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사관을 계승·옹호하는 한국주류사학의 이적사가(利敵史家)들 (1)

개마기사단20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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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각 성(省) 박물관에 가 보면 큰 지도가 붙어 있다. 그 지도에는 예외 없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쪽 끝을 한반도 깊숙한 황해도까지 연결해놓았다. 만리장성이 황해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면 북한 사람들은 굳이 만리장성을 구경하러 중국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 남한 사람들도 금강산 관광단처럼 만리장성 관광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해야 한다. 북한 지역에 만리장성이 있다는데 굳이 중국까지 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유사(有史) 이내 수천년간 한반도 내에서 만리장성을 구경했다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많은 글을 남겼던 조선의 문인(文人)들도 조선 땅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시(詩)나 기행문(紀行文)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공식 견해를 담고 있는『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은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그려놓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중국 고대 한나라[漢國]가 고조선(古朝鮮)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식민통치기구 한사군의 중심지가 낙랑군(樂浪郡)이다.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고 나머지 군(郡)들도 대체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장을 지도로 표시한 것이다.『사기(史記)』「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遂成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이라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 일제식민사학자(日帝植民史學者)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다. 이는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적 뿌리가 일제식민사학(日帝植民史學)임을 말해준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아가자 정부가 만든 기구가 고구려사연구재단(高句麗史硏究財團)과 이를 계승한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홈페이지)의 ‘올바른 역사’라는 항목은 고조선에 대해서 “기원전 3~2세기 준왕(準王) 대(代)의 고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조선과 위만조선 도읍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곳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평양이었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기술(記述)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 실제로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는 중국사의 영역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가 맞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는 수세적 방어네 나서야 할 것이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만든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成縣)=황해도(黃海道) 수안군(遂安郡)’ 설(說)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사학계는 이런 문제점을 외면한 채 해방 후에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는 한국 주류사학계의 뿌리도 일제식민사학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말해준다.

 

중국 학자들은 중국의 국익을 위해 동북공정을 주장한다. 한국 학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위해 동북공정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일까? 그들은 이런 이론이 실증(實證)으로 찾은 진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반대쪽의 실증이 더 많다.

 

그렇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은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하는가? ‘낙랑군 평양 설치설(樂浪郡平壤設置說)’,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이 맞다고 생각하는 학자라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기구에 근무해서는 안 된다. 그 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적하라고 설립된 기구이지, 동북공정에 동조하라고 국민세금으로 운영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 개인의 학문적 자유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낙랑군 평양 설치설’의 신봉자라면 개인 연구소를 차려 연구를 심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낙랑군 평양 설치설’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동북아역사재단 같은 국가기관에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연구를 하는 반면 이와 반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연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란 것이 있다. 서기 3~4세기까지의『삼국사기(三國史記)』초기기록은 김부식(金富軾)이 조작한 가짜라는 것으로 현재 주류 사학계(主流史學系)의 정설(定說)이다. 이 이론의 창안자 역시 일제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律田左右吉]다. 쓰다 소우키치의 한국 고대사관(韓國古代史觀)은 간단하다. 1910년대 남만주철도회사(南滿州鐵道會社)의 위촉을 받아 쓴『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등의 저서에서 소우키치는 고대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樂浪郡)을 비롯한 한사군(漢四郡)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래야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존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 시기 한반도 남부에 삼한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서술할 뿐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서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우키치는『삼국사기』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을 창안해낸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사기』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며 마치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처럼 과장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임에도 8·15 광복 후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그대로 존속시켜 정설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대학 내의 강단사학자들과 대학 바깥의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역사인식을 두고 집단적 갈등을 겪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자들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고 비판해왔고 강단사학자들은 이들을 실증은 없이 주장만 있는 비전문가들이라고 비판해왔다. 같은 사(史)자를 쓰지만 양 진영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전혀 없다. 사(史)에 대한 양자의 출발선이 전혀 다른 탓이다. 어느 진영에 속하든 해방과 동시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 곧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학계는 8·15 광복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연구를 진행한 적이 없다. 총론으로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비판이니 타율성론(他律性論) 비판이니 하는 식으로 식민사학을 비판했지만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듯이 각론은 식민사학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의 후예라는 비판은 상당 부분 한국의 주류 사학계가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뿌리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한국 주류 사학계의 뿌리를 캐봐야 한다. 한국 사학계의 주류 이론은 두 가지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 노론사관(老論史觀)이다. 이 두 사관의 뿌리는 같다. 조선 후기 내내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의 상당수 인사는 일제(日帝)의 대한제국 병탄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고, 식민지 시대에도 지배계층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가문 출신 중 일부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 전파에 일조했고 이들이 8·15광복 이후에도 역사학계 주류를 장악한 결과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국사를 구성하는 주요 관점이 된 것이다.

