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수염] 사링 밀어내기 (12)

말글눈200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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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집들이


공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지하실을 파고 콘크리트 기초를 다지는 일이 시간을 좀 잡아먹었을 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공장에서 미리 조립해 온 철골을 세운 다음 거기에다 강판을 붙이고 나사로 조이니까 금방 집 한 채가 덩그렇게 일어서는 것이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싱크대를 들여놓고 방마다 붙박이장을 설치하는 일도 이틀 만에 끝났다. 막상 힘이 드는 일은 맘에 드는 가구와 살림살이를 고르는 것이었다. 문영은 옥천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으로 나가 백화점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한 나절을 죽치고 앉아 소파와 책상, 식탁, 장식장, 냉장고와 세탁기를 골랐다. 전자레인지와 전기 오븐도 고르고 텔레비전과 전축, 냄비, 식기, 수저까지 생각나는 것은 모조리 샀다. 거의 2천만원에 가까운 계산서가 나왔지만 조금도 아깝다거나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동안 의자 하나 제대로 된 것을 사 보지 못했던 가난에 대한 보상심리였을 것이다. 그것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제각기 자리를 잡자 안 그래도 산뜻한 실내가 환하게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비로소 내 집을 가졌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문영은 화실에서 쓰던 물건은 컵 하나, 숟가락 하나도 옮겨 오지 않았다. 가난하고 고생스러웠던 시절과는 완벽하게 결별하고 싶었다. 그리고 화실은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해서 옛 모습 그대로 그냥 놔두었다. 그렇게 모든 공사가 다 끝나고 마당에 잔디를 깔고 있을 때 아랫 마을에서 사람들이 올라왔다. 집구경을 하러 왔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화조를 묻었는지, 어디 좀 봅시다.
자신을 이장이라고 소개한 중년남자가 대뜸 시비조로 하는 소리였다. 문영은 그들을 뒤뜰로 데려가 정화조를 보여 주었다. 이장은 굳이 그 뚜껑까지 열어 본 다음 비로소 낯색을 풀었다.
행여 정화조도 묻지 않고 하수를 막 흘려 보내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말이지요. 집, 참 근사하네요. 꼭 무슨 산장이나 별장 같네요.
안 그래도 앞으로는 산장이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채운산장이라고 불러요. 이 산이 바로 채운산, 채색 채 자에다가 구름 운 자… 아름답게 빛이 나는 구름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나저러나 집들이는 언제 합니까?
문영은 마음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집들이에 초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싫어서 깊은 산골을 찾아들었는데 결국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그들과 아는 체를 하고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돌아간 다음 문영은 신애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통해 금방 손에 잡힐 듯한 신애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문영은 공연히 목이 메인다. 신애는 옥천까지 기차를 타고 오기로 했다. 그러면 문영이 옥천역으로 마중을 나가 태우고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산 그림자가 깔리면서 인부들이 내려가자 갑자기 문영은 혼자가 된다. 사방에서 어둠과 함께 적막이 몰려든다. 도시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지독한 고요다. 멀리 산 아래서 경운기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깨뜨린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물속처럼 고요해진다. 잠시 외로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다 가지게 되었다는 터질 듯한 행복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신애가 이곳을 찾아오게 되면 그것은 또 몇 배로 부풀어 오를 것이다. 신애가 보고 싶다. 문영은 가죽 냄새가 나는 소파에 편히 앉아 신애를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밖에서는 솔바람 소리가 지나간다. 그리고 간간이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새 소리도 들린다. 소쩍새와 부엉이 울음소리는 들어 봤는데 전혀 그런 종류가 아닌 것 같다. 목관악기가 내는 소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굵고 어쩐지 섬뜩하다. 언젠가는 밖에 나가 지켜 섰다가 어떻게 생긴 새인지 꼭 한번 보고 싶다. 그때,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문영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일어났다.
누, 누구십니까?
목소리가 떨리고 소름이 돋는다.
지나가던 과객이올시다.
과객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다. 문영은 무기가 될 만한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신발장 위에 놓여 있는 망치를 발견한다. 저거면 됐다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니 웬 스님이 하나 서 있다.
이거, 밤늦게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척 놀라셨지요?
