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세계(접근1)

조셉2003.03.27
조회59

현재는 언제나 그렇듯 제 것을 최고라고 오해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지만

 

현재 속에 흐르는 시간은 자만하는 세월을 가만히 놔두지 않게 마련이다.

 

때는 말 없는 마차와 연기를 내뿜는 기차가 이미 일상 속에서 사람의 발

 

이 되어 주었고 날개 달린 비행기의 발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동력과

 

신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덕분에 여행자들은, 이동 과정 중에 발생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80일 간의 세계 여행은 더

 

이상 꿈과 환상에만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 이동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세

 

상은 점점 작아져 갔고 그에 따른 공간의 개념도 계속 바뀌어 갔다. 그 변

 

화의 시절 한가운데에서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마스터와 나는 낯선 도시에서 잠시 머물렀다. 망망대해 위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사물과 사람들이 복잡하게 들어선 도시의 한 중심에서 말끔히 사

 

라졌다. 그 해방감은 막연히 땅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

 

고 적당히 둘러싸인 공간에 길들여진 습성에 기인한 탓일 수도 있었다. 아

 

무튼 낯선 도시는 두 이방인을 아늑한 품으로 받아들였다.

 

  낯선 것은 참을 수 없는 순수한 본능을 일깨우기 마련인지라 나는 욕심

 

가득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순진한 행동은 낯선 도시를 대

 

하는 일종의 반가움의 표시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도시가 넓은 집(*르

 

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알베르티는 도시를 <넓은 집>이라고 정의했다.)이라

 

면 그 풍경이 그리 낯설 것도 없었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 속에서 느끼는

 

낯설음이 정작 내 시선을 이끌었다. 늘 보아 왔던 군중들과 그들이 서 있

 

는 돌 깔린 거리 바닥, 거리 위에 늘어선 고풍스런 건물들과 밤을 기다리

 

는 가스등, 건물에 입혀진 가지각색의 입구와 창문, 입구 속을 파고드는

 

검은 그림자, 창문 위에 널려진 빨래, 나이 먹어 때묻은 벽돌과 기둥 그리

 

고 돌림띠(*Stringcourse. 건물 정면에 돌출시켜 설치한 수평의 석조나 벽

 

돌 띠.),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나는 도시의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속

 

에 스며든 시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내 탐욕스런 시

 

선은 빛의 풍경에만 그치지 않고 해가 떨어져 그림자로 변하는 도시의 모

 

습까지 그려 보았다. 한낮의 열기를 내쫓는 열린 창문 사이로 불빛들이 하

 

나둘 꺼지고, 인적 드물어진 거리를 채우기 위해 가스등이 하나 둘 켜져

 

밤의 도시는 달빛의 소네트에 젖어들고, 낮 동안 벌어진 인간의 소란과 흥

 

분은 어둠 속에 묻힌 채 그들은 꿈의 세계로 빠져들리라.

 

  그 가운데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낯선 것도 눈에 밟혔다. 도시 한복판

 

에 서 있는 그것은 주변 공간을 압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높

 

이를 가진 오벨리스크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새장처

 

럼 가느다란 뼈대들로 구성된 철탑이기도 했다. 그 생김새는, 지면에서

 

네 개의 철 기둥이 곡선의 형태로 수렴하다가 중간 높이에서는 하나의 기

 

둥으로 합쳐졌으며 하부는 네 개의 반원 아치가 네 기둥을 서로 끌어 당

 

겨 주는 안정된 구조를 취했고 꼭대기는 마치 신사용 모자가 얹어진 것 같

 

았다. 오벨리스크가 인간의 이상과 활동을 상징하는 기념비이자 후대에 남

 

겨질 유산으로서 건설된 피라미드라고 한다면 그 철탑이 상징하는 것은 무

 

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눈에 그것은 기념비나 건축물이라기보다

 

는 하나의 거대하고 흉측한 괴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애써 내 시

 

선을 그 괴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서도 눈에

 

부딪혀 나를 당혹하게 했다.

 

  마스터에게서는 들뜬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스터의 정

 

적인 모습에 대한 이유를 한 가지 찾는다면, 그분은 많은 여행을 경험했다

 

는 사실이었다. 그분이 겪은 여행의 전말을 소상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내

 

게 세상의 이곳저곳에 발자취를 남겼던 경험담과, 자연과 건축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들려주었던 사실을 미루어 보면, 대략 그 여행길의 궤적을 가

 

늠할 수가 있었다. 아시아의 섬나라에서 본 불교 사원, 영원불멸의 신비

 

를 간직한 이집트 피라미드, 지중해 도시에서 바라본 쪽빛 바다와 눈부시

 

게 하얀 신전, 불멸의 제국으로 탄생하여 지금은 영원히 잠들어 버린 남

 

쪽 도시, 요한이 성배를 숨겼다는 섬나라의 언덕, 지명도 모르는 숲 속에

 

서 만난 농부의 집에 대한 그분의 여행담은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샘솟

 

는 원천이 됐을 뿐 아니라, 그분의 창조적 영감과 사유의 과정으로 이어

 

져 건축을 이루는 선(線)이 되었다. 그런 마스터에게서, 처음 바다를 건

 

넌 소년의 들뜬 행동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분은 벌써 목적지에 가 있는지도 몰랐다. 편지가 도착하기 전

 

까지 아득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던 옛 친구이자, 지성의 책과 스승의 가

 

르침과 함께 했던 학문의 벗을 만나기 위한 길을 달리고 있었는지도 몰랐

 

다. 마스터는 친구 분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지만, 비슷한 생각이

 

서로 만난다면 나는 그가 어떠할지 대충은 헤아릴 수도 있었다. 많이 알

 

고 많은 앎을 바라는 인물, 현실에서 필요한 욕심을 멀리 하지만 형이상학

 

을 탐독한 나머지 가끔씩 얼굴에 허황된 욕망이 비치는 인물, 상상과 현실

 

을 구분하지 못하고 뜬구름을 잡으려고 애쓰는 우스꽝스런 인물……. 마스

 

터의 옛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내 마음이 그

 

러했는데 하물며 마스터의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마스터는 곧 기차 바퀴

 

의 진동을 타고 시간을 더듬어 올라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