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7 옥중투쟁 ⑴

대모달201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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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당국이 서둘러 일본에 재판권을 넘겨



안중근은 성공적으로 의거를 마친 뒤 러시아 군인들에게 붙잡혀 현장에서 권총을 압수당하고 동청절도 하얼빈 철도경찰서 사무실에 구치되었다. 호주머니에는 1루불과 해군용 나이프가 하나 들어 있었다. 안중근은 첫 인정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성명: 안중근
국적: 한인(韓人)
연령: 30세
종교: 가톨릭.’



안중근을 심문한 사람은 러시아 검사 밀레르였다. 당시 하얼빈은 청국령이었지만 러시아 관할지역이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를 초청한 것도 러시아 당국이었고, 환영준비와 경비책임도 러시아 측이 맡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러시아 검사가 안중근을 심문했다.



밀레르 검찰관은 안중근에게 언제 어디에서 하얼빈에 왔는지, 전날 밤은 어디에서 보냈으며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인 역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등을 상세히 물었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안중근 외에 동조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하얼빈 주변 역에 수상한 한국인을 수색하도록 긴급 지시해 전날부터 감시를 받고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을 체포했다. 두 사람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어서 혐의를 받았는데 처음에는 이번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다며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다가 안중근의 의거가 성공해 이토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순순히 사실을 시인했다.



러시아 당국은 이를 계기로 그동안 이들이 주고 받은 전보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주소를 추적해 하얼빈에 거주하는 김성백 등 수십 명의 한국인을 수색했다. 그리고 권총과 항일결사와 관련한 각종 문서를 압수하고 한국인 6명을 더 구속했다.



안중근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심문은 당일 오후 9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밀레르 검찰관의 지휘 아래 담당은 하얼빈 제8지방 국제판사 스뜨로조프가 심문을 담당했고 다른 두 명의 러시아 검사가 수사를 진행했다. 이날 하얼빈은 기온이 영하 10도에 이르는 매우 추운 날씨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심문에 응했다.



심문장에는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서기 스기노[彬野]도 초청되었다. 한국인 안중근이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질 경우를 대비해 재판관할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수사에는 하얼빈 동청철도 당국 책임자, 경비 책임자는 물론 코코체프 재무장관 그리고 채가구역에서 신분증 불심검문을 한 헌병 하사 쎄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관들은 처음 안중근이 하얼빈역 3등 대합실에서 밤을 새웠다는 말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증인 중 한명인 코코체프에게 25일 밤에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특별열차에서 나와 역 주변을 산책하면서 유심히 본 역사(驛舍) 내의 밤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코코체프는 전날 밤 하얼빈의 기온이 영하 10도였으며 역 대합실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



이 말을 듣고 안중근은 침착한 목소리로 통역관을 통해 코코체프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면서 “본인은 증인을 모르나 그 중 단 한가지 진실은 본인은 역에서 밤을 새지 않았으며 하얼빈에도 어제 온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떤 곳에서 밤을 새웠는지는 말할 수 없다. 누구와도 협의한 바 없으며 단독으로 거사 했으니 본인 혼자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코코체프는 후에 회고록에서 비록 범인이지만 안중근에게서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안중근은 젊고 미남형이며 체격이 날씬하고 훤칠한 키에 얼굴빛도 희어 전혀 일본인과 닮지 않았다. 만약 일본영사관에서 역내 출입 일본인을 조사했었다면 바로 구별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채가구역에서 역에서 10월 24일 안중근이 우덕순·조도선과 함께 있을 때 불심검문을 했던 헌병 하사 쎄민의 증언이 있었다. 그는 하얼빈에 26일 저녁 늦게 도착하였다. 그가 10월 24일 안중근에게 증명서 제시를 요구했을 때 안중근은 러시아에서 발행한 ‘한인’이라고 쓰여진 임시 거주증명서를 보였다고 말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총살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관할지역에서 일본의 최고위급 인사가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호 책임이 초청 당사국인 러시아에게 있어 러시아는 책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가 전날 동청철도 경비대장 하르라트에게 일본인의 검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군인들이 검색과정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했던 책임은 일본 측에도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심문과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이 끝나자 러시아 측은 이날 밤 늦게 안중근과 우덕순 등 한국인 8명과 조서 서류 일체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겼다.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아직 일본과 범죄자 인도협정을 맺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수사를 서둘러 일본에 넘겨버렸다.



박종효 전 모스크바대학 객원교수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러시아는 그때까지는 아직 일본과 범죄자 인도협정을 체결한 바 없었다. 그처럼 성급하게 일본에 인도시킨 것은 국제법상 재판권이 범죄 발생지에 있는 원칙에 배치되는 큰 양보였던 것이다.

러시아는 먼저 사건의 성격상 광복을 위한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정치관계이므로 앞서 러·일 비밀조약에 규정된 대한제국 문제에 러시아는 일본의 권한을 존중하면서 경호책임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도 줄이고 러·일간에 이 사건을 더 이상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정치적인 고려를 한 행정적인 해결책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일본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토를 친러파 일본 정치 지도자로 여겨 초청했다가 자국 관할지역에서 변(變)을 당하자 크게 당황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일본과 포츠머츠조약 체결 뒤 일본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흑룡강 연안 총독 운떼르베르게르는 1909년 상반기에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방위가 일본의 새로운 침략음모에 무방비상태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따라 니콜라이 황제는 재무장관 꺼깝초프에게 청국 주재 러시아 공사 까라스토베츠를 비롯한 만주 북부지방의 러시아 영사를 하얼빈으로 소집하여 만주 북부와 몽골문제 등을 협의하도록 지시했다.

