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주차 기본정훈 6·25전쟁과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
변함없는 북한의 침략야욕 강한전사 강한군대로 분쇄해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37개월 동안 계속되어 전 국토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또 북한은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가원수의 암살을 기도하는가 하면 무장공비 침투, 항공기 테러 등 2800여 회에 이르는 각종 대남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Ⅰ.북한의 불법남침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T-34탱크 등 최신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10개 사단을 38선 전(全) 전선에 걸쳐 투입하는 기습 남침을 개시하였다. 우리 국군은 사력을 다해 용감히 싸웠으나 전력의 열세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또한 전쟁개시 1개월여 만에 북한군에게 대구와 부산·경남 지역만을 남기고 전 국토를 점령당했다.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연전을 펴면서 반격작전을 준비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반격전은 시작되었다. 국군은 북진을 거듭, 압록강변 초산과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6월 15일 유엔군은 문산~철원~김화~간성을 잇는 선에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거듭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6·25전쟁은 같은 민족 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쓰라린 비극이었다. 국군과 유엔군 17만8000명이 전사하고 55만5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8만2000여 명이 실종되었다. 또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학살·부상·납치·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뿐만 아니라 8343명의 군인들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다가 3차례의 포로교환(제1차 : 1953. 4. 20∼5. 3. 471명, 제2차 : 1953. 8. 5∼9. 6. 7862명, 제3차 : 1953. 12. 23∼1954. 1. 23. 10명) 시에 생환되었다. 현재 북한이탈주민 및 귀환포로 등의 진술을 바탕으로 북한에 생존 중인 국군포로는 56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Ⅱ.6·25전쟁 이후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
1960년대에도 북한은 1960년 8·15 경축대회에서 김일성이 연방제를 제의하는 등 위장평화공세를 전개하며 한편 군사적 도발을 지속적으로 자행하였다.1968년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침투했던 1·21 청와대 기습사건,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그리고 무장공비 120여 명을 침투시켜 양민을 학살한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 등이 60년대의 대표적인 도발 사례다.
1970년대에는 남북간 대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나, 북한의 화전(和戰) 양면전술은 지속되었다. 1971년 8월 우리 측이 남북 적십자회담을 제의한 이듬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남북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이 시기에 북한은 기습남침을 위한 땅굴을 파 내려오기 시작했다. 1974년 11월 서부전선의 고랑포 일대에서 제1땅굴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철원·파주·양구 등 네 곳에서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었다.
또 1975년 10월 노동당 창건 30돌 기념대회에서 남북 군대를 10만 명으로 감축하자고 제의한 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 절단작업을 하던 유엔군 경비병들에게 도끼를 휘두른 이른바 8·18도끼 만행사건을 저질렀다.
1987년 11월 11일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이름으로 서울 올림픽 동시 개최, 무력충돌 방지와 긴장완화를 위한 긴급조치 강구 등을 포함한 ‘민족단합 5개 항’을 발표하였으나 며칠도 채 지나기 전인 11월 19일에 KAL 858기를 공중 폭파시켜 115명의 인명을 앗아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구소련과 동구권 등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극심한 경제난, 남한과의 국력차 심화 등에 직면하였다. 이에 북한은 국제적인 고립해소와 경제적 실리 획득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90년 한·소 수교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 하에서도 변함없이 대남혁명 전략을 추진해 왔다.
1994년 3월 제8차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에서 ‘서울 불바다’ 협박을 하며 회담을 중단시키는가 하면 북한 해군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수시로 월경하는 도발을 하였다.
특히 1996년 9월 18일 북한 무장간첩 26명이 잠수함(300t 이상으로 어뢰발사 능력이 있으며 작전지속 능력이 길다)을 이용, 강릉해안에 침투한 것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소 떼 방북, 장관급 회담 등 ‘교류·협력·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6월 22일 속초 인근으로의 잠수정 침투, 7월 12일 동해시 앞바다에 무장간첩 침투 등 잠수함·잠수정을 이용한 연이은 도발을 자행함으로써 그들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또 1999년에는 남북 고위급 정치회담과 차관급회담 개최를 합의해 놓고 6월 15일 서해상에서는 무력도발(제1연평해전)을 자행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돼 가고 있는 상황에서 2001년 6월 북한 선박이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등 북한 함정이 매년 20여 차례 NLL을 월선, 침범하였다.
그런가 하면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3, 4위전이 열리는 날 우리 해군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참수리 357호정 정장 윤영하 소령 외 5명을 전사하게 한 제2연평해전 도발 등 북한은 기회만 있으면 군사적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Ⅲ.포괄안보를 구현하는 국방태세 확립
아직도 북한은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난 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실험, 미사일 발사 책동, 선군정치 등을 지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북한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고 한반도에서 제2의 6·25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확고히 해야 한다.
첫째, 우리 군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즉각 대응하여 현장에서 완전작전을 수행토록 준비하고 북한의 위협은 물론 모든 스펙트럼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전방위 태세를 확립하여 포괄안보를 구현해야 한다.
둘째, 북한의 군사위협뿐만 아니라 테러·재해·재난 등의 비군사적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유사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결할 수 있는 민·관·군 통합방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 군 장병은 유사시 생명을 담보로 전투임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평시 투철한 국가관, 안보관(대적관) 및 필승의 군인정신으로 무장돼 있어야 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베제티우스의 명언, “천하가 아무리 평안하다고 해서 전쟁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롭다”(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사마양저(司馬穰 )의 경구가 새삼 의미 있게 느껴지는 시기이다.
