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3신민회의 반일운동 ⑴

대모달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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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전국적인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조직

 

신민회(新民會)는 일반적으로 1907년 4월에 이종일(李種一)의『묵암비망록(默菴備忘錄)』을 인용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우강(雩岡) 양기탁(梁起鐸), 추정(秋汀) 이갑(李甲),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전덕기(全德基), 춘교(春郊) 유동열(柳東說) 등이 창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정규(李丁奎)는「우당 이회영 약전(友堂李會榮略傳)」에서 우당이 이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적었다. 신민회의 회원이었던 이관직(李觀稙) 역시「우당 이회영 실기(友堂李會榮實記)」를 통해 신민회를 조직한 실질적인 인물이 우당이라고 밝혔다.

 

신민회는 비밀 행동을 위해 회원을 매우 신중히 선정했기에 회원 수가 많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후 회원으로 가입한 지사(志士)들은 백범(白凡) 김구(金九)·계원(桂園) 노백린(盧伯麟)·시당(時堂) 여준(呂準)·중파(中波) 김진호(金鎭浩)·김형선(金炯善)·이관직 등이다. 신민회 규약은 다음과 같다.

 

‘하나, 회원은 조국 정신을 굳게 지키고 조국 광복에 헌신하여 충성을 다할 것.

하나, 회원은 조국을 위했던 선현선열(先賢先烈)을 반드시 계술(繼述)할 것.

하나, 회원이 만일 본회를 배반하였을 때는 어느 때든지 그 생명을 빼앗길 줄 알 것.

하나, 회원은 본회의 비밀을 엄수할 것이며 만일 탄로났을 때는 해당자는 혀를 깨물고 말하지 말 것.

하나, 회원은 달고 쓴 생활과 힘들고 편한 활동을 다른 회원들과 함께 할 것.

 

신민회는 반일사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기관지로 정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만행과 매국노 친일파들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는 반일운동가의 양성을 위해 상동교회(尙洞敎會)에 청년학원을 설립하여 학감을 맡았다. 학교 교사로는 이동녕·전덕기·김진호·이용태 등이었으며 모두 신민회에 가입했다. 이어 우당은 이동녕·안창호·이승훈·박승봉 등 여러 동지들과 논의하여 김사설을 평양의 대성학교에, 이강연을 청주의 오산학교에, 이관직을 안동 협동학교로, 여준을 상동청년학원에 각각 파견하기로 했다. 이처럼 전덕기가 있던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은 신민회 간부들의 비밀회합 장소이면서 전국 규모의 반일운동 지도부 역할을 했다.

 

우당은 또 대한제국군 장교였던 이관직과 김형선·윤태훈 등과 만나 만주에서의 독립군 양성문제를 깊이 논의했다. 그는 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멀지 않은 장래에 만주 지방에서 독립군을 양성해야겠으니, 세 분 동지는 이에 뜻을 같이하여 한국의 해산된 군인들 가운데서 애국자들을 만주로 많이 건너가도록 권해줄 것을 미리 부탁한다.”

 

세 사람은 모두 이회영의 뜻에 순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무렵 우당은 의병대장이던 성재구·이기영 등의 동지를 앞세워 지방 의병 부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의병항쟁에 필요한 많은 경비를 대느라 무수한 고초를 겪었다고 하는데, 이른바 귀족이나 부호로 불리는 사람들을 찾아가 회유하거나 때론 협박을 하여 자금을 만들기도 했다. 나아가 지방 부호들을 움직이려면 고종 황제의 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궁중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는 정보기관을 총동원해 신민회의 비밀 반일운동을 철저히 통제했다. 또한《대한매일신보》사장 베델(Bethell)을 소송·재판하여 감금 3개월에 처한 후 상하이로 쫓아버렸다. 사장이 바귀고 얼마 후 양기탁도 해외로 망명하먄서《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기관지로 변모한다. 더군다나 신민회는 비밀결사단체였기 때문에 회원의 입회를 엄중히 가려서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이에 국외로 나가는 사람은 많고 새로 입회하는 사람이 없어 자연히 폐회되고 말았다.