재무장관 코코체프의 극동 출장 소식은 즉각 일본 도쿄에 전해졌다. 일본은 코코체프가 극동 출장길에 일본을 방문할 것을 요청했지만, 재무장관은 의회의 개회 시기와 맞물린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럴 즈음에 이토의 극동방문이 이루어지면서 '극동의 주요 국제문제'를 해결하고자 코코체프와 이토의 회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재판장소 놓고 치밀하게 계산한 일제(日帝)



안중근과 연루자 일행의 신병과 서류, 증거품 일체를 러시아 측으로부터 인계받은 일제는 삼엄한 경비 속에서 이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어느 정도 심문을 마친 하얼빈 영사관은 사건 이틀 뒤인 10월 28일 하얼빈 주재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의 명의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講淵孝雄]에게 신병과 사건 일체를 송치했다.



미조부치 검찰관에게 보낸〈안응칠 외 16명의 송치서〉에는 “안응칠 외 15명. 이 사람들은 이토 공작 살해 피고인 및 혐의자로 이 달 26일 재 하르빈 러시아 시심(始審) 재판소 검사로부터 이 사건에 관한 서류 일체와 함께 아래의 증거물이 본 영사관으로 송치됐으며, 메이지 42년 법률 제52호 제3조에 의거하여 이 피고사건은 외무대신의 명령에 의해 다시 귀청의 관할로 넘겨지므로 피고인의 신병과 함께 서류 및 증거물 전부를 송치한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구금된 안중근은 그곳 일본 관리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고, 4~5일 뒤에는 미조부치 검찰관에게 직접 심문을 받았다. 미조부치가 왜 이토를 해쳤느냐고 묻자 안중근은 거침없이 15가지 죄목을 밝혔다.



〈안중근이 지적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



1. 한국의 민씨 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과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를 속인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이는 죄
14.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인 태황제를 시해한 죄.



안중근의 논리정연한 진술에 미조부치 검찰관과 기록을 담당한 일본인 서기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중근의 박식과 이토 죄상에 대한 상세한 진술을 들은 미조부치는 “지금 진술한 것을 들으니 당신은 정말 동양의 의사(義士)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사는 절대로 사형을 받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진정어린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에 안중근은 “내가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소. 단지 이 뜻을 일본 국왕에게 속히 알려 이토의 못된 정략을 시급히 고쳐 동양의 위급한 대세를 바로잡는 것이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요”라고 말해주었다.



안중근이 밝힌 이토의 죄상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마지막 죄목은 약간 착오가 있었던 듯 하다. 오무로 무츠히토[大室睦仁] 황제의 아버지 아시카가 오사히토[足利統仁] 황제는 1866년 12월 하순에 죽었다. 이때는 이토 히로부미가 아직 궁중에 출입하기 전이었고, 이 무렵 이토는 고향에서 와병중에 치료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토의 죄는 14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의 재판을 어느 나라에서 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논의를 벌였다. 논란 끝에 재판의 관할지를 여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10월 27일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 카와카미 도시히코 하얼빈 총영사에게 이를 통보했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의 재판을 일본에서 하는 경우, 한국에서 하는 경우, 만주에서 하는 경우 등을 놓고 치밀하게 장단점을 점검했다.



‘첫째, 국제적 여론이 안중근 재판에 미칠 영향이다. 즉 일제는 일본 내에서 안중근을 재판할 경우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 관심이 안중근 재판에 집중되어 재판을 일제의 의도대로 이끌고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그 재판지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創知鐵吉 <한국병합 경위>).

둘째, 정치범에 대한 일본 외무성의 경험을 들 수 있다. 예컨대, 1891년 5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일제 현역 경찰관 쓰다[溧田三藏]에 의해 오쓰[大津]에서 피격당한 이른바 '대진[大津]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곤경에 처한 귀족원의장이자 궁중 고문관이었던 이토가 사법대신에게 쓰다를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 사형을 선고하도록 장기 지방재판소의 판사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선고 결과는 파렴치범이 아니라, '정치적 확신범'이라는 이유로 무기형을 선고하였다. 그 이유는 행정부의 요구를 수용하면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게 될 것이고, 또한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법 앞에 평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외무성은 정치범으로 취급하여 일본 국내에서 재판을 한다면 외무성의 의도대로 안중근에게 사형을 구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셋째, 일본 국내에서 재판은 재판관들의 합의제로 운영되는 반면, 관동도독부에서 재판은 재판관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고려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을 일본으로 소환하여 안중근 재판에 대한 외무성의 방침을 정하였고,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가 이라이시와 안중근 재판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의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한국통감부는 안중근 재판을 한국에서 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통감부는 안중근과 양위한 전 황제 고종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를 계기로 야기된 반일 국면을 타개하고 한국병탄을 가속화하려는 의도에서 안중근의 재판장소를 한국내로 옮기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결국 여러 가지 이해득실을 따진 끝에 안중근과 그 연루자 9명의 재판관할권을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점령한 중국 여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지정했다. 국제여론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단독 판사여서 일본 정부의 의지대로 조종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안중근은 1909년 11월 3일 연루자 일행과 함께 여순감옥에 수감되고, 다음날부터 12월 21일까지 4차례에 걸쳐 미조부치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또 한국통감부에서 파견한 사카이 경시에게 1909년 11월 26일부터 1910년 2월 6일까지 12차례 이상의 심문을 받았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