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속의 허무, 허무속의 영원(베를린 천사의 시/빔벤더스)

방영석201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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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속의 허무, 허무속의 영원

 

 

 

인간의 생은 유한하다. 지금껏 인간이 탐구한 수많은 주제중에서도 저 명제는 너무도 명확하다.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은 결국 죽는다. 인간이 저 명제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때는 오직 아이일때 뿐이다. 영화내내 어른들은 늘 불안해하고 포기하고 '죽어가고' 있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이 영위하는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있는 존재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자유로운 아이들은 때문에 천사인 다미엘을 지각하고 대화할수 있기까지 하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고 자라면서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은,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비극적이다. 작품 내내 되풀이되는 ‘아이가 아이었을때’를 회상하는 다미엘의 혼잣말은, 허무속에 사로잡히기 전의 인간이었던, 아이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극복하고 다시 아이처럼 살아갈 힘을 얻어내고자 하는 영화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무도 그 방법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천사인 다미엘 마저도...

 

때문에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순간 인간은 허무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으로 변하는건 순간이다. 때문에 천사 카시엘이 말하는것처럼 인간이란 존재는 적어도 영원속을 부유하며 인간을 관찰하고 보호하는 천사들의 시선으로 볼땐 “일시적이며 잘못을 되풀이하는 결핍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와 대비되는 천사들의 삶은 인간과는 달리 영원하다. 그들은 시간과 소멸의 고리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수많은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목격하며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기억을 공유하는 그들의 삶은 영화 속 카메라가 표현하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모든 것을 조망하는 압도적인 존재이며, 잘 정리된 도서관을 조망할 때 보여지는 명확한 직선의 흔들림 없는 구조이다. 자연스레 그들의 삶에는 고통이라는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삶과 대치되는 천사의 삶은 영원하지만 알맹이가 없다. 다니엘은 늘 인간의 곁에서 인간들의 말과 행동을 수집하고 좌절에 빠진 인간에게 희망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그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위치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판단할수 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압도적인 위치에서는 인간들의 삶에 직접 손을 뻗지 못한다. 때문에 다니엘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까지 완벽했던 천사로서의 삶에 의구심을 품는다. “보고있는 것이, 방관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라면, 이 영원한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프레임을 온통 흑백으로 가득 채우는 천사의 삶은 차분하게 진행되지만 간간히 보여지는 인간들의 삶을 조망하는 프레임속 색채가 가지는 생동감이 없다. 다니엘의 시선에서 관객은 완벽하게만 보였던 영화 속 천사의 삶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며 이때 화면을 온통 압도하던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에게 ‘압도’가 아닌 ‘의구심’으로 다가온다. 흑과백, 방관과 차분함만으로 도배된 저 프레임안 세상은 과연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완벽한 세상일수 있을까?

 

다미엘과 카시엘은 ‘영원’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두가지 시선을 대표한다. 둘은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애정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바라보는 방식에서는 정 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영화 속, 감독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런 두 천사의 태도와 행동에 숨겨져 있다.

 

카시엘은 인간의 '죽음'에 집중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존재는 유한하고 결핍되어있으며 숱한 역사동안 수많은 전쟁과 수많은 잘못을 되풀이하며 무너져 가는 약한 존재일 뿐이다. 때문에 카시엘은 그런 인간을 지탱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인간 주변을 배회하긴 하지만 그 인간에게 뛰어들어 인간과 직접 소통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는 천사의 눈높이에서 인간을 바라보았기에 결코 인간의 부조리함속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살하려는 인간을 말리지 못한뒤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카시엘의 모습과 이후 천사상에서 지상으로 수직으로 떨어져 가는 카시엘의 시선을 카메라는 지금까지의 차분하고 안정된 촬영기법과는 확연히 다른 거칠고 흔들리는 시선으로 프레임을 채운다.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 가운데에서 클로즈업된 카시엘의 얼굴과 부릅뜬 눈에서 관객은 인간에게 와 닿지 못하는 카시엘의 연민과 위태로운 인간의 얼굴을 마주한다. 프레임속 카시엘이 마주한것은 ‘죽음’이라는 인간의 얼굴이다. 카시엘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이런 시선을 바꾸지 않는다. 인간의 유한성과 그러한 유한성에 끌리는 이유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순간순간의 성찰로 표현하는 다미엘에 비하여 때문에 죽음이라는 명확한 명제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카시엘의 표현은 오히려 솔직하다.

 

반면 다미엘은 인간의 ‘가능성’에 시선을 맞춘다. 영원하지만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존재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 천사의 삶과는 달리, 다미엘이 바라본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명확하게 손에 잡을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해고에 직면한, 외롭고 쓸쓸한 마리온은 오늘도 등에 거짓 날개를 달고 그네를 탄다. 그녀는 항상 날고자 하지만 결코 날수 없는 존재이다. 늘 좌절하고 부딪히며 절망하는 그녀의 모습은 얼핏 카시엘이 쓸쓸히 바라보았던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잡아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끊임없이 절망하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를때, 그녀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계속해서 목이 부러지는 죽음과 결핍만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은 “마지막일지라도, 오늘의 무대에서 난 다시 날아오를거야”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변한다.