 

이율곡(李栗谷)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한 것처럼 조작하고, 효종(孝宗) 군왕의 북벌정책(北伐政策)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북벌론(北伐論)의 화신처럼 서술하고, 노론 당론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는 실학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최근에는 정조독살(正祖毒殺)의 혐의를 받는 노론(老論) 벽파(僻派)가 정조의 우당(友黨)인 것처럼 주장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노론의 시각으로 본 결과물들이다.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다 보니 민족해방 후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이 수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이다. 1980년대까지 한국사학계에서는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반역사학적(反歷史學的) 명제가 지배해왔다.

 

현대사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명분이었지만 객관성은 역사학자의 양식과 연구 자세의 문제일 뿐 시기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고대사가 일제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거듭된 공격을 받는 것 자체가 고대사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현대사는 비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한 식민사학의 숨은 의도였던 것처럼 현대사 연구를 금지한 속내 역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 연구 금지론’에 따라 역사학자들이 반일독립운동사를 외면하다 보니 대부분 불우한 환경에서 쓸쓸하게 죽어갔고 동시에 반일독립운동사의 1차 사료도 사라졌다. 지금은 반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하려 해도 대부분 사망해 생생한 증언을 들을 방법이 없다.

 

이 네 가지 문제는 한 꿰미에 꿰어진다. ‘한사군 한반도 북부 위치설(漢四郡韓半島北部位置說)’,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 ‘노론사관(老論史觀)에 의한 조선후기사(朝鮮後期史) 서술’, ‘현대사 연구 금지론(現代史硏究禁止論)에 의한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 말살’은 노론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이 8·15광복 이후에도 한국사의 주류 이론으로 행세하면서 발생한 문제들이다. 두 사관(史觀)의 소유자들이 한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다 보니 국가에서 어떤 역사학 연구 관련 기구를 만들어도 결국은 이들이 차지하게 되어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적하라고 만든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 누리집에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지하는 내용이 ‘올바른 역사’란 명목으로 버젓이 오르는 이상 현상이 필연적 귀결이 되는 구조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이제 전혀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우리 사회의 담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현상의 문제에 집착한 반면 현상을 발생시키는 본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왔다. 이 글은 바로 그런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2세들이 앞으로도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동북공정을 포함하는 식민사관은 침략사관(侵略史觀)이고 노론사관은 상대에게 닫힌 폐쇄사관(閉鎖史觀)으로 두 사관이 사진 침략적, 폐쇄적 성격은 현재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평화적 체제 구축에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적 체제 구축의 선구가 되려면 그 시발점(始發點)은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의 극복에 두는 것이 옳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지사(志士)는 1929년에 출간된『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통해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꼭 다 옳은 것이 아니지만 자기는 꼭 옳은 줄로 확신하는 것이라야 세상에 공포(空包)할 용기가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단재가 확신을 갖고 세상에 공포한 많은 논설들은 식민사관과 대척점(對蹠點)에 있기에 현재 방치되어 있다. 몸은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아직 해방되지 못한 역사관, 곧 정신도 해방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커진 몸집에 맞는 큰 정신을 가진 성숙한 대한민국이 절실할 때다.

 

2009년 8월 천고(遷固) 이덕일(李德溢) 기(記)

 

1. 한(漢) 제국의 대(對) 고조선(古朝鮮) 침략전쟁(侵略戰爭)

 

ⓐ 다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고조선사 문제(古朝鮮史問題)

 

한국 주류사학계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출발점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 출발점부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출발점에 다시 선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일제 식민사학(日帝植民史學)이 만든 고조선사(古朝鮮史)를 검토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 주류사학계의 고조선사에 관한 정설은 일제 식민사학이 만든 이론 그대로다. 따라서 일제 식민사학이 어떻게 고조선사를 만들어냈는지 사학사(史學史)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일제 식민사학이 만든 고조선상(古朝鮮像)의 베일을 걷어내고 원(原) 고조선상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간 고조선상은 두 가지 사관(史觀)에 의해 왜곡되어왔다. 바로 중화사관(中華史觀)과 일제(日帝)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이다. 이 두 가지 사관으로 가려진 베일을 걷어내야 진정한 고조선상이 드러난다.

