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일본군에게 피비린내나는 진압을 당한 후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속속 국경을 넘어 중국 동북 지역으로 왔다. 그들은 연길(延吉)·집안(輯安)·통화(通化)·환인(桓仁)·관전(寬甸)·흥경(興京) 일대에서 계속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였다. 동북 지역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은 그들의 활동을 억제했지만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은 갈수록 더욱 크게 발전했으며, 흥경의 조선인들도 반일운동에 열성껏 가담했다.
흥경에서 조선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은 왕청문(汪淸門)으로, 이곳은 비교적 큰 도시였다. 조선 사람들이 이 고장에 자리잡게 된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청(淸) 덕종(德宗) 재위기에 영국 사람들이 왕청문에 교회를 세웠는데, 당시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교회에 많이 다녔다. 일부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조선인들이 유랑을 하다가 이곳에 교회당이 있음을 우연히 발견하고 관계를 가지면서 영국인 신부와 교인들의 협조를 받아 황무지를 사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 발생한 의화단봉기(義和團蜂起)로 교회가 불타자, 중국과 조선의 교인들이 함께 힘을 모아 교회를 새로 지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조선인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어 조선인들을 받아들였다. 이 고장에 조선인이 점점 많아지자 곧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흥묘자(興廟子)와 통화의 대전자(大甸子), 환인의 향수하자로부터 점차 유하(柳河)·관전 등지로 이주해 갔다. 왕청문이 조선 사람들의 집단거주 지역으로 이루어지면서 한때 이곳이 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정치·문화·경제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고 나서 이 고장의 조선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 광복을 위한 정치 활동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일제의 한국강점 후 정치단체는 점점 더 늘어났고, 동시에 수시로 합쳐지고 나눠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기원파(紀元派)와 민국파(民國派)로 갈렸다가 후에 각종 단체가 속속 만들어지고 게다가 외부의 단체들도 이 고장으로 옮겨와 활동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경학사(耕學社)·한족회(韓族會)·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은 앞서 이미 말한 바 있다. 1920년 가을 이후 왕청문 지역에 이상룡(李相龍)·여준(呂準) 등을 중심으로 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는 1919년 11월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만들어진 군정부(軍政府)였다. 1921년 5월에는 현익철(玄益哲)·현정경(玄正卿) 등이 중심이 된 광한단(光韓團)이 관전현 향로구에서 조직되었으며,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석영(李石榮)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20년 유하현에 세워졌다. 오동진(吳東振)이 이끄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은 1920년 6월 유하의 화사구에서, 안병찬(安秉瓚)이 지도하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는 1919년 11월 관전현 홍통구에서, 김중량(金仲亮)이 지휘하는 보합단(普合團)은 1920년 8월 관전현에서 각각 구성되었다. 그 밖에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통련제(通聯制)와 같은 조직도 생겨났다.
이러한 결사단체들은 조선의 독립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정치적 관점이나 목적은 조금씩 달랐다. 어떤 단체는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 독립을 쟁취하면 조선왕조를 재건해야 한다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주장했고, 어떤 단체는 조국이 해방되면 미국과 같은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어떤 단체는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 평등을 구현하자는 사회주의(社會主義) 이념을 강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단체는 1919년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를 무조건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사단체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는데, 어떤 단체는 자주 집회를 열었고 어떤 단체는 집집마다 다니며 자기들의 이론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인식이 서로 다른 이들 단체 사이에는 의견 대립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 무력총돌이 오가는 일도 있었다.
양세봉은 이러한 독립운동 조직의 영향을 받아 애국심이 더욱 강해졌으며,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적극 도왔다.
이러한 독립운동 조직은 내부에서 경비를 조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는 경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는 남만주 조선인들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었는데, 양세봉은 통군부의 지역 단원으로서 사도구와 금구자의 조선인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곡식을 모았다. 그는 모은 곡식을 사도구에 있는 정재생의 집에 맡겨 두었다.
정재생은 남몰래 이 곡식들을 바깥으로 빼돌렸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흥경현의 보안대장 백수채가 대원들을 데리고 와서 정재생의 집에 남은 곡식 몇십 석을 전부 몰수해 갔다. 이렇게 되니 통군부의 일부 대원은 “양세봉이 정재생과 짜고 우리 독립군을 속였다. 양세봉과 정재생 일가를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밤 통군부의 1개 소대가 금구자에 있는 양세봉의 집을 향해 움직였다. 마음씨 좋은 한 노인이 이 소식을 듣고 먼저 양세봉의 집에 달려와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세봉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사정을 말하고 황급히 집을 떠나 몸을 피했다.
몸만 간신히 도망쳐 나온 양세봉은 풍찬노숙하면서 보름 넘게 걸어 고향인 철산군으로 돌아갔다. 고향은 이미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중국 동북 지역으로 떠나고 없었다. 소년 시절의 친구들 중에는 독립군에 가담한 사람도 많았다. 고향 마을에는 노인과 어린이, 그리고 병자와 아낙들만이 남아 있었다. 며칠 묵은 후 세봉은 이곳이 더 이상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여기고 다시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2. 만주 땅을 유랑하다 ⑹
★ 가족과 헤어지다
3·1운동이 일본군에게 피비린내나는 진압을 당한 후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속속 국경을 넘어 중국 동북 지역으로 왔다. 그들은 연길(延吉)·집안(輯安)·통화(通化)·환인(桓仁)·관전(寬甸)·흥경(興京) 일대에서 계속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였다. 동북 지역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은 그들의 활동을 억제했지만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은 갈수록 더욱 크게 발전했으며, 흥경의 조선인들도 반일운동에 열성껏 가담했다.
