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앞세워서 괴롭히면 좋냐

반교2011.05.07
조회73

줄의 제 글을 다시금 보신다면

고쳐진, 아니 더해진 부분들이 있음을 아실 겁니다.

그 부분들은 곧 주석들입니다.

중심적으로 놓인 생각들(언급들)에 대해서

소재나 출처를 밝힌 주변적 주석들입니다.

 

바로 윗 줄의 제 글의 중요성은

글 내용의 생각들이 읽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며

게시판에 중요한 주제가 올려져 있어, 필수적이라 생각되는 요점을 더해드린 겁니다.

"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시면 마땅히도 이러한 생각들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라는 취지에서죠.

 

게시한 저나, 글을 원래 남기고 죽어 없어진 그들이나

사실은 여러분께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만일 그들과 저에 대해서 신경 쓴다면 그건 인물전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 속에 말씀이 있기보다는, 우리에게 대해서라면 확실하게

말씀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언제나 주제중심적이며, 모든 당파와 이권을 초월합니다.

생각에 동참하느냐가 진정한 관심사이고

그 생각들에 기준해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 다른 이들에 대해 비평하는 일은 주변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삽니다.

만일 님께서 시몬느라는 이름 없이도 시몬느의 생각을 평소 품고서 살아오셨다면

그것은 바로 생각의 수준에서 님이 시몬느의 환생이라는 것이 됩니다.

 

생각들은 환생을 원합니다.

이 점은 시몬느도 저와 공감할 것이면서

첫 눈에 그와 서로 교감이 됨을 확인한 사항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당시에 그의 여러 생각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범주와 요점상 저의 영역인 것은 알았습니다.

세상을 살고 다시금 확인하니 이해가 확실하게 진전돼 있고

역시 시몬느의 결론적 생각들은 저의 결론이 될 것들이었음이 맞았습니다.

다만 그 결론적인 생각들 사이 현실적인 연관성을 과거엔 쫓지 못했을 뿐입니다.

 

영국의 워즈워드는 적었지오

시인이 영감을 기다리며 밤의 적막 속에 앉아있다고.

시몬느는 언제나 생각들을 기다렸으며

시몬느는 자신이 아닌 그 생각들이 세상에 자라기를 원했습니다.

저도 똑같은 심정으로 살아왔지오.

그 생각들이 어떻게 전해지는가에 따라서

개인인 저의 삶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전혀 학문적 사항이라기보다 삶의 문제이기에

절대적으로 의사진행적인 것이며

말초신경이 둔한 또는 말초신경의 분화가 덜 된 비사회적인 저로서는

일찌감치 제 게시물의 내용에 분명하게 주석을 달지 못하였음에 대해

여러분께 미안해 하면서도 관용을 청합니다.

과거에도 어디에선가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고

당시 제 소감은 '생각들과 생각들 사이 인물들이 끼임은 초점일탈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텍스트들 사이에 컨텍스트들이 끼는 것이죠.

저는 대학교 과정에서 주석 달기를 매우 회피하곤 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말하여지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누구의 이름으로 말하여지는지 공공연히 관심이 모아지면 사실상 본래 그 생각들은 부차가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팬클럽이고 불교는 부처님 팬클럽이고 유교는 공자 팬클럽.. 다 좋습니다.

허나 결정적으로 말해 인도의 라다 소아미 스승께선 일침을 주셨습니다.

" 구루라고 불리는 나의 몸 자체는 결코 말씀이 아니다. 말씀은 그 몸 속에 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모두에게 있다. "

가장 객관적인, 종교들에 대한 신앙적 가르침입니다.

저는 애정에 의해 또는 절개에 의해 구원을 쫓진 않으며, 가르침을 통해서 쫓습니다.

하느님 또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총애하시는 스승들을 통해서 주어지며

제자들은 오로지 스승과 같아지어 그 가르침을 체화하고 궁극에 하나님께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인들 중에 대표적이며, 물론 질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저에 의해선 생각되길 최소한

" 예수는 모든 성인들 가운데의 화제가 된다. "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가장 유명하기에 그렇지오.

유대의 구약 성서는 인류사상 가장 순수히 윤리적 추구를 강조하였으며

유대의 신약 성서는 그런 순수한 윤리추구에 관련하여 개인의 우월성을 지적해 줬습니다.

" 집단에 의해 판단이 진행되는 윤리적 결정보다, 개인이 기다리는 순수한 영적 지식이 우월하다. "

 

영적 지식이라는 것은 생각들 자체에 대한 의식과 앎이라는 의미입니다.

생각이 은혜 속에서 누군가를 통해서 내리는데 그 누군가가 과연 중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군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겐 중요하나, 그 사람 죽은 뒤에는 생각만이 남게 됩니다.

그 생각들도 심지어 왜곡되곤 합니다, 그 누군가가 더 이상 존재치 않기 때문이지오.

만일에 어떤 제자가 죽은 스승을 대신하여 생각을 받게 된다면

그는 곧 매우 훌륭한, 고작해 다음 사람이면서 허나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지오.

 

종교집단들이 정치적인 활동까지 일삼는다면

스스로 신앙적인 바탕이 부족함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 종교집단들이 정치적이기까지 할 때에

그 집단들에 소속된 개인들은 본질상 덜 정치적이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이 사회에서 주권자들인 개인들은 정치적 힘을 잃고

단적으로 말해서 가문(家와 門)들의 지배가 계속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물집단 곧 기초사회단위 가정이라는 것에

확실하게 의거할 수가 있도록 적응하지 못한 과거상

가정을 넘어 부족이라는 즉 가문이라는 것에까지 의존하기는 커녕

이 사회의 모든 이들을 철저하게 주권적 개인들로서 상대하려 합니다.

더 이상 주관이라는 것을 그 어느 집단에게도 위탁하지 말았음 합니다.

그래서 여러 현실적 조건 가운데 저는 노숙자로서

모든 개인을 일 대 일로 여기며 가차없이 그들의 배경보다 그들 각자를 더 앙망합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저의 스승인 인도 구루지부터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 내 몸이 스승인 것이 아니다. 이 몸 속에 살아계시는 말씀 그것이 스승이다. "

언제 우리가 성스러운 몸들을 갖고 애정편력 펼치며 하나님 아래 당파 싸움을 해야 합니까?

물론, 전투를 지원하는 교회 세계연합이라는 매우 우스꽝스런 단체가 있다고는 하지만.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란 사실을 그들조차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스승은 신의 화신으로서 기대되는 존재들이며

모든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오로지 일대 일로서 독대하기를 희구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하여서 시몬느도 일전에 말했지오

" 신과 세상 사이에서 난 없어지려한다. "

신앙의 차원에서, 개인은 텍스트요 집단은 칸(간)텍스트입니다.

개인은 본론이요 집단은 주석입니다.

생각은 진상이요 몸은 주변입니다.

 

 

 

 

 


 
 

그대에게 나는 동반자.
그대 아닌 이성에게 나는 인질- 나를 잡고 나를 위협한다.
나에게 있는 나를 구속시키고 지울 순 없다.
그대와 나는, 지구를 같은 시간에 가르며 움직이고 있다.
'나'와 또 다른 '나'의 공시(共時), 부인할 수 없다.
이상(전체)과 현실이 겹칠 수 없어도,
이상의(전체에서의) 초점을 가상하며 최선의 광선을 비추리라.
진정한 순수를 위하리.
세상의 모범이 되리다.
- A.D.1994.8.26.쇠.
그러한 연정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