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Moulin Rouge, by Henri de Toulouse-Lautrec.
Toulouse-Lautrec 툴루스-라트렉은 세상이 위선과 이중인격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던 미술가였다. 자신이 가진 장애 때문에 사람들이 보내는 동정의 눈길과 차별에 진저리를 느낀 그는 물랑루즈로 발걸음을 돌렸다. 돈만 내면 불구자, 정상인 상관 없이 동등하게 대해주는 그곳 창녀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낀 그는 이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까지 이르렀다. 머리 장식으로 귀부인과 창녀, 노동자 등의 계층을 구분하던 1800년대 후반, 이 화가는 이 그림 속에서 그들이 모자와 헤드기어들을 불분명하게 처리함으로서 "귀부인이나 창녀들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속물들일 뿐..."하는 메세지를 시시하고자 한 듯하다. 그림 표면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있는 귀부인의 얼굴을 시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음침한 푸른색으로 처리한 것도, 1890년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아닐까. 그녀의 얼굴은 구역질 날 정도의 불쾌함과 음침함으로 빛난다. 그녀 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옷을 잘 빼입은 부르주아 계층이지만, 이들 사이에서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함께 앉아 있지만, 서로 이상하게 소외되어 있는 듯하다. 그림 전체는 독특하게 불타는 오렌지와 메스꺼운 초록색을 대비시켜 이색적이면서도 역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그림에는, Auguste-Renoir 어거스트 렌와의 그림들에서 찾을 수 있는 빛과 색깔의 조화란 없다. 만약 렌와가 색깔로서 화음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툴루스-라트렉은 반대로 색의 비조화를 겨냥한 듯하다. 절대로 즐기기 편안한 빛의 심포니는 아니지만, 이런 팔레트를 사용하므로서 그는 자기가 표현하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한다 ─ 그의 캔버스 속 인간들은 모두 외롭고 추해 보인다. 물랑루즈의 화려한 쇼들과 타락한 성생활의 즐거움 속에 녹아있는 물질주의 사회의 덧없음과 추악함을, 이 화가는 난폭한 색들과 거친 선의 사용으로서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툴루스-라트렉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요즘 괜히 이 그림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그가 세상에 느꼈던 비슷한 울분을 나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네와 렌와가 표현하는 세상은 아름다운 색의 화음으로 넘쳐나지만,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생각도 없지 않다. Impressionists,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은 일부러 산업 시대의 추악한 면을 보여줄 만한 주제들을 피하고는 했다. 그들의 그림은 부르주아 계층이 공원에서 즐기는 레저와 독서하는 여인들, 오페라 감상 등의 주제로는 넘쳐나지만, 산업 사회에서 비참한 보수를 받으며 노동하는 자들과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에 대한 표현은 없다.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현실의 더러운 면을 그리기를 거부했다. 반대로 툴루스-라트렉은 모네, 렌와, Morisot 모리소, Pisarro 피자로 등이 거부한 추악함에 눈을 돌렸고, 이 주제에 Impressionism의 기본 철학을 섞어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추악한 주제를 자신이 느낀대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인상주의의 기본 목적이 아닌가!) 툴루스-라트렉은 내 공감을 이끌어냈다. 비록 그의 스타일은 사실주의와 동떨어져 있을 지 모르지만, 동시에 그의 표현은 명품으로 휘감은, 고상한 척하는 자들의 더러움과 공허함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내가 세상을 향해 눌러두고 있던 울분을 폭발시킬 정도의 힘이 있었다.
(... 물질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돈의 중요성을 무시할 없는 현실. 따라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명문대라는 타이틀과 좋은 성적, 그리고 경력을 요구하는 사회. 때문에 이 경제난 속에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입학하고서도 경쟁 속에서 왜 공부를 하고 있는 지조차 모르고 있는 대학생들... 그리고 그 무리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할 권리조차 없는 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멍청해 지고 있는 느낌이지만, 때로는 왜 공부를 하고 있는 지조차도 잊고 밤새워 페이퍼를 쓰고 시험들을 준비한다.
...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미소를 짓는 미국인들의 버릇을 위선으로 간주한다. 마음 속에서는 그 미소의 진위 여부를 내 멋대로 분석하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의 표정도 익숙하게 훈련된 미소로서 굳어져 있다. 결국은 나도 사회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위선의 가면을 벗기를 거부한다.
... 로스쿨에 진학하겠다는 또래 학생들의 의향이 무엇일까 시니컬한 웃음을 흘린다. 결국 너도 돈에 미친 거겠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정말로 법에 열정이 있어서 로스쿨에 가겠다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의심한다. 그러면서도 죽고 있는 저널리즘 산업에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내 밥벌이가 걱정되어서다. 내가 돈을 바라고 법에 뛰어드는 다른 학생들과 무엇이 다른가.)
점점 더 알아갈수록 추악해 보이는 사회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 추악함에 물들어 가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 그렇기에, 툴루스-라트렉의 그림 속 귀부인 얼굴에 도는 역겨운 푸른 빛은, 그가 나의 초상을 그렸어도 그대로 나타났을 것이다 ─ 나도 결국은 그들처럼 속물에 불과하니까. 툴루스-라트렉은 비관의 안경을 쓴 화가가 아니었다. 다만 눈앞에 놓인 추악한 진실을 미화시키지 않을 화가이기에, 그리는 상대가 철없는 20살 소녀라도 절대로 관용이나 아량을 베풀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물랑루즈에서... "당신도 나도 속물에 불과하니까."