흥경에서 조선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은 왕청문(汪淸門)으로, 이곳은 비교적 큰 도시였다. 조선 사람들이 이 고장에 자리잡게 된 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청(淸) 덕종(德宗) 재위기에 영국 사람들이 왕청문에 교회를 세웠는데, 당시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교회에 많이 다녔다. 일부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조선인들이 유랑을 하다가 이곳에 교회당이 있음을 우연히 발견하고 관계를 가지면서 영국인 신부와 교인들의 협조를 받아 황무지를 사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 발생한 의화단봉기(義和團蜂起)로 교회가 불타자, 중국과 조선의 교인들이 함께 힘을 모아 교회를 새로 지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조선인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어 조선인들을 받아들였다. 이 고장에 조선인이 점점 많아지자 곧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흥묘자(興廟子)와 통화의 대전자(大甸子), 환인의 향수하자로부터 점차 유하(柳河)·관전 등지로 이주해 갔다. 왕청문이 조선 사람들의 집단거주 지역으로 이루어지면서 한때 이곳이 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정치·문화·경제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고 나서 이 고장의 조선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 광복을 위한 정치 활동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일제의 한국강점 후 정치단체는 점점 더 늘어났고, 동시에 수시로 합쳐지고 나눠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기원파(紀元派)와 민국파(民國派)로 갈렸다가 후에 각종 단체가 속속 만들어지고 게다가 외부의 단체들도 이 고장으로 옮겨와 활동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경학사(耕學社)·한족회(韓族會)·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은 앞서 이미 말한 바 있다. 1920년 가을 이후 왕청문 지역에 이상룡(李相龍)·여준(呂準) 등을 중심으로 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는 1919년 11월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만들어진 군정부(軍政府)였다. 1921년 5월에는 현익철(玄益哲)·현정경(玄正卿) 등이 중심이 된 광한단(光韓團)이 관전현 향로구에서 조직되었으며,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석영(李石榮)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20년 유하현에 세워졌다. 오동진(吳東振)이 이끄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은 1920년 6월 유하의 화사구에서, 안병찬(安秉瓚)이 지도하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는 1919년 11월 관전현 홍통구에서, 김중량(金仲亮)이 지휘하는 보합단(普合團)은 1920년 8월 관전현에서 각각 구성되었다. 그 밖에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통련제(通聯制)와 같은 조직도 생겨났다.
이러한 결사단체들은 조선의 독립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정치적 관점이나 목적은 조금씩 달랐다. 어떤 단체는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 독립을 쟁취하면 조선왕조를 재건해야 한다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주장했고, 어떤 단체는 조국이 해방되면 미국과 같은 민주공화정(民主共和政)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어떤 단체는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 평등을 구현하자는 사회주의(社會主義) 이념을 강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떤 단체는 1919년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를 무조건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결사단체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는데, 어떤 단체는 자주 집회를 열었고 어떤 단체는 집집마다 다니며 자기들의 이론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인식이 서로 다른 이들 단체 사이에는 의견 대립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 무력총돌이 오가는 일도 있었다.
양세봉은 이러한 독립운동 조직의 영향을 받아 애국심이 더욱 강해졌으며,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적극 도왔다.
이러한 독립운동 조직은 내부에서 경비를 조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는 경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는 남만주 조선인들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었는데, 양세봉은 통군부의 지역 단원으로서 사도구와 금구자의 조선인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곡식을 모았다. 그는 모은 곡식을 사도구에 있는 정재생의 집에 맡겨 두었다.
정재생은 남몰래 이 곡식들을 바깥으로 빼돌렸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흥경현의 보안대장 백수채가 대원들을 데리고 와서 정재생의 집에 남은 곡식 몇십 석을 전부 몰수해 갔다. 이렇게 되니 통군부의 일부 대원은 “양세봉이 정재생과 짜고 우리 독립군을 속였다. 양세봉과 정재생 일가를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밤 통군부의 1개 소대가 금구자에 있는 양세봉의 집을 향해 움직였다. 마음씨 좋은 한 노인이 이 소식을 듣고 먼저 양세봉의 집에 달려와 알려주었다. 소식을 들은 세봉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사정을 말하고 황급히 집을 떠나 몸을 피했다.
몸만 간신히 도망쳐 나온 양세봉은 풍찬노숙하면서 보름 넘게 걸어 고향인 철산군으로 돌아갔다. 고향은 이미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고향을 등지고 중국 동북 지역으로 떠나고 없었다. 소년 시절의 친구들 중에는 독립군에 가담한 사람도 많았다. 고향 마을에는 노인과 어린이, 그리고 병자와 아낙들만이 남아 있었다. 며칠 묵은 후 세봉은 이곳이 더 이상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여기고 다시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