아니, 괜찮습니다.
저는 요 위에 토굴에 살고 있는 몽석이라는 중입니다. 꿈 몽 자, 돌 석 자… 꿈꾸는 돌이라는 뜻이지요.
토굴이라니요?
바위나 흙을 파내고 만든 굴 말입니다. 거기서 참선 중인데, 몇 달 출타했다 와 보니 난데없이 못 보던 새 집이 한 채 서 있지 뭡니까. 그래, 궁금해서 들려 본 겁니다.
참 성가시게 되었다. 아래쪽에는 마을사람들이 있고 위쪽으로는 참선 중인 스님이 있다. 그 가운데 끼어 좋으나 싫으나 이 사람들과 아는 체를 하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곳에다 다시 집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영은 되도록 좋은 얼굴을 하려고 애쓰면서 물었다.
스님, 저녁은 드셨습니까?
막차를 타고 들어오느라 저녁은 못 먹었지만 올라가서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으면 됩니다. 보아하니 약주를 하고 계셨던 모양인데 술이나 한잔 주십시오.
스님도 술을 드십니까?
없어서 못 먹지요.
그 말이 정말인가 보다. 그 괴상한 방문객은 바랑을 벗어 놓더니 국산 양주를 거뜬하게 한 병이나 비운 다음 자리를 떴다. 문영은 완전히 기분을 잡쳐 버렸다. 모처럼 분위기를 잡았다가 느닷없이 골칫거리 하나를 안게 되었다. 초면에 대뜸 술 한잔 달라는 넉살로 보아 또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머리를 짜 보아도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결국은 문영도 양주를 한 병이나 비운 다음 그냥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집들이 준비는 아주 홀가분하게 끝났다. 읍내 갈비집에다 부탁했더니 불판과 가스버너까지 가지고 와서 떡 벌어진 잔치상을 차려 놓았다. 문영은 아침 일찍 내려온 설계사무소 친구한테 뒷일을 부탁하고 옥천역으로 나갔다. 마치 멀리서 찾아오는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린 신애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싶어 가슴이 철렁한다.
왜 그래? 멀미했니?
멀미가 아니고 다리가 아파서 그래요.
다리가 왜 아파? 기차 안에서 다쳤어?
다치기나 했으면 덜 억울하지요. 자리에 앉아서 책이나 좀 보려고 했더니 웬 할머니 한 분이 옆에 와서, 요즘 젊은 것들은 노인네가 서 있어도 자리 양보할 줄도 모른다고 쫑알쫑알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내주고 서서 왔더니 다리도 아프고 속이 상해 죽겠어요.
문영은 옥천역에는 입석이 없는 새마을 열차가 서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무궁화호는 입석 손님이 많다. 그래서 신애가 졸지에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미안하게 됐다. 내가 올라가서 널 데리고 내려와야 하는 건데.
아이, 그런 집들이가 어디 있어요? 올라갈 땐 자리에 앉자마자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자는 척해야지.
왕복 차표 끊었구나?
미리 예매해 놔야죠. 좌석이 없으면 어떡해요.
그거야 그렇지.
문영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신애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묻는다.
선생님, 제가 하룻밤쯤 자고 갈 줄 아셨어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저도 그러고 싶어요. 깊은 산속에서 고즈넉하게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하룻밤 지내면 얼마나 황홀하겠어요. 하지만 우리 엄마 아빠 때문에 어림도 없어요.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떻게 단속이 심한지 말도 못해요.
딸 하나뿐인데 오죽하시겠니. 나 같아도 그러겠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친구들이랑 와서 하룻밤 자고 갈 테니까 그때 회포를 풀기로 해요.
참 듣기 좋은 소리다. 문영은 새삼스럽게 신애의 그런 시원스런 점이 좋아진다. 털털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 문득 이 길로 끝까지 가면 어디가 나올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언젠가는 이 아이와 함께 끝없이 한번 달려 보리라.