 

어디 마리온 뿐이었겠는가? 죽음을 생각하던 지하철의 남루한 남자에게서도, 방황하는 젊음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락음악 콘서트장에서도, 사고가 나 죽음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와 그런 남자를 향해 달려오던 소년의 얼굴에서도 카메라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그속에 숨겨진 인간의 또다른 얼굴을 관객들에게 살며시 드러내고있다. 거듭되는 실패와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소통, 이것이야말로 다미엘이 그토록 고민하던 “삶의 의미”와 살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미엘은 그런 마리온의 모습 속에서 진짜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사과하나 손으로 잡을수 없는 허무속에서 살고있고 거짓 날개를 등에단 마리온은 반대로 허무속에서 영원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카시엘은 인간의 삶에서 허무를 발견했지만 다미엘은 영원한 천사의 삶에서 허무를 발견했고, 그 허무속의 인간에게서 영원의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과 천사의 세계를 나누는 카메라의 색채와 시점의 차이는 이런 천사와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삶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천사의 세계를 잡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은 늘 무채색의, 그러면서도 위에서 아래로 조망하는 시선을 택한다. 마치 지상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보며 보호하는듯한 이런 구도에선 인간에 대한 애정을 찾을수 있을지언정 그 인간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아니, 화면 중간중간 삽입되는 전쟁과 폭력의 영상과 죽음을 직시하는 카시엘의 흔들리는 시선속에서는 오히려 중심을 잡지 못하는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적대적인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천사들의 세상에선 그 어떤 흔들림도 부정당하고 거부되는 존재이다. 그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시선은 마치 직선화된 정확한 도서관속 서가들처럼 이미 확인되고 긍정된 질서의 시선이었던 것이다. 관객은 이런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천사의 세계의 압도적인 영원성을 목도한다. 다만,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이 생각하는것 만큼 편항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이러한 카메라를 통해 완벽하게만 보이는 천사들의 영원성 속에 숨겨진 허무를 목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를 지배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매력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세계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천사의 세계와는 달리 끊임없이 흔들리고 인간의 눈높이를 제외한 어느것도 조망할수 없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천사와 인간의 시선의 높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 관객은 인간이 가지는 피할 수 없는 시야의 제한성을 목도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시선은 그 시선만이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을 프레임에 담아내고 있다. 인간의 세상을 지배하는 색채는 천사의 세계는 절대 담을수 없는 생동감을 부여한다. 관객이 실제로 바라보는 시선의 색을 담아낸 프레임은 생동감과 역동성을 지닐수 있게 되었고 롱샷에서 미디엄샷으로 시선의 높이를 낮추며 압도성을 잃었지만 반대로 보다 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심도있게 바라볼수 있는 깊이를 지니게 되었다. 관객이 천사의 비현실적인 시점을 벗어나 등장인물들과 마주보는 시점을 취할 때 비로소 위에서 제시했던 포기하지 않는 영원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소통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성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작품 전체를 꿰뚫는 두가지 방법의 촬영기법은 다미엘로 대표되는 등장인물들뿐 아니라 관객인 우리에게도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미엘은 천사의 직분을 포기하고 인간이 된다. 그는 영원을 포기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택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다미엘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프레임 안에서 또한번 마주친다. 숱한 방황과 고뇌속에 마침내 마주한 다미엘과 마리온의 얼굴에서 카메라는 예외적으로 마리온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끝까지, 불확실할지라도 나와함께 할수 있겠어요?” 마리온의 질문은 많은것을 함축하고 있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천사의 삶을 포기할만큼, 우리 불확실하고 때로는 불합리한 인간의 인생이라는 것은 가치있는 것인가? 마리온의 클로즈업된 눈과 입이 말하는 것은 비단 다미엘에게만 국한되는 질문이 아니다. 감독은 마리온의 얼굴을 통해 우리에게 우리의 생이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압도적이고도 직설적으로 묻고있는 것이다. 때문에 관객은 그런 마리온의 질문에 말없이 마리온을 껴안는 다미엘의 선택에 더욱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기실 저 시점을 기준으로 다미엘은 진정 천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스스로 마리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찰한다.

 

영화의 끝 무렵, 관객은 카시엘과 다미엘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감독이 관객에게 건네는 메시지를 마주한다. 끝까지 천사로의 직분을 다하고 일글어진 얼굴로 어렴풋한 빛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는 카시엘과 땅위에서 천장과 연결된 줄을 타고 마리온이 아름답게 ‘날수있도록’ 줄을 잡는 다미엘의 모습은, “나는 어제 영원을 발견했다. 한순간이지만 분명 영원이었다. 다시 마주할수 없다해도, 난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라는 다미엘의 마지막 말과 함께 관객이 감독이 숨겨두었던 저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을 찾을수 있게 한다. 영원하지만 비상의 이미지가 생략된 카시엘의 '날아감'과 불완전하지만 다미엘의 도움속에서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날고잇는' 마리온의 모습예서 우리는 어떤 이미지가 진정한 '비상'의 이미지라고 이야기 할수있을까? 영원한 천사의 삶은 그 영원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부딪히며 숨쉬는 소통의 가능성을 희생시켰고, 허무에 휩싸인 인간의 삶은 그 허무속에서 벌어지는 소통을 통해 짧게나마 영원을 잉태시켰다. 영원속의 허무와 허무속의 영원, 당신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선택을 할테지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사실은 그 선택보다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천사였던 다미엘은, 그리고 다미엘을 비롯한 많은 천사들은 인간의 소통 가능성을 목도하고 그 가능성을 위해 그들의 영원속의 허무를 희생했다. 그렇다면, 그런 허무속의 영원을 잉태하고 있는 나의 삶을, 나 자신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