 

사실 고조선사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논하는 것은 일종의 시간 낭비다. 지금은 내몽골 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를 비롯한 고조선의 전사(前史)를 연구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북아역사재단(東北亞歷史財團)의 누리집이 말해주듯이 현재 고조선사 자체가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과 중화패권주의사관(中華覇權主義史觀)의 덫에 걸려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기에 고조선사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고조선에 대해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중·근세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 이전의 조선만을 고조선이라 불렀으나, 최근에는 위만조선까지를 모두 포함하여 고조선이라 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이란 대목이다. 필자가 지난 2006년에 출간된 역사개설서(歷史槪說書)『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에서 서술했듯이 청동기시대에야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부인하는 논리로 귀결된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요점만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청동기시대에야 국가가 건국될 수 있다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이 만들어낸 이론이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청동기시대에 국가가 건국되었다고 서술하지 않는다. 이집트 고왕국이나 중남미의 잉카·마야·아스텍 문명 등은 청동기시대에 성립된 국가들이 아니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던 이들 고대 국가들에 대해 국가 형태의 정치집단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없다.

 

둘째, 2006년까지 사용된『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한반도엣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했는데 이는 결국 단군조선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고조선은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분류되는데 무극대사(無極大師) 일연(一然:1206년~1289년)은『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에서 단군조선이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되었다고 서술했다.『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서술에 따르면 고조선은 만주에서 건국되었다고 해도 서기전 15~13세기 이전에는 건국될 수 없다. 서기전 24세기에 건국된 단군조선은 우리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2007년부터 사용된『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해당 기술이 전향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필자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007년도에 발행한「국사」교과서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古朝鮮)이다.『삼국유사(三國遺事)』와『동국통감(東國通鑑)』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진출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 고등학교「국사」교과서, 2007년

 

원래 이 기술(記述)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 고등학교「국사」교과서, 2003년

 

전향적이라고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하였다고 한다(B.C. 2333).”고 되어 있던 부분이 “『삼국유사』와『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년).”고 바뀐 것뿐이다. 그런데 당시「국사」교과서가 전향적으로 바뀐 부분에 대한 신문보도는 비판 일색이었다. 이는 한국 신문 기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욱 근원적으로는 일제 식민사학에 기반을 두고 막강한 카르텔을 형성한 한국 주류 사학계의 권력지형 때문이다.

 

필자는 당초 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한국 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李丙燾:1896년~1991년)가 생존해 있을 때나 그 제자들이 사학계의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이 정설이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보았으며, 그 제자의 제자, 또 그 제자의 제자들이 학계의 중추를 형성할 때가 되면 자연히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겠는가 싶었다. 이병도에서부터 약 3세대, 또는 4세대 정도 떨어진 학자들이 학계 중추를 형성하면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가 저절로 소멸하리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필자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이병도에서부터 3~4세대 이후의 학자들이 학계의 중추가 된 지금 일제 식민사학(日帝植民史學)의 구도는 더 공고해졌다. 나아가 이제는 고조선사 문제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세도정치가 개혁정치’였다는 어불성설(語不成說)적인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일제식민사관(日帝植民史觀)과 노론사관(老論史觀)은 일란성 쌍둥이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연구원이었던 카(Edward Hallett Carr:1892년~1982년)는『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1961년)』에서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말했다”라고 언급했다. 카의 이 말은 한국사에 적용할 때 정확히 들어맞는다. 한국사는 역사가들에 의해 창조된 학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창조한 역사상(歷史像)이 역사의 실제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어떤 역사적 사실들은 역사가들이 만든 허상(虛像)일 뿐이다. 이제 그 실체를 파헤쳐보자.

 

▶ 출처:{역사의 아침 版}『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2009년 纂)

 

▶ 해설:이덕일(李德溢)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