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ㅡ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소망의 파편들이
안스럽게 쌓여 있다...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는 '삼국유사'가 태어난 곳이다.
고려 후기의 고승 일연(1206~1289)은
'풍수상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하여 인각사라 이름붙여진 이 절에서
생애 마지막 5년을 머물며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신라시대 지방 사찰로는 유례없이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데...
인각사는 숭유정책의 조선시대 들어 쇠퇴를 거듭했고,
특히 임진왜란 때 방화로 심하게 훼손됐다 전한다.
민족 정신문화의 요람인데...
지금의 인각사는 전각다운 전각 하나 없는, 그
저 시골의 한 작은 사찰에 불과하다.
창백하고 유배된 불심(佛心)이 떠돌다
헤체된 탑 사이로
수많은 인연들이 탑돌이 한다.
우리 신화와 설화를 만났던 삼국유사...
그리이스 로마 신화 만큼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의 산실인데
우리 것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처럼...
현대적 잔재의 벽과 창문,
생화가 아닌 조화의 헌화.
두동강 난 부처...
그래도,
초등학생 소년의 감탄사와 그리움은
둥근 사리로 남을 것이니...
"이제는 우리가 인각사를 따뜻하게 안아줄 차례다.
녹슬고 금 간 종소리조차 울려 퍼지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된 그 곳에,
새로 만든 종소리가 장중하게 퍼져 학소대 벼랑에 메아리치도록."
- '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을 쓴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티끌세상 꿈 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
방치된 인각사와 일연스님...
충렬왕이 청하던
그 때나 지금이나
이것이 민족과의 인연인지요? 스님!
그 섬에서 온 갈매기에게 주는
스님의 법어...
천축국 가는 순례자의 이야기에
밤을 세운 소년과의 조우...
솔바람 청청히 소리치는데
해야 할 천년의 이야기가 서러웠던...인각사
내 어머니 품 안 같은 신화의 세계...
자그마한 기념관에서...
일연스님의 시를 읽으며
인각사 뜰과 대웅전 계단을 오르내리셨을 스님을 그려본다.
만년에 노모를 모시며
이 인각사에서 세수를 다하시고 열반하신 곳이라 한다...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에라...
일연스님 詩로 마음을 추스리다...'일연선사 생애관'을 나와
비각 속의 깨어진
스님의 생애를 새긴 인각사비를 본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 1,904자를
하나하나 집자해 25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비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고난의 역사와 세월을 견뎌야 했다.
보기드문 명품으로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
그 탁본이 사신의 선물로 큰 인기를 끄는 바람에
무절제한 탁본으로 서서히 마멸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의해
땅바닥에 엎어진 채 탁본을 당하는 수모까지 당했다.
인각사비는 결국 1630년 이전에 여러 조각으로 깨지고 만다.
지나친 탁본의 노역에 시달리던 민초의
고의적 타격에 의한 것이라고
한 역사학자는 추론했다.
겁화가 모든 것을 살라 산하가 다 재가 되어도
이 비석은 홀로 남아,
이 글은 마멸되지 않으리...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서기 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그 뒤 고려 충렬왕 10년(서기 1284)에 일연 스님이 중창하고
우리의 과거·현재·미래 문화유산의 국보인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민족 역사적으로 그 의미와 가치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큰 성소라 할 수 있는데...
기와 위의 잡초는 무구무언(無口無言).
사찰 앞에는 수많은 백학이 살아
이름 붙여진 학소대가 있으며,
위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의 절경을 이룬다.
풍경이 흔들린다 / 이규리
어금니 하나를 빼고 나서 그 낯선 자리 때문에 여러 번 혀를 깨물곤 했다 외줄 타는 이가 부채 하나로 허공을 세우는 건 공기를 미세하게 나누기 때문, 균형은 깨지기 위해 있는 거라지만 그건 농담일 게다 한쪽 무릎을 꺾으면 온몸이 무너지는 건 짐승만의 일이 아니다
다친 무릎 끌며 가서 보았다 인각사 대웅전 기둥이 균형을 위해 견디고 있는 것을, 기우뚱해 있는 저 버팀목까지도 서로 다른 쪽을 위해 놓지 않고 있는 믿음을, 그 처마 끝에서 풍경은 그저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공기를 조절하며 처마를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소리내어 기둥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해야 할 천년의 이야기가 서러웠던 군위 인각사
[군위 여행] 해야 할 천년의 이야기가 서러웠던 군위 인각사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麟角寺).
군위읍의 남서쪽에 위치한 고로면 화북리에는 보각국사 일연이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썼다는 인각사(사적 374호)가 자리 잡고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
정사보다는 문화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살아있는 야사를 좋아해
언제부터 와보고싶던 곳인데...
지금은 법당과 두어 채의 건물만 남아 있어 썰렁함마저 느껴졌다.
