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항일운동은 3ㆍ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시위운동의 확산은 1930년대 초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맞서 대중운동을 활발히 벌이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생들은 3ㆍ1운동이나 6ㆍ10만세운동 때에도 커다란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부 학생들이 참여한 것이지 조직된 학생 대중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학생은 학교를 단위로 조직된 대중운동의 힘으로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사회 각계각층의 대중운동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학생들의 투쟁형태가 동맹휴교에서 벗어나 가두시위로 발전했으며,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억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구호를 내세워 투쟁의 내용이나 의식에서도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동맹휴교 등 집행행동을 활발히 벌여갔으나 192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요구는 교육환경 개선이나 일보 교사 배척 등 학내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 식민지교육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 등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투쟁의 내용을 발전시켜가다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는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이라는 문제를 직접 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그 투쟁을 전국적으로 이끌어갈 구심이 없어서 지역이나 학교들을 단위로 고립분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생들이 ‘일제 타도’를 내세우고 앞장서서 투쟁을 벌였지만 원산총파업(元山總罷業) 등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노동자, 농민들의 대중운동과 효과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신간회가 민중대회를 열어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노동자ㆍ농민들의 대중운동과 결합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중운동보다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래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여파로 1930년과 1931년에는 100여건 이상의 동맹휴교가 벌어지지만, 1932년 이후에는 학생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은 크게 감소하였다. 여기에는 노동계급 중심의 민족해방운동을 강조하며 신간회의 해체를 가져온 코민테른 집행부의 노선 변화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1953년 10월 20일 ‘학생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였다. 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기념일 간소화 방침으로 폐지되었으나 1984년 9월 19일 부활되었다. 그리고 2006년 2월 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이 무슨날인지 아시는분?
안녕하세요 17살 여고생입니다.
일요일이라 할일도 없고 그래서 뒹굴뒹굴 휴대폰만 만지고 있다가
문득 느낀점인데요 네이버나 줌.. '만화의 날'을 로고에 써놨더라구요..
'만화의 날'이기도 한데 오늘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입니다.
이를 알고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ㆍ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시위운동의 확산은 1930년대 초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맞서 대중운동을 활발히 벌이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생들은 3ㆍ1운동이나 6ㆍ10만세운동 때에도 커다란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부 학생들이 참여한 것이지 조직된 학생 대중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학생은 학교를 단위로 조직된 대중운동의 힘으로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사회 각계각층의 대중운동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학생들의 투쟁형태가 동맹휴교에서 벗어나 가두시위로 발전했으며,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억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구호를 내세워 투쟁의 내용이나 의식에서도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동맹휴교 등 집행행동을 활발히 벌여갔으나 192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요구는 교육환경 개선이나 일보 교사 배척 등 학내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 식민지교육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 등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투쟁의 내용을 발전시켜가다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는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이라는 문제를 직접 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그 투쟁을 전국적으로 이끌어갈 구심이 없어서 지역이나 학교들을 단위로 고립분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생들이 ‘일제 타도’를 내세우고 앞장서서 투쟁을 벌였지만 원산총파업(元山總罷業) 등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노동자, 농민들의 대중운동과 효과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신간회가 민중대회를 열어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노동자ㆍ농민들의 대중운동과 결합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중운동보다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래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여파로 1930년과 1931년에는 100여건 이상의 동맹휴교가 벌어지지만, 1932년 이후에는 학생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은 크게 감소하였다. 여기에는 노동계급 중심의 민족해방운동을 강조하며 신간회의 해체를 가져온 코민테른 집행부의 노선 변화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1953년 10월 20일 ‘학생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였다. 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기념일 간소화 방침으로 폐지되었으나 1984년 9월 19일 부활되었다. 그리고 2006년 2월 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세요..
광주학생항일운동 독립투사님들께 깊은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