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국화 +1 인연의 시작

수레국화200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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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국화 +1 인연의 시작

 # 선혜's

학기말이면 늘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외국인 강사들은 강사 대로 학생들이 생떼를 쓴다는 것이고, 학생은 학생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학점과의 전쟁이 끝나면 고요한 방학이 찾아오는 것이니 참고 견디며 나아갈 수 밖에..


Daniel이 꽤 나이들어 보이는 학생을 데리고 왔다. 최진혁이라는 학생은 군대 제대 후 복학해서 영어회화라면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교양필수이다 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신청해서 들은 강의라고 했다. 거기까지만 들어도 그 학생의 평소 수업 태도나 시험 점수가 예상되었다. Daniel은 대강 설명을 하고 내가 알았다는 싸인을 주자 출석부와 시험 채점표를 내게 건네주고는 다음 수업이 있다고 가버렸다. 그 학생을 데리고 사무실 한켠의 티테이블로 데려갔다.

"진혁학생, 군대있어봐서 알잖아. 아무리 아프더라도 시험에는 참가하든지 아니면 다른 과제물을 내든지 해야지 포기하고 있다가 F 날리니까 억울하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억지다."

외양만 보기에는 삼촌뻘이었지만, 3년 동안 어학당에서 근무한 결과 학생들에게는 일단 누나처럼, 언니처럼 다가가야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초면이지만 말을 놓았다. 산적 두목처럼 생긴 그 학생도 고분고분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 우리 같이 군대갔다오느라 3년 휴학한 사람한테 영어를 교양필수로 시키는건 억지입니다."

"그렇지, 나도 아는데 학교 방침이니 어쩔 수 없잖아. 또 이렇게라도 영어회화를 하지 않으면 절대 진혁학생은 회화를 접할 기회도 없을테니 그래도 꽤 괜찮다는 4년제 대학나와서 회화 한마디 못하는 것도 좀 부끄러운 일 아니야?"

"누님은 영어를 잘하니 우리 심정을 모릅니다. 외국인만 다가오면 오줌이 질끔질끔 나옵니다. 세살배기 애도 아니고.."

얼굴이 붉그럭 푸르럭 하던 진혁이 나를 누님이라 칭하고 조금 진정되는 기미가 보여 나는 이때다 싶어서 진혁의 등을 두드려주며 다 안다는 듯이 위로해 주었다.

"그러니 내가 도와줄 테니까 선생님께 한번만 더 사정해봐. 다른 과제물이라도 해봐야지. F는 없애야 하지 않겠어?"

진혁은 내가 도와준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친구들한테 도움을 받아서라도 선생님께 메일을 한번 보내본다고 했다. 진혁이 나가고 나서 다시 외국인 강사 채용 서류를 정리하려는데, 실장님이 소파에 총무과 민휘진 과장과 앉아있다가 그를 내게로 안내해 주었다.

"정선생, 이번에 총무과에서 중국 학생들을 초청한다니까 많이 좀 도와드려. 과장님 정선혜 선생이 그쪽으로는 전문가니까 잘 알아서 도와드릴 겁니다. "


총무과 민휘진 과장은 학교 안에서 연예인보다 유명한 사람이다. 27살에 행정고시를 패스해서 총무과 과장을 하고 있다. 바로 밑 직급인 계장들이 40대 중반이니 멀게는 15년 이상 차이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친절하고 예의발라서 사람들마다 사위보려고 탐내는 사람이다. 총장님과 종종 골프치러 간다는 소문이 돌 만큼 집안도 만만치가 앉아서 그의 부모님이 제과회사 창업주라는 소문도 있고, 명동에 빌딩이 여러개 된다는 소문도 있고, 아버지가 종합병원 원장이라는 소문도 있어서 그는 백마탄 왕자님으로 여직원들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가끔 학교 식당에서 스치거나 총무과에 일이 있어 가면 항상 칸막이 뒷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눈 한번 마주치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는 준공중인 국제협력관이 완성되면 그리로 간다더니 미리 준비하고 있나보다.



