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일본제국 황군의 위엄

ㅎㅁㅀㄱㅁ4201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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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일본제국의 막강한 황군은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전투를 수행했고 그 중에는 정말 손으로 꼽을만큼 훌륭함을 발휘한 전투가 몇 번 있다.

 

1. 청산리 대첩 (1920년)[ 대한 독립군( 2000명~2500명) vs 일본군 (약 2개사단 20000명)

 

 

당시 간도 지역에서 유격활동을 하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과 일본군의 사소한 충돌이 일본을 자극하였고, 일본정부는 곧 대규모 병력을 급파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김좌진과 홍범도의 유인작전과 기습작전,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유격전에 말려든 일본군은 무려 13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2. 노몬한 전투(1939년) [ 소련군(57000명) vs 일본 관동군(75000명)

 

일본이 만주를 집어삼키고 소련과 국경을 접하게 된 이후, 소일 국경에서는 사소한 충돌이 발생했었다. 그러던 1939년 소수의 몽골군 기병이 일본쪽 국경을 침범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일본은 이를 불법 월경으로 간주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이를 지켜보던 소련은 몽골과 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보내 전투에 참여하였다. 전투 초기에는 일본군이 약간 우세를 점했었으나 후에 히틀러의 막강한 독일군을 막아낸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가 대장으로 파견되면서 일본군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압도적인 기갑전력(전차 550대)을 바탕으로한 소련군의 막강한 파상공세에 맞서 일본군은 보병 자살돌격, 대전차 총검술 같은 무모한 전술로 저항했으나 공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고 일본군은 2만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내고 급히 철수하였다. 

 

3. 임팔 작전(1944년) [ 연합군 (영국 연방군, 인도군) 15만명 vs 일본군 9만명 ]

 

1944년 미얀마를 거의 점령하고 인도 근처까지 전진한 일본군은 연합군과 대치하게 된다. 일본군과 연합군 사이에는 2km 에 달하는 강과 늪지대가 있었고 70km 가 넘는 산맥이 자리잡고 있어서 양 군대는 서로 먼저 공격을 하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는 1944년 3월 경 임팔 작전을 실행한다. 그러나 이 당시 일본군은 제공권은 물론 제해권도 미군에게 일찌감치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원활한 보급을 기대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이와같은 상황은 신경쓰지도 않고 무다구치 렌야는 "우리 일본 민족은 초식의 민족이다. 진군하면서 식량이 없으면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진하면 된다" 라는 걸작으로 남을 말을 남기고 작전을 실시한다.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진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연간 9000mm에 육박하는 임팔 지대의 말도안되는 강수량과 늪지대 그리고 연합군의 반격에 지옥을 경험한다. 일본군 사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사상자의 대부분은 전투보다는 기아와 전염병에 기인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피골이 상접한 병사들이 죽은 병사의 시체를 뜯어먹는 광경은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결국 일본군은 작전 개시 20일만에 전투를 포기하였고 살아남은 병력은 9만명중 불과 1만 2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무다구치 렌야의 자살과 같은 무모한 명령에 불복하고 병력을 철수시킨 사토 중장 덕분에 그나마 많은 수의 일본군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전투로 뼈아픈 패배를 입은 일본군은 이후 궤멸의 길을 걷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