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켰지만 바로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군사반란 후 3일째인 18일 '군사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오릅니다. 알듯이 의장은 계엄사령관인 장도영입니다. 하지만, 그는 명목상 의장일 뿐, 권좌는 박정희가 앉았습니다. 두 달도 안 된 7월 3일 장도영 의장을 '군 일부 반혁명사건'에 연루시켜 내치고 최고회의의장 자리에 오르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박정희는 국가최고재건회의 포고 제4호를 통해 국회(민의원·참의원) 및 지방의회와 5월 22일 포고 제6호를 통해 정당 및 사회단체를 해산해 버립니다. 대한민국 대의민주의를 폐기시켜버린 것입니다. 또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하고 공포합니다. 이 법은 헌법을 대신했습니다.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찬탈, 국회와 정당 해산 그리고 국민투표도 거치지 않는 법을 헌법으로 대신했습니다. 박정희는 11년 후인 1972년 유신쿠데타에서도 박정희는 헌법기관을 중단시킨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박정희에게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정이양을 약속했지만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하나하나 밟아 나갑니다. 1962년 11월 5일 개헌안발의 공고, 30일간의 공고기간, 12월 6일 개헌안 통과, 17일 국민투표, 26일 공포, 1962년 12월 27일부터 시행됩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당시 투표율은 84.99%였고, 박정희는 470만 2,700여 표(46.7%)를 얻어 454만 6,614표(득표율 45.1%)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됩니다.
15만 표 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박정희는 쉽게 당선된 것은 아닙니다. 딸 박근혜정권 탄생 배경에는 '종북몰이'가 큰 역할을 한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박근혜정권은 심심하면 '종북몰이'를 했습니다. 국정원 부정선거 관련, 불리한 증거와 정황이 나오면 붉은 덧칠을 했습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이석기 의원 내란예비음모', '통진당해산' 등등. 그런데 박정희도 대통령 선거 내내 '빨갱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박정희가 남로당 출신인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윤보선이 이를 걸고 넘어진 것입니다.
당시도 호남은 야당이 강했습니다. 신민당 후보였던 윤보선은 9월 21일 목포에서 유세를 했는데 6만 명이 모였습니다. 22일 광주에는 1만 5천 여명이 모였습니다. 박정희는 불안을 느꼈는지, 9월 23일 KBS 방송에 나와 "대통령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적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윤보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24일 전주에서 박정희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며 색깔론을 제기합니다.
색깔론 제기에 대해 박정희 후보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인 윤치영이 광주에서 "만약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몇 달 내에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혁명을 일으키는 자가 없다면 나라도 일으키겠다. 이번 선거는 사대사상과 민족자주사상과의 대결인 사상전"이라며 반격합니다. 윤치영은 윤보선 둘째 형인 윤치소 아들입니다. 삼촌과 친조카가 사상전을 벌인 것입니다. 그리고 10월 10일 신민당 김사만이 경주 유세때 "부산과 대구에 빨갱이가 많다. 그러니 북한의 김일성이 오면 만세부를 것이다"고 합니다. 이것이 윤보선 발목을 잡는 결정타가 됩니다. 쉽게 말해 박정희는 '빨갱이'라는 색깔론이 먹히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역풍을 맞았습니다.
특히 호남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37만 2천여 표를 얻어, 80만 2,000표를 얻은 윤보선에게 패배합니다. 하지만, 호남에서 박정희는 117만 4,000여 표를 얻었습니다. 이에 비해 윤보선은 82만 4,000여 표를 얻는데 거쳤습니다. 호남은 야당이 강세였습니다. 만약 윤보선이 색깔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선거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두 후보 표 차이는 불과 15만 표였습니다.