 

신민회의 활동이 점차 무기력해지자 우당은 1908년 여름,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결심하고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을 만났다. 당시 보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滿) 등과 더불어 항카호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의 땅 45방(方)을 사서 1백여 가구의 교포를 이주시키고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한흥동은 글자 그대로 ‘한민족이 부흥하는 마을’이란 뜻이었다. 이국 만리타향으로 우당이 찾아왔으니, 보재의 반가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보재는 그동안 세계를 돌며 보고 들은 국제 정세를 우당에게 전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에 복선을 부설하고, 무기도 서둘러 제조하고 있었다. 또한 만주와 몽고 국경에 많은 군대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본에 대한 전쟁 준비때문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져 자기들의 동양 진출에 장애가 되자 일본을 좌절시키려 했고, 중국 또한 일본을 원수(怨讐) 보듯 했다.

 

보재는 중국과 미국, 러시아가 일본의 북진을 경계하고 있으므로 곧 동양에 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일본과의 대전에 맞추어 그동안 양성한 국내외의 독립군으로 호응하여 조국 광복을 기하자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토의 끝에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 교육을 장려할 것,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할 것,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할 것, 운동 자금을 준비할 것’ 등의 네가지 반일운동 방침을 정했다.

 

우당은 귀국후 계획을 곧바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횡행하는 시대에 국제 여론이나 동정심에 호소하는 방안으로는 독립에 전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②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떠나다

 

채근식(蔡根植)의『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의 비밀회의가 열렸으니…이 회의에서 결정한 안건은 독립군 기지 건설건과 군관학교 설치건이었다…그리하여 동년 여름에 간부 이회영·이동녕·주진수·장유순 등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적당한 지점을 매수케 하였다.’

 

이처럼 신민회는 만주로의 집단 망명과 독립군 기지 건설을 결정하고 직접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 계획에 따라 남만주에는 1909년 10월경 최명식(崔明植)이 답사를 마쳤다.

 

우당은 만주로 떠나기 전에 서울 시내에서 큰 동란을 일으키기로 동지들과 모의하고 성재구·이기영 등 의병항쟁 관련 동지들을 통해 지방 의병대 중 장사들을 특별히 모집하도록 요청했다. 이들은 자금이 입수되는 대로 일정한 날에 서울 부근에 집합하여 거사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도 그해 8월 29일에 일제가 한국 병탄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

 

우당은 이제 삼천리강토가 일제(日帝)의 무력(武力)에 의해 유린된 상황에서 더 이상 국내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울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후 그는 남산을 굽어보면서 동지들에게 말했다.

 

“삼천리 기름진 강토는 도둑의 이빨에 씹혀 삼킨 바가 되었고, 반만년의 신성한 한민족은 검은 잠방이(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홑바지)를 입은 야만족에게 붙들려 노예가 되었으니 이는 천추만세(千秋萬歲)에 치욕이요, 분한(憤恨)이다. 우리 2천만 동포는 총궐기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왜적(倭敵)에 분투하여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

 

그는 동지들에게 1910년 겨울 안으로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와 일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8월 어느 날 석오(石梧) 이동녕(李東寧)과 야은(野隱) 장유순(張裕淳), 제자인 청년 이관직(李觀稙)을 대동하여 상인으로 가장하고 떠났다. 이들은 상인들처럼 물건을 어깨에 매고 일본 군경의 감시망을 돌파하여 초산진(楚山鎭)으로 가 어둠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일행은 안동현(安東縣)에서 500리 되는 횡도촌(橫道村)에 도착해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석오의 친족을 미리 안착시쳤다. 그 식구에게 앞으로 올 많은 동지들의 편의를 제공해줄 것을 부탁하고 양곡과 김치도 미리 여러 독 준비하게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일행은 주위 산하를 세밀히 정찰한 다음, 국내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만주 이주를 위해서는 막대한 운동 자금이 필요했다. 우당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형제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형인 이건영(李健榮)·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과 자신의 아랫동생들인 이시영(李始榮)·이호영(李頀榮)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는 통절하게 설명했다.