집에 도착해 보니 아직 점심 때도 되지 않았는데 집들이 잔치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손님들은 모두 20명쯤 돼 보였다. 문영이 자기 소개를 하고 간단하게 잘 봐달라는 인사말을 끝내자마자 사람들은 모두 갈비에 덤벼든다. 농촌이 잘살게 되었다지만 그들에게 갈비는 아직도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맛있게 먹는 광경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갈비를 50인분이나 시켜서 좀 무리는 한 셈이지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애도 그들과 똑같이 맛있게 먹는다.
깊은 산속에 들어와서 먹으니까 진짜 별미네요. 자주 와야겠어요.
오기만 해. 올 때마다 소를 한 마리씩 잡을 테니까.
갑자기 박수소리가 터진다. 이장이 일어나서 인사말을 한다.
우리 마을에 이렇게 훌륭한 학자분이 정착을 하게 되어서 마을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영이 갑자기 학자가 되었다. 진짜 직업을 밝히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인사말이 끝나자 노래 순서가 이어진다. 술잔들도 바쁘게 오간다. 그러다가 끝내는 춤판이 벌어진다. 마이크만 없을 뿐 관광버스에서 흔히 벌어지는 그대로다. 문영도 신애도 춤판에 끌려 나간다. 둘은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건성으로 팔다리를 흔들었다. 이럴 작정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선생님, 아무래도 결혼을 하셔야겠네요.
집들이가 끝나고 옥천으로 나가는 차 속에서 신애가 말했다. 둘 다 표가 날 정도로 술을 마셨지만 문영은 음주운전으로 걸려도 좋다는 배짱이었다.
저렇게 외로운 산장에서 어떻게 혼자 지낼 수 있겠어요? 무섭기도 할 거구요.
괜찮아. 어려서부터 혼자 지내는 게 습관이 돼 가지고 말이야.
하지만 섹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거예요? 언제까지나 자위행위로 해결할 수는 없잖아요?
신애는 그러면서 생글생글 웃는다. 둘만의 비밀을 나눈, 마치 몸을 섞은 사이라도 되는 것 같은 은밀한 웃음이다. 문영은 정말 난처해진다. 누가 선생이고 누가 제자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얘긴 이제 그만 하자. 생각만 해도 그만 죽고 싶을 지경이니까.
안 그러기로 했잖아요?
너야 괜찮을지 모르지만, 난 그 생각만 하면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야.
선생님은 그게 문제라니까요. 서로 비밀을 털어놓은 사인데 왜 자꾸 창피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전 그럼, 너무 뻔뻔해서 창피한 줄도 모르는 인간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내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어떡하겠니?
성격을 고쳐요 그럼. 그래야 인생이 달라질 테니까요.
알았다, 고치도록 노력해 볼게.
차가 비포장도로를 벗어나 아스팔트 위에 올라선다.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이번에는 문영이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너, 사귀는 남자친구 있지?
다분히 없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다. 그러나 대답은 고약하기 짝이 없다.
왜 없겠어요? 요즘은 중3만 돼도 남자친구가 없으면 노처녀라고 하는 세상인데.
그래, 어떤 친구야?
그저 그래요.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그게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남학생이란 뜻이에요. 연극영화과에 다니는데 장래 영화감독이 되겠대요.
영화감독 좋지. 그 남학생하고 키스는 해 봤니?
아이, 당근이죠. 키스 같은 건 기본 아녜요?
문영은 또 충격을 받는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몹시 기분이 상한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어가야 한다.
너는 어쩐지 몰라도 남학생 쪽에서는 키스로 만족하지는 못할 텐데.
물론이죠. 하지만 전 분명히 한계를 그었어요. 결혼을 할 때까지는 순결을 지키겠다구요. 그래서 친구들은 절더러 천연기념물이래요.
그럼, 친구들은 안 그렇단 얘기구나?
그럼요. 처녀라는 딱지는 남성 위주의 사회가 여자들 발목에 채워 준 족쇄라는 거예요. 그래서 딱지를 뗀 날은 친구들하고 기념 파티도 하고 그래요. 벌써 동거생활을 시작한 애도 있어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넌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고 싶지만 꾹 참고 있는 거죠. 참는 자에게 복이 있느니라.
옥천역에 도착해서 신애를 기차에 태워 보낸 다음 문영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저 아이는 진정으로 순결한 아인가, 아닌가.

------------------------------------------------------------------ 1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