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의 창간 비밀과 오늘

cowo200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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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와세다대학 영문과와 도쿄외국어대학 러시아문학과를 몇 개월씩만 다니다가, 성적과 학비 문제가 겹쳐 그만둔 진학문(秦學文)은 국내에 들어와 할 일을 찾던 중, 최남선의 추천으로 매일신보에 입사하게 된다. 몇 달 후 경성일보에서 그에게 좋은 처우를 제시하자, 그는 곧장 수락하고 직장을 옮긴다. 매일신보도 그렇지만 경성일보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관제 언론이었다.

진학문은 경성일보 사장 아베의 신임을 얻게 된다. 아베는 진학문을 '쓸모가 많은 조선인'으로 점찍은 것이다. 그는 진학문을 아사히 신문에 입사시켜 언론계 경력을 쌓게 만든다. 진학문은 아사히 신문 경성지국에 근무하면서 총독부와 산하 각급 기관을 출입하며 식민지 통치 세력에 유착한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은 차라리 백수로 지낼지언정, 일제의 어용신문에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치욕으로 여기고 있던 때였다.

부임 길에 남대문에서 흰옷 입은 조선 노인 강우규에게 폭탄을 맞아 간이 떨어질 뻔했던 신임 식민지 총독 사이토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조선인에게 언론.출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발표한다. 그는 개량주의 민족세력을 육성하여 총독부의 감시권 내에 두면서, 골수 민족 세력과 분열, 대립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총독이 조선인이 사주가 되는 신문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의 의도를 간파한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하지만 총독은 언론인과 언론 지향 지식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있게 일을 추진했다. 총독은 민원식에게 시사신문을, 송병준에게 조선일보를 인가해 준다. 그러자 주위의 우려가 다소 가라앉았다. 민과 송의 친일 성향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총독은 아무도 모르게 제3의 신문 창간을 기획하고 있었다. 총독은 동아일보 창간만은 극비리에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야 관제 신문이 아닌 것처럼 보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총독은 경성일보 사장 아베를 만나 제3신문 창간 극비 프로젝트의 지휘를 맡겼다. 아베는 '쓸모 있는 조선인' 진학문을 불러 지나가는 투로 말한다.
"진 기자, 관제가 아닌 민간신문을 하나 만들어 보지. 그것도 조선 민족 세력이 주체가 되는 신문 말일세."
"총독부에서 허가해 줄 리가 없지요."
"아, 그런가?"
아베는 더 이상 신문 창간 얘기를 하지 않고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사무실로 돌아온 진학문은 점심도 거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베 말대로 민족주의 색채를 띠는 신문 하나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을 보장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유일한 민족신문이라고 하면 독자를 확보하기가 너무도 쉬울 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총독부의 인가를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아베가 자기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일종의 싸인이었다고 봐야 했다.(중략)

진학문은 다음 날 아침 아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제가 민족신문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도와주시렵니까?"
"이 사람아! 내 도움을 받고 만드는 신문이 무슨 민족신문인가?"
"그렇군요."
"알았으면 자네가 직접 인가신청서를 내 봐라."
송수화기를 놓은 진학문은 희열에 휩싸여 들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하기가 어려워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민간지 창간이라는 황금 거위를 낚은 진학문은 최두선을 통해 자금주로 김성수를 소개받는다.
마침내 1920년 4월 조선민족지를 표방하는 동아일보가 창간된다.
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문화주의'와 '연맹주의'를 내걸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총독부는 시정방침으로 '문화정치'와 '세계주의'를 강조하고 있던 때였다.(이상은 김갑수의 졸작 팩션 <중경에서 오는 편지> 중 일부)

진학문은 동아일보의 정경부장 겸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을 맡고 상해로 가 이광수를 영입한다. 해방 후에도 진학문은 언론계 큰손으로 행세하며 대한석탄공사사장 등의 경제 요직을 맡았다. 이렇게 동아일보는 태생부터 위장민족지였다. 위장민족지는 노골친일지보다 더 민족에게 큰 피해를 준다.

최근 동아일보의 모습은 한 마디로 측은하다. '노추'란 말을 신문에도 쓸 수 있다면 동아일보의 모습은 노추의 전형이다. 동아는 김영삼이나 김수환보다 더 추하게 늙어가고 있다. 역시 태생적 한계 때문일까?

어제 김대중의 발언만 해도 그렇다. 김대중은 한미정상회담에 맞춰 한국 대통령을 지원하는 발언을 해 주었다. 미국 일부 네오콘과 일본 극우 보수가 문제라는 김대중의 발언은 그들의 입지를 축소시키려는 외교적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또한 북한의 미사일은 미국의 무기에 비하면 애들 장난감이라는 말도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발언인가? '미국아! 너희의 똥속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말이지 않은가? 이런 말은 노무현이 부시의 면전에서 하기 어려운 것을 그가 대신 해 준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북한 강경파에 대한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또한 정권이 밉더라도 국익을 생각하자는 발언에도 진정성과 시의적절성이 함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노무현과 김정일에게 빨리 정상회담을 하라고 권유했다.

- DJ가 갑자기 미, 일 때리고 北. 盧 감싸는 이유 뭔가

동아일보의 사설 제목이다. 한토마의 어떤 논객은 그 사설이 보기 좋았던지 펌 게시글로 올려 놓은 것을 보았다. 답답하고 안타까웠다.이게 어디 대한민국 신문의 사설인가? 이런 것은 일본 극우나 취할 수 있는 관점이고 주장이다. 역시 동아는 조선총독부의 신문답다. 게다가 동아는 모든 혼란이 햇볕정책에서 시작되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웬 미국학자를 등장시켜 작통권 환수를 또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아일보의 공로를 잊지 않는다. 특히 박정희 군부독재와 대립각을 세우던 동아일보는 세계적으로 매혹적인 언론이었다. 김중배, 최일남 등의 정의롭고 날카로웠던 칼럼들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랑으로 여겼던 동아일보의 저항과 광고 탄압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때 나는 학생이었는데 세종로 5층 낡은 건물 동아일보사에 가 성금을 낸 애틋한 추억이 있다. 기자인 듯한 분이 나와 미소를 띠며 나에게 작은 깃발 하나를 주었다. 거기에는 푸른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그런데 나는 오늘 유감스럽게도 산 이름이 바뀌어 버린 제목의 글을 쓰고 싶다.

- 동아, 너 영원한 사화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