 

“슬픈 일이외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 공신의 후예여서 국은과 세덕(世德)에 일세에 관(冠)하였다고 일컫고 있소이다. 그러므로 우리 6형제는 국가로부터 동휴척(同休戚)할 지위에 있습니다. 이제 강제 병합의 괴변을 당하여 반도 산하의 판세가 왜적(倭敵)에 속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당당 명족(名族)으로 대의소재(大義所在)에 영사(寧死)일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도(苟圖)하면 어찌 금수(禽獸)와 다르리오? 이때에 우리 형제는 당연히 생사를 막론하고, 처자 노유를 인솔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차라리 중국인이 되는 것이 좋을까 하오이다. 또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고 근역(槿域)에서 운동하던 제사(諸事)를 만주로 옮겨 실천코자 합니다. 만일 다른 해에 행운이 닥쳐와 왜적을 파멸하고 조국을 광복하면, 이것이 대한(大韓)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이항복(李恒福) 공의 후손된 도리로 생각합니다. 원컨대 백중계(伯仲系) 모두는 이 뜻을 좇으시지요.”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강조한 우당의 발언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비장해 듣는 모든 형제들이 우당의 제안을 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하여 이회영 일가는 가산과 전답을 모두 팔아 나라를 떠나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대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에 우당의 나이는 44세였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친일파의 기세가 등등하고 살기가 날카로웠던 시절, 6형제가 비밀리에 망명 준비를 하려 하니, 어려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적지 않은 가산이라 서둘러 헐값에 처분하는 데도 근 한달이나 걸렸다. 서울의 집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에게 팔았다. 우당 이회영은 집과 함께 집안에 내려오던 수많은 고서들도 그에게 주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회영 일가는 약 40만냥의 거금을 마련했다.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해 따져보면 수백억원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우당과 그의 형제들은 온 가족을 이끌고 집단 망명길에 올랐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이들의 집단 이주 소식을 듣고 이렇게 칭송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과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국경지대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내왕이 쉽지 않았다. 강을 넘어 만두로 들어간 한국인들이 독립군으로 변해 강을 넘어왔기 때문에 경계가 삼엄했다. 우당의 아내인 이은숙은「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통해 국경을 넘어 이주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 우리 동지는 서울서 오전 여덟시에 떠나서 오후 아홉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에 몇 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숙했지만, 새벽 세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인 노동자가 강빙(江氷)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시간만에 안동현에 도착한다. 그러면 이동녕(李東寧)씨 매부인 이선구(李善構)씨가 마중나와 처소로 간다’

 

이선구가 운영하는 주막은 신민회의 비밀 연락처로서 신민회원과 이들에게 소개받은 독립운동가들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곳이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 육군장성 출신인 데라우치[寺內正毅] 한국통감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인 이완용(李完用)은 ‘일한병합에 관한 조약’이란 제목의 문서를 작성했다. 두 사람만 모여 있어도 일본 헌병의 심문을 받을 만큼 엄중한 일제의 감시 속에서 조인된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에 의해 대한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성계(李成桂)가 1392년에 건국한 조선왕조는 518년만에 일제의 침략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끌려 내려오게 되었다. 이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해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법무대신 조중응(趙重應)·시종무관장 이병무(李秉武)·승녕부총관 조민희(趙民熙) 8인을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 일컫는다.

 

특이한 것은 조선의 최상위층 계급인 양반(兩班) 다수의 반응이었다. 의병항쟁에 참전했던 일부 양반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양반은 침묵하거나 오히려 일제의 강제적 조선 흡수에 협력했다. 그것도 나라가 망할 당시에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 출신 양반들이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자기 부정에 앞장섰다.

 

조선총독부『관보(官報)』와『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이회영 일가가 망명하기 두 달 전쯤인 1910년 10월 7일 총 76명의 양반이 이른바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수여받은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후작(厚爵) 여섯 명, 백작(百爵) 세 명, 자작(子爵) 스물두 명, 남작(男爵) 마흔 다섯명으로 구성된 합방공로작은 한마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매국노들에게 일제가 수여한 것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조카인 이재완(李載完)과 철종(哲宗)의 사위인 박영효(朴泳孝) 같은 왕족들이 후작의 작위를 받았고, 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 같은 친일대신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나마 남작은 한국병탄에 실제 공로가 있는 인물도 있었지만 명망 있는 양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수여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마흔다섯 명의 남작 수여자 중에는 김석진(金奭鎭)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작위를 거부한 인물도 있었고, 김사준(金思濬)·김가진(金嘉鎭)처럼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작위가 삭탈된 인물도 있고, 이용태(李容泰)·조동희(趙冬曦)처럼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작위가 박탈된 인물도 있고, 민영달(閔泳達)·유길준(兪吉濬)·한규설(韓圭卨)·윤용구(尹鎔球)·홍순형(洪淳馨)·조경호(趙慶鎬)·조정구(趙鼎九)처럼 훗날 작위를 거부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인물은 모두 합쳐도 열세 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작위 수여에 감읍했다.