제10주차 기본정훈 6·25전쟁과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 (제9과)
제10주차 기본정훈 6·25전쟁과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 변함없는 북한의 침략야욕 강한전사 강한군대로 분쇄해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37개월 동안 계속되어 전 국토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또 북한은 휴전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가원수의 암살을 기도하는가 하면 무장공비 침투, 항공기 테러 등 2800여 회에 이르는 각종 대남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Ⅰ.북한의 불법남침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T-34탱크 등 최신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10개 사단을 38선 전(全) 전선에 걸쳐 투입하는 기습 남침을 개시하였다. 우리 국군은 사력을 다해 용감히 싸웠으나 전력의 열세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또한 전쟁개시 1개월여 만에 북한군에게 대구와 부산·경남 지역만을 남기고 전 국토를 점령당했다.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연전을 펴면서 반격작전을 준비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반격전은 시작되었다. 국군은 북진을 거듭, 압록강변 초산과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6월 15일 유엔군은 문산~철원~김화~간성을 잇는 선에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거듭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6·25전쟁은 같은 민족 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쓰라린 비극이었다. 국군과 유엔군 17만8000명이 전사하고 55만5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8만2000여 명이 실종되었다. 또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학살·부상·납치·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뿐만 아니라 8343명의 군인들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다가 3차례의 포로교환(제1차 : 1953. 4. 20∼5. 3. 471명, 제2차 : 1953. 8. 5∼9. 6. 7862명, 제3차 : 1953. 12. 23∼1954. 1. 23. 10명) 시에 생환되었다. 현재 북한이탈주민 및 귀환포로 등의 진술을 바탕으로 북한에 생존 중인 국군포로는 56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Ⅱ.6·25전쟁 이후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
1960년대에도 북한은 1960년 8·15 경축대회에서 김일성이 연방제를 제의하는 등 위장평화공세를 전개하며 한편 군사적 도발을 지속적으로 자행하였다.1968년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침투했던 1·21 청와대 기습사건,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그리고 무장공비 120여 명을 침투시켜 양민을 학살한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 등이 60년대의 대표적인 도발 사례다.
1970년대에는 남북간 대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나, 북한의 화전(和戰) 양면전술은 지속되었다. 1971년 8월 우리 측이 남북 적십자회담을 제의한 이듬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남북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이 시기에 북한은 기습남침을 위한 땅굴을 파 내려오기 시작했다. 1974년 11월 서부전선의 고랑포 일대에서 제1땅굴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철원·파주·양구 등 네 곳에서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었다.
또 1975년 10월 노동당 창건 30돌 기념대회에서 남북 군대를 10만 명으로 감축하자고 제의한 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 절단작업을 하던 유엔군 경비병들에게 도끼를 휘두른 이른바 8·18도끼 만행사건을 저질렀다.
1987년 11월 11일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이름으로 서울 올림픽 동시 개최, 무력충돌 방지와 긴장완화를 위한 긴급조치 강구 등을 포함한 ‘민족단합 5개 항’을 발표하였으나 며칠도 채 지나기 전인 11월 19일에 KAL 858기를 공중 폭파시켜 115명의 인명을 앗아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구소련과 동구권 등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국제적 고립과 극심한 경제난, 남한과의 국력차 심화 등에 직면하였다. 이에 북한은 국제적인 고립해소와 경제적 실리 획득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90년 한·소 수교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 하에서도 변함없이 대남혁명 전략을 추진해 왔다.
1994년 3월 제8차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에서 ‘서울 불바다’ 협박을 하며 회담을 중단시키는가 하면 북한 해군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수시로 월경하는 도발을 하였다.
특히 1996년 9월 18일 북한 무장간첩 26명이 잠수함(300t 이상으로 어뢰발사 능력이 있으며 작전지속 능력이 길다)을 이용, 강릉해안에 침투한 것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소 떼 방북, 장관급 회담 등 ‘교류·협력·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6월 22일 속초 인근으로의 잠수정 침투, 7월 12일 동해시 앞바다에 무장간첩 침투 등 잠수함·잠수정을 이용한 연이은 도발을 자행함으로써 그들의 이중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또 1999년에는 남북 고위급 정치회담과 차관급회담 개최를 합의해 놓고 6월 15일 서해상에서는 무력도발(제1연평해전)을 자행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돼 가고 있는 상황에서 2001년 6월 북한 선박이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등 북한 함정이 매년 20여 차례 NLL을 월선, 침범하였다.
그런가 하면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3, 4위전이 열리는 날 우리 해군함정을 기습 공격하여 참수리 357호정 정장 윤영하 소령 외 5명을 전사하게 한 제2연평해전 도발 등 북한은 기회만 있으면 군사적 도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Ⅲ.포괄안보를 구현하는 국방태세 확립
아직도 북한은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난 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실험, 미사일 발사 책동, 선군정치 등을 지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북한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고 한반도에서 제2의 6·25와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확고히 해야 한다.
첫째, 우리 군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즉각 대응하여 현장에서 완전작전을 수행토록 준비하고 북한의 위협은 물론 모든 스펙트럼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전방위 태세를 확립하여 포괄안보를 구현해야 한다.
둘째, 북한의 군사위협뿐만 아니라 테러·재해·재난 등의 비군사적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유사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결할 수 있는 민·관·군 통합방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 군 장병은 유사시 생명을 담보로 전투임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평시 투철한 국가관, 안보관(대적관) 및 필승의 군인정신으로 무장돼 있어야 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베제티우스의 명언, “천하가 아무리 평안하다고 해서 전쟁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롭다”(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사마양저(司馬穰 )의 경구가 새삼 의미 있게 느껴지는 시기이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2009.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