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복 편 지 13

수호천사2006.10.10
조회475

행 복 편 지 13

 

 

 

 

 

 

 

 

『바다는 아직도 멀다.』 - 손현숙(1951~ ) -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알의 세계에서 깨어난 새끼 바다거북 본능은 빛과 소리 쪽으로 촉수를 세운다. 소금 젖은 밤바람이 모랫길을 헤친다. 기억을 담았던 기억없는 생각들. (중략) 눈도 뜨지 못한 새끼 바다거북 바다를 향해 가는 죽음은 삶처럼 집요하다. '바다는 아직도 멀다' 부분

 

 

 

생존 본능이라고들 하지. 눈도 못 뜬 새끼 바다거북이 바다를 향해 가는, 죽음을 불사하는 생존 본능, 갓 태어난 신생아가 눈도 뜨기 전에 입으로 엄마의 젖가슴을 찾는 치열한 생존 본능, 모성만이 안 놓치고 시로 빚어낸 시인은 이미 성모(聖母)의 근처에 다가있었구나. - 유안진<시인> -

 

 

 

 

 

 

 

『오해』 - 이장욱(1968~ ) -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상 위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온 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껴 갈 것이다. '오해' 부분

 

 

 

오해 받으면 좋아하고 싶은데-, 하느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오해되시지. 신들은 줄곧 오해만 받아, 신학박사도 계속 쏟아질 수 있고, 그래서 생계도 꾸려지는 것, 창세 이래 신들의 이름으로 서로 죽이고 빼앗는 전쟁이 신들을 오해한 결과가 아니랴. 시인이 받는 오해란 신들의 경지에 가까워진다는 증거도 되리니, 나보다 누가 나를 더 오해하랴. - 유안진<시인> -

 

 

 

 

 

 

 

『속삭임』 - 장석남(1965~ ) - 솔방울 떨어져 구르는 소리 가만 멈추는 소리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 새벽달 깨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감이 떨어져 잠든 도야지를 깨우듯 내 발등을 서늘히 만지고 가는 먼 먼, 머언 속삭임들 '속삭임'전문

 

 

 

시인의 귀는 만리 밖까지 뻗쳐진 당나귀 귀다. 천상의 음악을 들어내고 지하에서 용암이 들끓는 소리도 들어낸다. 그런 청각으로 솔방울 굴러가는 소리, 바람을 쫓아내는 가랑잎 소리, 감홍시 떨어지는 소리에 돼지 낮잠 깨는 소리가 왜 안 들리랴. 임금님 귀만 당나귀 귀가 아니다. 시인의 귀야말로 당나귀 귀다. 온몸이 귀인지도 모른다. - 유안진<시인> -

 

 

 

 

 

 

 

『우기(雨期)』 - 김유선(1948~ ) - 장마는 길었다 장마가 끝나고도 여자의 빈집 속으로 긴 빗줄기가 숨어 들어갔다 물은 합치고 번져 숨어 있던 눈물을 모두 끌어냈다 십년 전 눈물까지 합류해 여자의 집 속에 홍수가 범람했다 보이지 않는 곳의 담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기(雨期)' 부분

 

 

 

일생이 우기인 사람들, 젊은 한 시절이 장마철인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의 보이지 않는 보루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지. 안 들리는 소리가 더 무섭고 더 크고 요란하지. 어찌 십년 전의 눈물까지랴. 앞으로 울어 살 눈물까지도 합류한 홍수를 얼마나 자주 치러내야 우기가 끝날 것인가. - 유안진<시인> -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박찬일(1955~ ) - 베란다에서 깍깍거리는 까치 두 마리. 수리산 공터에서 깍깍거리는 까치 두 마리. 모두 네 마리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세 마리라네. 한 마리가 수리산 까치와 깍깍 베란다 까치와 깍깍, (중략) 한 마리가 두 마리라네. 베로니카라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부분

 

 

 

까치소리에서 태어난 절창. 울음이 또 다른 울음을 불러내고, 잊었던 울음과 앞으로 울어야 할 울음까지 앞당겨 울어내는 사람이 있었지. 박용래 시인이셨지. 베로니카였을까. 수리산 까치였을까. 이중 삼중의 울음을 울어내는 시인들의 여성성! 정치나 경제·군사에 비하면 문학은, 특히 시야말로 여성성이며 따라서 시인도 여성적이고-. - 유안진<시인> -