"오랑캐 땅을 허덕이며 에둘러 다니다가
마침내 허름한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진실 행복이
처마 밑에 제비집처럼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윤후명/ '삼국유사 읽는 호텔' 소설 본문 中
스님의 부도탑과 비문인 보각국사탑과 보각국사비(보물 428호) 등도 있는데
비석의 돌조각을 갈아서 먹으면 장원급제 한다는 속설 때문에 형체가 많이 훼손됐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ㅡ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소망의 파편들이
안스럽게 쌓여 있다...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는 '삼국유사'가 태어난 곳이다.
고려 후기의 고승 일연(1206~1289)은
'풍수상 기린의 뿔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하여 인각사라 이름붙여진 이 절에서
생애 마지막 5년을 머물며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신라시대 지방 사찰로는 유례없이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데...
인각사는 숭유정책의 조선시대 들어 쇠퇴를 거듭했고,
특히 임진왜란 때 방화로 심하게 훼손됐다 전한다.
민족 정신문화의 요람인데...
지금의 인각사는 전각다운 전각 하나 없는, 그
저 시골의 한 작은 사찰에 불과하다.
창백하고 유배된 불심(佛心)이 떠돌다
헤체된 탑 사이로
수많은 인연들이 탑돌이 한다.
우리 신화와 설화를 만났던 삼국유사...
그리이스 로마 신화 만큼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의 산실인데
우리 것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처럼...
현대적 잔재의 벽과 창문,
생화가 아닌 조화의 헌화.
두동강 난 부처...
그래도,
초등학생 소년의 감탄사와 그리움은
둥근 사리로 남을 것이니...
"이제는 우리가 인각사를 따뜻하게 안아줄 차례다.
녹슬고 금 간 종소리조차 울려 퍼지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된 그 곳에,
새로 만든 종소리가 장중하게 퍼져 학소대 벼랑에 메아리치도록."
- '인각사, 삼국유사의 탄생'을 쓴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티끌세상 꿈 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
방치된 인각사와 일연스님...
충렬왕이 청하던
그 때나 지금이나
이것이 민족과의 인연인지요? 스님!
그 섬에서 온 갈매기에게 주는
스님의 법어...
천축국 가는 순례자의 이야기에
밤을 세운 소년과의 조우...
솔바람 청청히 소리치는데
해야 할 천년의 이야기가 서러웠던...인각사
내 어머니 품 안 같은 신화의 세계...
자그마한 기념관에서...
일연스님의 시를 읽으며
인각사 뜰과 대웅전 계단을 오르내리셨을 스님을 그려본다.
만년에 노모를 모시며
이 인각사에서 세수를 다하시고 열반하신 곳이라 한다...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에라...
일연스님 詩로 마음을 추스리다...'일연선사 생애관'을 나와
비각 속의 깨어진
스님의 생애를 새긴 인각사비를 본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 1,904자를
하나하나 집자해 25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비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고난의 역사와 세월을 견뎌야 했다.
보기드문 명품으로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
그 탁본이 사신의 선물로 큰 인기를 끄는 바람에
무절제한 탁본으로 서서히 마멸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의해
땅바닥에 엎어진 채 탁본을 당하는 수모까지 당했다.
인각사비는 결국 1630년 이전에 여러 조각으로 깨지고 만다.
지나친 탁본의 노역에 시달리던 민초의
고의적 타격에 의한 것이라고
한 역사학자는 추론했다.
겁화가 모든 것을 살라 산하가 다 재가 되어도
이 비석은 홀로 남아,
이 글은 마멸되지 않으리...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서기 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그 뒤 고려 충렬왕 10년(서기 1284)에 일연 스님이 중창하고
우리의 과거·현재·미래 문화유산의 국보인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민족 역사적으로 그 의미와 가치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큰 성소라 할 수 있는데...
기와 위의 잡초는 무구무언(無口無言).
사찰 앞에는 수많은 백학이 살아
이름 붙여진 학소대가 있으며,
위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의 절경을 이룬다.
풍경이 흔들린다 / 이규리
어금니 하나를 빼고 나서
그 낯선 자리 때문에
여러 번 혀를 깨물곤 했다
외줄 타는 이가 부채 하나로
허공을 세우는 건
공기를 미세하게 나누기 때문,
균형은 깨지기 위해 있는 거라지만
그건 농담일 게다
한쪽 무릎을 꺾으면 온몸이 무너지는 건
짐승만의 일이 아니다
다친 무릎 끌며 가서 보았다
인각사 대웅전 기둥이
균형을 위해 견디고 있는 것을,
기우뚱해 있는 저 버팀목까지도
서로 다른 쪽을 위해 놓지 않고 있는 믿음을,
그 처마 끝에서
풍경은 그저 흔들리는 게 아니라
공기를 조절하며 처마를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소리내어 기둥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가슴에 나무 한그루
무겁게 심고...
겨레의 얼을 문자로 꿰어낸 보배로운 신화의 고향,
군위 인각사를 떠나
도시로 귀향하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서 본 거대한 삼국유사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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