이 쓸쓸한 황혼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것들이

빈번하게 반짝이고 있다



* * *



그루터기 중심에서

조용히 퍼져 간 시간의 파도에 씻겨

희미하게 흔들리는 죽음이여

그 빈 껍데기여 영혼의 기억이여

여름의 관 이름은 인간의 언어로 '매미 허물'이라 불리는

그 서글픈 음운이여



* * *



매미 허물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매미 울음소리



* * *



그때 겨우 닿은 것이다

사물의 형태에 단 하나의 의미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꽃 한 잎처럼

작은 돌에 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벗겨 내려는

바람의 의지

질투란 오직

인간의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신도 역시 불길 이는 마음을 이름 붙일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 * *



노린재

통칭 방귀벌레의 이상 발생으로

밀감의 수확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머니 이마의 주름이 조금 깊어지고

눈길이 더 어두워지고

필요 없어진 저수지의 물이 무딘 빛을 발하고 있다

성과가 없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는 것일까

잘라 내고 손질하고 꽃을 따 내며

'내일'을 꿈꾸었던 나날이

모조리 고뇌거리로 바뀌었다 해도

그날들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어머니여 그로 인해

당신이 짊어지고 나갈 하늘까지 무거워졌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 * *


썩어 떨어진 엄청난 열매들이

다시 밀감나무를 키운다

비애와 후회가 꽃을 피우는

과수원에 떠도는 향기가 어머니여

당신을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허리가 구부러졌다 해도

비틀어진 밀감나무가 그렇듯이

역시 당신의 꿈은

하늘에 그려져 가는 것입니다



* * *



그리고 들판 끝

한 그루 나무에 기대 선 사람이 있다

어제의 어머니의 그림자다

오늘의 어머니를 꿈꾸고 있는









조상을 맞이하는 불

혼다 히사시





바다를 건너 다가오는 것은

갈기를 흩날리는 말이다

갈라지는 물보라 속에서 분명

아버지의 실루엣이 고삐를 당기고 있다



전쟁의 불구덩이에서 타 죽은 구렁말

그 행방 불명된 영혼을 찾아

스스로 저승을 떠난 아버지가

드디어 재화를 이뤄 냈던 것이다



물가는 오늘도 여전히 포말이 인다

나는 떠내려 온 나무를 모아 불을 지핀다

파도 위로 달려가 꼭 껴안고 싶지만

그것조차도 할 수 없는 형편 없는 내가

하다못해 아버지에게 보내는 작은 신호다

곧바로 이 불을 목표로 달려와 주길 바라며



이승의 물가에서 맞이하는 자도 지금은

결국 한 사람이지만

아버지여 당신이 갈고

씨를 뿌리고 가꿨던 논은 이제 황폐해졌고

말을 씻겨 주었던 강도 완전히 말라 버렸지만

나를 힐문(詰問)하는 일일랑 접어 두고

배고팠던 그 옛날의 이야기라도 하시지요

작은 불의 주변에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가족이 다시 모여 가까이 둘러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성몽담(聖夢譚)

혼다 히사시







한 권의 검은 책은 지구상에

인간이 살기도 전에

우주 공간을 흐르는 미풍에 의해

딱 한 번

페이지가 넘겨진 적이 있었다

그때 열려진 페이지의 어디에도

말은 적혀 있지 않았다

모든 페이지는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일어난 미풍에 의해 페이지가 넘겨졌을 때

하나의 말

'빛'이라는 말이 쓰여 있고

모든 페이지에 빛이 넘치고 있었다

빛에 의해 검은 책의 페이지에는

모든 말이 적혀 있었다

말에는 아무런 의미도

경험도 없었다

모든 페이지는 무의미하며 아름답고

첫 페이지에는 원형의 무지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언어 위에 얹힌 면류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