 

 

 

 

 

 

 

『땡감』 - 이은봉(1953~ ) - 한자로 쓰면 청(靑)?, 우리말로 쓰면 땡감 땡감은 내 어릴 적 짓궂은 별명이었다. 한때는 나도 저처럼 시고 떫은 적 있거니 지금은 붉게 익어, 온통 말랑말랑해졌지만. '땡감' 전문

 

 

 

땡감, 땡전 한푼, 땡초…. 땡이라는 말이 들어간 단어는 다 좋아. 나도 땡감인 시절이 있어, 생전 변하지도 늙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물컹 홍시가 되었는가 지금은? 아직도 땡감 같은 철없는 무엇들이 너무 많은 나도 낙목(落木) 한천(寒天)에 높이 달린 붉은 말랑감이 되고 싶다. - 유안진<시인> -

 

 

 

 

 

 

 

『돌아가는 길』 - 문정희(1947~ ) -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돌아가는 길' 부분

 

 

 

평생 돌을 깨어 불상을 만든 이의 뒤늦은 대오(大悟) 대각(大覺), 태어난 그대로가 부처님이셨던 줄을 몰라 숱한 부처님을 깨부수어 아닌부처로 만들고 나서야 깨닫는다고들 하지, 눈·코·입·귀 다 뭉그러지는 수천세월을 아닌부처로 견뎌내고서야, 본래의 참부처로 돌아가는 인각사 뜰의 석불 한 분과 무슨 얘기를 주고 받아 이런 경지에 다다랐을까, 이 시인은? - 유안진<시인> -

 

 

 

 

 

 

 

『네잎 클로버』 - 홍은택(1958~ ) - 척박한 토양에 태어나는 기형아다. 세 잎의 군중 속에서 네 잎을 고집하는 행운은 생의 돌연변이다. 후미진 담벼락 귀퉁이 어딘가 가린 얼굴로 시침을 떼고 있다. 두 눈에 핏발 세워 찾으면 없다 짐짓 무심한 듯 주변을 빈둥거리다. 돌연 곁눈질로 시선을 던지면. '네잎 클로버' 부분

 

 

 

행운이란 돌연변이라고? 이 얼마나 기막힌 직관이고 통찰인가! 찾으려면 안 보이고, 마음 비운 무심한 눈길을 기다려 붙잡고 나타나는 게 행운이란다. 행운이라는 기형(畸形)을 위하여, 기형이라도 좋은 행운을 위하여, 두 귀 모두 잘라버릴까? 코라도 베어버릴까? - 유안진<시인> -

 

 

 

 

 

 

 

『켄터키후라이드 치킨』 - 김우연(1959~ ) - 가시내 서넛이 셀로판 뚜껑에 일제히 대롱을 꽂는다 십자가를 그으며 처녀막이 터지듯 반도의 신음이 재잘대는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한·미 합동훈련 중인 미군 탱크의 포신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흔들면 흔들수록 늪이 깊은 하늘을 인자한 켄터키 할아버지가 안경을 쓰고 들여다보고 있다. '켄터키후라이드 치킨' 부분

 

 

 

우리의 아픔이다. 최대한 객관화하려 애쓴 시인의 고통이 늪 깊은 하늘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셔온 콜라며, 중독된 켄터키 치킨 맛이 입 안에 새삼스러워, 벌겋게 달아오르는 두 눈에 안경을 걸치니 켄터키의 할아버지가 선하다. 슬퍼서 아파서 슬프고 아프게 살아야 하는 시인의 의식이여! - 유안진<시인> -

 

 

 

 

 

 

 

『풍경』 - 조창환(1947~ ) - 풍경이 슬그머니 일어나 엉덩이 털며 돌아설 때 침 묻은 포도알 하나 굴러 밟힌다. 체액 많은 에일리언처럼 낯설다. 풍경이 몸을 둥글게 말고 허공을 밀쳐본다 꽃 떨어진 자리다. '풍경' 부분

 

 

 

수도원 가는 길로 읽힌다. 저만치 보이는 수도원 풍경만 같다. 둥굴게 몸을 말고 허공을 밀쳐보는 풍경에서 수도승 같은 시인의 먼 모습 또한 풍경을 더욱 풍경이게 한다. 꽃 떨어진 자리라니, 사람보다 더 꽃다운 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 지나간 바로 그 자리, 겨울풍경이여. - 유안진<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