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악마는 죽지 않았다. -1화-

이현재201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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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스코틀랜드 웨스트로디언..


"할아버지! 받아왔어요!!"

 

평소에 조용하고 의젓하기로 칭찬이 자자한 수지였으나, 오늘만큼은 마을의 여느 12살난

소녀와 다를바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언제나 동네 노인들의 불편한 몸을 대신해 크고 작은

심부름을 도맡아하던 수지가 선술집의 주정뱅이 노인인 보 영감의 심부름을 하게되면서

벌어진 일이었고.. 보 영감은 해맑게 웃으며 양손에 양털로 뒤덮인 무언가(?)를 잔뜩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수지를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바보같은 자신의 입방정을

책망할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욕은 술한테 해야겠구먼.. 나이가 들수록 이놈의 입방정은 조절이 안돼.. 쯧쯧.."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 영감 앞에서 선 수지의 얼굴에는 기운이 넘쳐 흘렀다.

 

"필립씨가 양털에 감싸서 가면 깨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도 조심해서 잘 들고 왔으니까

약속 지키는거죠?"

 

한숨을 쉬며 양털뭉치에 파묻힌 무언가(?)를 건내받은 보 영감의 축 쳐진 수염과 입가는 내용

물을 꺼내보고는 이내 환한 미소가 가득해졌다.

 

"암! 그렇고말고! 이 할배가 약속대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마!! 끌끌끌!"


"신난다!!!!!!!! 엄마가 오늘은 핀의 집에가서 놀다오라고 했지만, 난 보 할아버지 얘기가 더

듣고싶으니까! 근데 할아버지! 그 병은 뭐에요? 귀한 거에요?"


"떽! 귀하다마다..! 두말하면 상종이 귀찮아질만큼 중요한 거란다!"

 

마치 세기의 보물을 다루듯 자신의 품으로 더 꼭 끌어안으며 보 영감은 이내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는 선술집 주방에서 우람한 몸집에 걸맞지않는 빠른 손놀림으로

설겆이를 하고 있는 패티의 말에 순식간에 구겨졌다.

 

"귀하긴 개뿔! 술이 다 똑같지!! 하여간 영감님은 앞으로 살아도 얼마를 산다고 허구언 날

여기저기서 그렇게 술을 퍼마셔 대는거유?!"


"뭐? 개뿔? 하! 무식해도 한참 무식하구먼! 이 조니워커 화이트라벨은 이미 1차세계대전때 단종된

녀석이라고! 걔다가 철저히 관리한 녀석이라.. 허.. 1911년의 막내놈이라고 해도.. 40년이 넘었

구먼.. 씁.. 허허! 상상만해도 침이 고일 정도로... 잠깐..! 어쨋든!! 자네 가게의 그 빌어먹을 싸구

려 위스키와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지!! 입맛만 버린다구!!"


"오~ 입맛 버리는 빌어먹을 싸구려 위스키의 싸구려 외상값 30파운드는 지금 주실 수 있겠네? 위

대하시고 돈 많으신 보 영감님?"


".........  ........  ...... ... ... 내가 말은 이렇게해도 자네 가게 술 아니면 안 먹지!

외상 얘기는 일단 오늘 나의 손님이 있으니까 다음에 얘기하자구!"


"흥! 언제든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수지는 패티아줌마와 보 영감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이내 방긋 웃는다.

그런 수지를 패티는 보 영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다.

 

"쯧쯔.. 수지야. 나는 이 상황이 전혀 재미있지 않다."

"하지만 할아버지! 패티 아줌마는 맨날 할아버지 걱정만 하는걸요."

 

수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패티 아줌마는 살에 파묻힌 작은 눈을 더욱 크게뜨며

쌀쌀 맞은 표정을 짓는다.

 

"흥! 내 술집에서 주정뱅이 노인이 고꾸라지는 꼴을 보고싶지 않을 뿐이다! 가게 손님 떨어져!"

 

패티 아줌마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 자신의 팔을 잡아끌며 2층으로 부리나케

올라가려는 보 영감의 작은 미소를 눈치챈 것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 영감을 따라가는

수지의 표정은 한층 더 해맑아졌다.

 

"어쩌면.. 귀찮음일지라도 누군가에겐 그것조차 행복이 될수도 있겠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올라가는 두 사람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패티아줌마는 그 거대한 몸집을 움직여

분주히 밀린 설겆이를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