At the Moulin Rouge, by Henri de Toulouse-Lautrec.
Toulouse-Lautrec 툴루스-라트렉은 세상이 위선과 이중인격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던 미술가였다. 자신이 가진 장애 때문에 사람들이 보내는 동정의 눈길과 차별에 진저리를 느낀 그는 물랑루즈로 발걸음을 돌렸다. 돈만 내면 불구자, 정상인 상관 없이 동등하게 대해주는 그곳 창녀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낀 그는 이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까지 이르렀다. 머리 장식으로 귀부인과 창녀, 노동자 등의 계층을 구분하던 1800년대 후반, 이 화가는 이 그림 속에서 그들이 모자와 헤드기어들을 불분명하게 처리함으로서 "귀부인이나 창녀들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속물들일 뿐..."하는 메세지를 시시하고자 한 듯하다. 그림 표면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있는 귀부인의 얼굴을 시체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음침한 푸른색으로 처리한 것도, 1890년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 아닐까. 그녀의 얼굴은 구역질 날 정도의 불쾌함과 음침함으로 빛난다. 그녀 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옷을 잘 빼입은 부르주아 계층이지만, 이들 사이에서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함께 앉아 있지만, 서로 이상하게 소외되어 있는 듯하다. 그림 전체는 독특하게 불타는 오렌지와 메스꺼운 초록색을 대비시켜 이색적이면서도 역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그림에는, Auguste-Renoir 어거스트 렌와의 그림들에서 찾을 수 있는 빛과 색깔의 조화란 없다. 만약 렌와가 색깔로서 화음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툴루스-라트렉은 반대로 색의 비조화를 겨냥한 듯하다. 절대로 즐기기 편안한 빛의 심포니는 아니지만, 이런 팔레트를 사용하므로서 그는 자기가 표현하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한다 ─ 그의 캔버스 속 인간들은 모두 외롭고 추해 보인다. 물랑루즈의 화려한 쇼들과 타락한 성생활의 즐거움 속에 녹아있는 물질주의 사회의 덧없음과 추악함을, 이 화가는 난폭한 색들과 거친 선의 사용으로서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툴루스-라트렉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요즘 괜히 이 그림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그가 세상에 느꼈던 비슷한 울분을 나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네와 렌와가 표현하는 세상은 아름다운 색의 화음으로 넘쳐나지만,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생각도 없지 않다. Impressionists,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은 일부러 산업 시대의 추악한 면을 보여줄 만한 주제들을 피하고는 했다. 그들의 그림은 부르주아 계층이 공원에서 즐기는 레저와 독서하는 여인들, 오페라 감상 등의 주제로는 넘쳐나지만, 산업 사회에서 비참한 보수를 받으며 노동하는 자들과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에 대한 표현은 없다.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현실의 더러운 면을 그리기를 거부했다. 반대로 툴루스-라트렉은 모네, 렌와, Morisot 모리소, Pisarro 피자로 등이 거부한 추악함에 눈을 돌렸고, 이 주제에 Impressionism의 기본 철학을 섞어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추악한 주제를 자신이 느낀대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인상주의의 기본 목적이 아닌가!) 툴루스-라트렉은 내 공감을 이끌어냈다. 비록 그의 스타일은 사실주의와 동떨어져 있을 지 모르지만, 동시에 그의 표현은 명품으로 휘감은, 고상한 척하는 자들의 더러움과 공허함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내가 세상을 향해 눌러두고 있던 울분을 폭발시킬 정도의 힘이 있었다.
(... 물질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돈의 중요성을 무시할 없는 현실. 따라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명문대라는 타이틀과 좋은 성적, 그리고 경력을 요구하는 사회. 때문에 이 경제난 속에서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입학하고서도 경쟁 속에서 왜 공부를 하고 있는 지조차 모르고 있는 대학생들... 그리고 그 무리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을 비판할 권리조차 없는 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멍청해 지고 있는 느낌이지만, 때로는 왜 공부를 하고 있는 지조차도 잊고 밤새워 페이퍼를 쓰고 시험들을 준비한다.
...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미소를 짓는 미국인들의 버릇을 위선으로 간주한다. 마음 속에서는 그 미소의 진위 여부를 내 멋대로 분석하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의 표정도 익숙하게 훈련된 미소로서 굳어져 있다. 결국은 나도 사회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위선의 가면을 벗기를 거부한다.
... 로스쿨에 진학하겠다는 또래 학생들의 의향이 무엇일까 시니컬한 웃음을 흘린다. 결국 너도 돈에 미친 거겠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정말로 법에 열정이 있어서 로스쿨에 가겠다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의심한다. 그러면서도 죽고 있는 저널리즘 산업에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내 밥벌이가 걱정되어서다. 내가 돈을 바라고 법에 뛰어드는 다른 학생들과 무엇이 다른가.)
점점 더 알아갈수록 추악해 보이는 사회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 추악함에 물들어 가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 그렇기에, 툴루스-라트렉의 그림 속 귀부인 얼굴에 도는 역겨운 푸른 빛은, 그가 나의 초상을 그렸어도 그대로 나타났을 것이다 ─ 나도 결국은 그들처럼 속물에 불과하니까. 툴루스-라트렉은 비관의 안경을 쓴 화가가 아니었다. 다만 눈앞에 놓인 추악한 진실을 미화시키지 않을 화가이기에, 그리는 상대가 철없는 20살 소녀라도 절대로 관용이나 아량을 베풀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