윤보선을 이긴 박정희는 겨울비가 내리는 1963년 12월17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박정희는 취임사에서 "권력을 쥐고 군림하는 자가 되지 않고 국민의 충복이 되겠다"고 천명한 후, "시급한 민생문제의 해결과 민족자립의 지표가 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범국민적 혁명 대열에의 적극적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가 있기를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 대한민국 시민에 군림했습니다. 그것도 16년 동안이나.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 하나는 당시 윤보선이 박정희를 '색깔론'으로 몰아세웠는 데 당시 유권자들은 오히려 윤보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2012년 대한민국 유권자는 색깔론에 넘어갔습니다. 색깔론은 40년 전보다 오히려 더 후퇴한 것입니다. 색깔론 피해자인 박정희는 오히려 색깔론을 악용했고, 딸 박근혜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⑦ → ‘색깔론’을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다.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군사반란을 일으켰지만 바로 대통령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는 군사반란 후 3일째인 18일 '군사혁명 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부의장에 오릅니다. 알듯이 의장은 계엄사령관인 장도영입니다. 하지만, 그는 명목상 의장일 뿐, 권좌는 박정희가 앉았습니다. 두 달도 안 된 7월 3일 장도영 의장을 '군 일부 반혁명사건'에 연루시켜 내치고 최고회의의장 자리에 오르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박정희는 국가최고재건회의 포고 제4호를 통해 국회(민의원·참의원) 및 지방의회와 5월 22일 포고 제6호를 통해 정당 및 사회단체를 해산해 버립니다. 대한민국 대의민주의를 폐기시켜버린 것입니다. 또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하고 공포합니다. 이 법은 헌법을 대신했습니다. 군사반란을 통해 권력찬탈, 국회와 정당 해산 그리고 국민투표도 거치지 않는 법을 헌법으로 대신했습니다. 박정희는 11년 후인 1972년 유신쿠데타에서도 박정희는 헌법기관을 중단시킨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박정희에게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정이양을 약속했지만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하나하나 밟아 나갑니다. 1962년 11월 5일 개헌안발의 공고, 30일간의 공고기간, 12월 6일 개헌안 통과, 17일 국민투표, 26일 공포, 1962년 12월 27일부터 시행됩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당시 투표율은 84.99%였고, 박정희는 470만 2,700여 표(46.7%)를 얻어 454만 6,614표(득표율 45.1%) 윤보선을 15만 표차로 꺾고 당선됩니다.
15만 표 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박정희는 쉽게 당선된 것은 아닙니다. 딸 박근혜정권 탄생 배경에는 '종북몰이'가 큰 역할을 한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박근혜정권은 심심하면 '종북몰이'를 했습니다. 국정원 부정선거 관련, 불리한 증거와 정황이 나오면 붉은 덧칠을 했습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이석기 의원 내란예비음모', '통진당해산' 등등. 그런데 박정희도 대통령 선거 내내 '빨갱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박정희가 남로당 출신인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윤보선이 이를 걸고 넘어진 것입니다.
당시도 호남은 야당이 강했습니다. 신민당 후보였던 윤보선은 9월 21일 목포에서 유세를 했는데 6만 명이 모였습니다. 22일 광주에는 1만 5천 여명이 모였습니다. 박정희는 불안을 느꼈는지, 9월 23일 KBS 방송에 나와 "대통령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적 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윤보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24일 전주에서 박정희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며 색깔론을 제기합니다.
색깔론 제기에 대해 박정희 후보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인 윤치영이 광주에서 "만약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몇 달 내에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혁명을 일으키는 자가 없다면 나라도 일으키겠다. 이번 선거는 사대사상과 민족자주사상과의 대결인 사상전"이라며 반격합니다. 윤치영은 윤보선 둘째 형인 윤치소 아들입니다. 삼촌과 친조카가 사상전을 벌인 것입니다. 그리고 10월 10일 신민당 김사만이 경주 유세때 "부산과 대구에 빨갱이가 많다. 그러니 북한의 김일성이 오면 만세부를 것이다"고 합니다. 이것이 윤보선 발목을 잡는 결정타가 됩니다. 쉽게 말해 박정희는 '빨갱이'라는 색깔론이 먹히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역풍을 맞았습니다.
특히 호남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박정희는 서울에서 37만 2천여 표를 얻어, 80만 2,000표를 얻은 윤보선에게 패배합니다. 하지만, 호남에서 박정희는 117만 4,000여 표를 얻었습니다. 이에 비해 윤보선은 82만 4,000여 표를 얻는데 거쳤습니다. 호남은 야당이 강세였습니다. 만약 윤보선이 색깔론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선거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두 후보 표 차이는 불과 15만 표였습니다.
윤보선을 이긴 박정희는 겨울비가 내리는 1963년 12월17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박정희는 취임사에서 "권력을 쥐고 군림하는 자가 되지 않고 국민의 충복이 되겠다"고 천명한 후, "시급한 민생문제의 해결과 민족자립의 지표가 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범국민적 혁명 대열에의 적극적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가 있기를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 대한민국 시민에 군림했습니다. 그것도 16년 동안이나.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 하나는 당시 윤보선이 박정희를 '색깔론'으로 몰아세웠는 데 당시 유권자들은 오히려 윤보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2012년 대한민국 유권자는 색깔론에 넘어갔습니다. 색깔론은 40년 전보다 오히려 더 후퇴한 것입니다. 색깔론 피해자인 박정희는 오히려 색깔론을 악용했고, 딸 박근혜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 인터넷 매체〈데일리서프라이즈〉익명 칼럼니스트 탐독(耽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