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러한 상황에 처한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욥에게 재앙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욥에게 왔습니다. 그 셋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었습니다.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고자 상약하고 온 것입니다.
12 그들이 눈을 들어 멀리 보이는 욥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이 이전에 알던 그 욥의 모습이 전혀 아니므로 그들이 다같이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 이들은 행위에 있어서 완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패역한 선민입니다. 한편 엘리후는 이들과 같이 오지 않으나 나중에 등장을 하며 재를 뿌리고 앉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출신지와 이름은 모두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율법사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고 운다는 것의 실제는 ‘가식으로 안타까운 듯이 소리를 질러 말했다’는 뜻이지 진짜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본 서에 언급되는 그들의 변론 내용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시게 됩니다.
# 데만 사람 엘리바스: 데만이란 ‘남쪽’을 뜻하며, 남방은 지혜의 방향입니다. 다시말해 이 사람은 스스로 지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이다. 엘리바스란 이름은 ‘하나님은 힘이시다’라는 뜻을 가졌고, 본 서에서 이 사람은 셋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충고를 하는데, 그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 되지만 역시 그리스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저 한 인간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말은 선민에게 임하시던 하나님을 바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 친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는데, 성경 안에서 나이가 많음이나 장수 혹은 노인 등의 표현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됩니다.
엘리바스와 같은 유형은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잡혔을 때 놓아주도록 권유한 랍비 같은 유형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본 서의 등장인물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엘리후이며, 역시 그가 가장 어리석은 변론을 합니다. 그의 말 속에는 성경적이지 않은 오류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 수아 사람 빌닷: 수아란 ‘굴’또는 ‘함정’을 뜻하는 말이며, 빌닷이란 ‘투쟁의 아들’이란 뜻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유형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말씀 전함은 곧 사람들을 자기의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사람은 말씀을 이야기할 때 자기가 가진 것은 복이고, 남이 가진 것은 욕심에 의한 것이라는 식의 변론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 나아마 사람 소발: 나아마란 ‘즐거운’의 뜻을 가졌으며, 소발이란 ‘작은 새’를 뜻합니다.
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자신들이 당연히 구원받을 줄 알고 스스로 ‘자고’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전혀 없으면서 하나님을 사사로운 자신의 지혜에 맞춰 이해하고 다만 인생을 즐겁게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율법은 잘 알고 있지도 못하면서 권력을 잡고 돈을 움키기 위해 말씀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본 서에도 욥의 고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작은 새’로 표현된 것은 그들이 ‘모자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지혜도 없이 바리새인과 같은 거짓증인들에게 제물로 금을 가져다 바치면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인 줄 착각하고, 바리새인들에게 배운 대로 금으로 구원을 산 뒤 인생을 즐겁게 사는 유형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에 대하여 욥은 21장 16절에 “네가 하나님의 것으로 즐겁게는 산다만 이제 나의 계획은 판이하니라.”라고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 부스란 ‘경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라겔이란 ‘하나님의 축복’이란 뜻이며, 엘리후란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먼 어린 자로 자기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임의로 만들어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동일하게 말씀을 안다 하면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엘리후와 같은 유형의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인 명예욕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에 자기도 자기의 오류를 보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욥기의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스가랴서 14장의 내용입니다. 후반에 보화가 모아지는 이야기 끝 부분이 본 욥기의 마지막에 욥의 승리 후의 일을 묘사한 부분과 동일하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
여호와께서만 아시는 한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될 것이다.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에까지 아라바 같음이 미치게 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은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게 될 것인데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그 땅에 다시는 저주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는 재앙이 임할 것인데, 그 재앙은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하여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치게 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울 것이다.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다.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을 것이며,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는 해마다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키게 될 것이다.
본 욥기는 바로 이 밤도 낮도 아닌 때에 벌어진 영적 논쟁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재판정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손을 들어 주시면 부활을 하는 것이고, 선민의 손을 들어주신다면 그리스도는 그저 한낱 사이비 교주를 꿈꾸던 인간으로 판명이 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는 스가랴의 예언처럼 본 욥기에서 세 친구와 이방인을 뜻하는 엘리후의 모든 말이 썩은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가랴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이후 세대의 모든 짐승이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도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같은 변론의 내용까지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사람의 사고 방식에 맞지 않게, 신기하게,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인생들의 죽고 사는 결국에 누구도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항변할 수 없는 논리적 조건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한 본서를 이미 가지고 있던 선민들은 본서로 인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메시야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 순서상 먼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유대 땅에 나셨고, 천국 복음을 제일 먼저 그들에게 알리셨으며, 신약 서신의 처음인 로마서는 먼저 그들에게 전하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욥에게 찾아온 세 친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욥기 2장
11 이러한 상황에 처한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욥에게 재앙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욥에게 왔습니다. 그 셋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었습니다.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고자 상약하고 온 것입니다.