일제는 ‘합방공로작’ 수여 다음날, 1천 7백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각 지방장관에게 내려 양반·유생들에 대한 자금으로 사용하게 하고 친임관(親任官)이나 칙임관(勅任官) 등에게도 막대한 액수의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주었다.

 

유림 출신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지사(志士)는『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에서 이 때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왜정(倭政)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

 

나는 혹 이런 자들을 만나면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돈에 팔려서 도적에게 아첨하는 자는 바로 개나 돼지다. 명색이 양반이라면서 효자 열녀 표창에 뛰어든단 말이냐?"

 

그리고 늘 "망국선망사대부(亡國先亡士大夫:나라가 망하니 양반이 먼저 망해서) 양정무도반최노(梁廷舞滔半崔盧ː양정에 춤추는 자들 대부분 최가와 노가이더라)"라는 시구를 옲으며 통곡하였다.’

 

심산이 읊은 시구는『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이자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자살한 황현(黃玹:1855년~1910년)의 것으로서 당나라가 망했는데도 대표적인 귀족들인 최씨나 노씨들이 오히려 양나라에 빌붙은 것을 풍자한 내용이다.

 

이처럼 집권 노론 대다수가 일제에 협력하던 때에 발생한 이회영 일가의 집단 망명은 일제와 지사들 양측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임시정부 고문을 지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의 며느리로서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정정화(鄭靖和)는 자서전『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일본은 당시 독립운동에 귀족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대외에 내세웠었다”라고 회상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은 양반이 아닌 상민이나 천민들이 하는 것이라고 은근히 비하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제의 그러한 선전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 간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양반 사대부 계급은 의병항쟁을 지휘했던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새 왕조 아래에서도 지배층의 지위를 누리면 그만 아니냐는 속내였던 것이다. 작위를 받은 인물의 3분의 2 이상이 당시 집권당인 노론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은 사실상 집권당인 노론이 팔아먹음 셈이었다.

 

그런데 집단 망명을 단행한 이회영 일가는 소론(小論)의 대표적인 집안이었다. 노론에서는 아무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고 오히려 이완용·송병준·조중응 등처럼 매국에 앞장선 상황이었다. 그런 때에 소론의 대표격인 이회영 일가의 집단 망명은 내외에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회영 일가와 함께 망명한 이동녕·여준·이상룡·김동삼 등은 모두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나 남인 계열 인사들이었다. 나라는 집권 노론이 말아먹고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남인이 독립운동에 나서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회영 일가의 망명 자금은 둘째 형 이석영의 동참이 있었기에 가까스로 마련할 수 있었다. 이석영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서 그에게서 물려받은 가옥과 토지를 모두 팔아 만주 망명에 동참했다. 신민회에서 각출하기로 한 자금이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거두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석영의 재산이 독립군 기지 건설에 절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장 추울 때인 12월 30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 일행은 1월 초순 안동을 지나 7, 8일만에 환인현(桓仁縣) 황도촌(黃道村)에 도착하여 얼마를 머문 후 다시 출발했다. 노소 가릴 것 없이 영하 20~30도의 추위 속에서도 새벽 네 시부터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여자들은 마차 안에 태우고 남자들은 스스로 말을 몰아 길을 재촉했다. 이곳이 이들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횡도천을 지나 500~600리나 되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향했고, 최종 목적지인 추가가(鄒家街)로 향했다. 이때가 이미 2월 초순이니, 서울을 떠난 지 꼭 한달여만에 대장정을 마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만주행 앞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무렵 만주로 망명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남긴 시는 흡사 우당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旣奪我田宅  이미 내 땅과 집 빼앗아 가고,

婦謨我妻弩 다시 내 아내와 자식 해치려 하네.

此頭寧可斫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此膝不可奴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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