# 휘진's

 30분째 소도둑 같은 놈을 앉혀놓고 말도 안 들으려하는 그 놈에게 미소까지 날려주며 설득하고 있다. 3년전 임명식 장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빠져 귀여움은 줄었지만, 여성스러움이 더해져 있었다. 긴머리를 쓸어올리며 여전히 볼록한 엉덩이를 잘도 삐뚝거리며 돌아다녔다. 옆에서 차실장이 말을 걸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의 엉덩이를 향하던 내 시선과 그녀의 눈이 마주쳐 변태로 오해받을 뻔했다. 다행히 그녀는 그 소도둑놈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중국 학생건을 내가 직접 맡겠다고 했을때, 국장님을 비롯해 모든 직원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젊은 나이에 높은 직급에 올랐으니 실무 능력을 쌓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선뜻 허락해 주었다. 소도둑이 고개를 푹 숙이고 사무실을 나가자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더니 귀찮다는 듯 어깨에서 물결치는 긴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었다. 다음에 더 친해지면 그렇게 흰 목덜미를 함부로 내놓지 말라고 주의 줘야겠다. 그런 건 나만 봐야하니까.


# 선혜‘s

그는 간단히 인사하고 2개의 파일에 나눠 온 서류들을 보여주며 내게 초청 순서를 물었다.

메모를 해가며 그에게 필요한 서류와 순서들을 일러주고 필요한 서류들을 프린트해주었다. 공익 요원들이 문을 잠그느라 짤랑거리며 다니는 열쇠소리에 시계를 보니 6시 10분 전이다.

그도 시계를 보더니 기지개를 폈다.

"퇴근시간이니 내일 합시다."

그가 먼저 서류를 챙겨서 나갈 준비를 하니 나야 뭐 고마울 수 밖에. 얼른 가방을 챙겨 셔틀버스를 타러 본관앞으로 가는데 그도 총무과 가는 길이니 나란히 걸었다.

"매일 버스 타고 다닙니까?"

"네, 특별한 일 없으면요."

그와 내일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셔틀버스에 올랐다. 하루 종일 성적 때문에 학생들에게 시달리고, 중국 학생 초청건으로 쉴 틈없이 이야기를 했더니 몸이 만신창이가 된 듯 집에 도착하니 씻을 힘도 없었다. 그렇지만 정신은 이상하리 만치 또렷해지면서 모든 뇌를 그에 대한 생각들로 꽉 채웠다. 나 역시 백마탄 왕자님을 동경하는 철부지란 말인가..일어나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땅으로 쏘옥 빨려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정류장까지 가기도 전에 셔틀버스가 도착해서 스커트에 힐을 신고 열심히 뛰어 겨우 탔다. 이눔의 버스는 8시 10분에 도착한다는 노선안내문에도 아랑곳않고 8분인데 벌써 도착해서 스타일 다 구겨놓고 있다. 아파트 단지라 사람들이 많이 타니 다행이었다. 승차권을 내고 후다닥 지나가면서 먼저 탄 직원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뒷자리로 갔다. 학교 도착할때까지 25분의 여유가 있으니 모자란 잠을 더 자기 위해서다. 이어폰을 꽂고 유리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내 옆에 누군가 앉는 것이 느껴졌지만 잠든 척하며 그대로 창에 기대어 있었다. 깜빡 졸았나보다. 교문앞에 설치된 과속방지턱에 버스가 크게 덜컹하는 진동에 잠이 깨었다. 옆자리에서 민휘진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면서 침이라도 흘렸나, 지금 거울을 꺼내 확인하지도 못하고 신경쓰였지만 어색하게 목례를 하고 이어폰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는 내릴 준비를 했다. 가만, 민휘진이 차가 없었나..셔틀버스에서 만난 건 처음이다.

"차 있지 않으세요? 셔틀버스는 처음 타신 것 같은데."

"오늘부터 타고 다니려구요. 훨씬 편하고 좋은데요."

역시 있는 놈이 무섭다더니 좋은 차를 두고 굳이 버스를 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