12 그들이 눈을 들어 멀리 보이는 욥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이 이전에 알던 그 욥의 모습이 전혀 아니므로 그들이 다같이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 이들은 행위에 있어서 완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패역한 선민입니다. 한편 엘리후는 이들과 같이 오지 않으나 나중에 등장을 하며 재를 뿌리고 앉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출신지와 이름은 모두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율법사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 친구들이 소리를 지르고 운다는 것의 실제는 ‘가식으로 안타까운 듯이 소리를 질러 말했다’는 뜻이지 진짜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본 서에 언급되는 그들의 변론 내용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시게 됩니다.
# 데만 사람 엘리바스: 데만이란 ‘남쪽’을 뜻하며, 남방은 지혜의 방향입니다. 다시말해 이 사람은 스스로 지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이다. 엘리바스란 이름은 ‘하나님은 힘이시다’라는 뜻을 가졌고, 본 서에서 이 사람은 셋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충고를 하는데, 그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 되지만 역시 그리스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저 한 인간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말은 선민에게 임하시던 하나님을 바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 친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는데, 성경 안에서 나이가 많음이나 장수 혹은 노인 등의 표현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됩니다.
엘리바스와 같은 유형은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잡혔을 때 놓아주도록 권유한 랍비 같은 유형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본 서의 등장인물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엘리후이며, 역시 그가 가장 어리석은 변론을 합니다. 그의 말 속에는 성경적이지 않은 오류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 수아 사람 빌닷: 수아란 ‘굴’또는 ‘함정’을 뜻하는 말이며, 빌닷이란 ‘투쟁의 아들’이란 뜻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유형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말씀 전함은 곧 사람들을 자기의 함정으로 유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사람은 말씀을 이야기할 때 자기가 가진 것은 복이고, 남이 가진 것은 욕심에 의한 것이라는 식의 변론을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 나아마 사람 소발: 나아마란 ‘즐거운’의 뜻을 가졌으며, 소발이란 ‘작은 새’를 뜻합니다.
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자신들이 당연히 구원받을 줄 알고 스스로 ‘자고’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전혀 없으면서 하나님을 사사로운 자신의 지혜에 맞춰 이해하고 다만 인생을 즐겁게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율법은 잘 알고 있지도 못하면서 권력을 잡고 돈을 움키기 위해 말씀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본 서에도 욥의 고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작은 새’로 표현된 것은 그들이 ‘모자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지혜도 없이 바리새인과 같은 거짓증인들에게 제물로 금을 가져다 바치면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인 줄 착각하고, 바리새인들에게 배운 대로 금으로 구원을 산 뒤 인생을 즐겁게 사는 유형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에 대하여 욥은 21장 16절에 “네가 하나님의 것으로 즐겁게는 산다만 이제 나의 계획은 판이하니라.”라고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 부스란 ‘경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바라겔이란 ‘하나님의 축복’이란 뜻이며, 엘리후란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먼 어린 자로 자기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임의로 만들어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동일하게 말씀을 안다 하면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엘리후와 같은 유형의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인 명예욕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에 자기도 자기의 오류를 보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욥기의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스가랴서 14장의 내용입니다. 후반에 보화가 모아지는 이야기 끝 부분이 본 욥기의 마지막에 욥의 승리 후의 일을 묘사한 부분과 동일하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
여호와께서만 아시는 한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될 것이다.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에까지 아라바 같음이 미치게 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은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게 될 것인데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그 땅에 다시는 저주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는 재앙이 임할 것인데, 그 재앙은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하여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치게 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울 것이다. 이 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다.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을 것이며,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는 해마다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키게 될 것이다.
본 욥기는 바로 이 밤도 낮도 아닌 때에 벌어진 영적 논쟁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재판정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손을 들어 주시면 부활을 하는 것이고, 선민의 손을 들어주신다면 그리스도는 그저 한낱 사이비 교주를 꿈꾸던 인간으로 판명이 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는 스가랴의 예언처럼 본 욥기에서 세 친구와 이방인을 뜻하는 엘리후의 모든 말이 썩은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가랴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이후 세대의 모든 짐승이 나타내는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도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같은 변론의 내용까지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사람의 사고 방식에 맞지 않게, 신기하게,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모든 인생들의 죽고 사는 결국에 누구도 자기의 죽음에 대하여 항변할 수 없는 논리적 조건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또한 본서를 이미 가지고 있던 선민들은 본서로 인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메시야가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 순서상 먼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유대 땅에 나셨고, 천국 복음을 제일 먼저 그들에게 알리셨으며, 신약 서신의 처음인 로마서는 먼저 그들에게 전하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