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자녀 차별에 대해...

ZING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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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남동생은 세살 터울입니다.

아빠가 7남매 중 맏이였기에 저의 탄생은 집안 전체의 경사? 같은 분위기였다고 해요.

모든 삼촌 고모들이 미혼/학생일 때니까요.

엄마아빠가 안아볼 겨를이 없이 이쁨을 받고 자랐습니다.

지금은 평범하지만 어릴때는 꽤 영특했고, 그러니 더 사랑받았죠.

남동생은 엄청 약하게 태어났고, 네살이 될때까지 말을 못해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합니다.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삼촌들이 하나둘 결혼해 사촌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자라면서도 저는 공부를 곧잘 했고, 동생은 공부 쪽은 소질이 없고 사내인데도 숫기가 적어

태권도장을 보냈습니다.

태권도 쪽으로는 소질이 있어 상도 타고 재능을 보였죠.

그런데 운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거친 친구들과 거친 경험들을 하게 되고,

부모나 집안에서는 골치 덩어리가 되었겠죠....

그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엄마 아빠는 십 여 년전 돌아가셨고 지금은 둘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두 부부가 모여 화기애애하게 저녁을 먹다 자연스럽게 어린시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제 멘탈 속의 우리 가족은 화목하고 밝고, 서민이었지만 크게 부족하지 않고, 아빠도 술을 좀 드시긴 했어도 자식들 사랑해주는 그런 집이었어요.

 

그런데 반대로 제 남동생 멘탈 속의 우리 가족은

어둡고 힘들고 고달프고 차별적이고 히스테리컬한 아버지와 그 아래에서 묵묵히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엄마....였어요.

 

그렇게 차이가 벌어지게 된 이유가 차별이었습니다.

엄마는 늘 평등하셨고, 아빠는 대놓고 차별하시긴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나는 크게 엄마 아빠 속 썩이는 것 없는 자식이고,

동생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더군요.

그리고, 표현을 그렇게 할 뿐이지 물질적인 차별까지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동생에게서 듣는 일화들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1. 저녁에 출출해서 냉장고를 열면, 엄마가 자동적으로 '그거 누나 먹을거다'

라고 했다더군요...

 

2. 전 중고등학교때 늘 반에서 도시락으로 유명했어요.

반찬이 최소 서너 개는 기본이었고 매일 바뀌었어요.

그런데 동생은 학교다닐 때 별명이 장조림공장집 아들이었다더군요.

그것도 엄마표 장조림이 아닌 통조림.....

 

3. 저는 다들 추억이라고 좋아하는 핑크색 소시지를 싫어합니다.

어릴 적부터 그 밀가루 퍽퍽한 맛이 싫어서 한번도 좋아했던 적이 없어요.

엄마가 그걸 잊고 도시락 싸려고 그걸 사오셨다가도 제가 싫어하니까,

그런 날은 몇일 동안 제 동생은 늘 그것만 쌌다더군요. 저는 비엔나 소시지를 다시 사와서 싸주셨고요..

 

4. 급식세대가 아니니 점심저녁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다녔습니다.

보온도시락 두 개는 부피가 엄청나서 늘 더 작은 예쁜 일제 보온도시락을 싸달라고 투정부리곤 했는데, 동생은 그마저 보온도시락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5. 그 이야기를 듣고 '나 너 중학교때 보온도시락 있었던 것 기억하는데, 설거지통에 늘 보온도시락이 세 개였어'라고 항변했더니, 제가 가지고 다니다 넘어져 속이 깨진(그 시절엔 유리가 보온재였죠.) 도시락이었다고 하네요.

당연히 보온은 안되고, 들고 뛰면 철그렁철그렁 소리가 나는...

동생은 그래도 남들 눈에 보온도시락이니까 너무 좋았었대요.

 

6. 제가 서울의 대학교로 진학한 뒤, 우리집은 적막강산이었다고 합니다.

웃음소리가 날 때는 유일하게, 저랑 통화를 하거나 제가 고향을 찾았을 때 뿐이었다고 합니다.

세살 터울이니 제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고등학교를 다닌 제 동생은 그 숨막히는 분위기가 싫어서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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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서 만난 서울의 제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지방 유지의 딸'로 통합니다.

말도 안된다 나는 정말 평범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항변해도,

그 시절 누가 입학졸업할때 마다 그렇게 큰 선물을 받고,

그 시절 누가 그렇게 비엔나소시지와 허쉬초코렛을 달고 살고,

그 시절 누가 짜장면집을 한달에 몇번씩 들락거렸으며,

그 시절 누가 코트를 맞춤해서 입었냐고 따지는데

그렇게 살긴 했는데 우리집은 부자가 아니었어요.

결국 이러한 경험의 차이는 차별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대학시절 동생이 가끔 저를 만나러 서울을 와서 이틀 정도씩 자고 간 적이 두어번 있는데,

와서 힘듦을 호소하는 동생에게

철없던 저는 '아빠 본심은 그게 아니잖아 니가 좀더 잘해'라고 혼내기나 했는데,

동생은 그 숨막히는 분위기가 싫고 힘들었던 걸 전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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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더 충격은 그날 당일이었습니다.

동생이 그러더군요.

"누나가 이렇게 까맣게 모르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조금은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다"

고 하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제가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건 당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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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누나는 밝고 구김살 없고, 동생은 삐뚤어졌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고 자랐습니다.  

엄마도 없는 살림에 거둬먹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별을 하신 거겠죠.

아빠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이쁘면 이쁘고 미우면 밉다 표현하신 거겠죠.(실제로 동생이 태권도로 한참 메달 따고 다닐 땐 제가 차별을 받기도 했으나, 그래도 전 계속 공부를 잘했으니 그렇게 차이나게 구박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혹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실 차별은 49:51 정도의 차이였을 거라고요.

그래도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0:100이 되는 거라는 걸,

우리 남매를 보면 알 것 같아요.

 

저는 동생을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그날 동생이 눈물 흘리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와락 눈물이 솟습니다.

그동안 왜 말을 안했냐고 하니,

평생을 그렇게 살아서 그게 말하고 말고 할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몇년 전 아버지가 간암으로 호스피스에서 석달을 계시다 돌아가실 때, 동생은 병문안을 다섯 번도 오지 않았어요.

본인이 평생 술먹고 다녀서 간암에 걸린건데 왜 자기가 간병을 해야 하냐고 했습니다.

결국 의식이 없이 누워계실 때야 찾아와서는, 아빠 손을 잡고 말 없이 굵은 눈물을 뚝뚝뚝 흘리더군요...

TV에서 박근형(아빠가 많이 닮았어요.)이 나오길래 '아빠 보고 싶다~'했더니

올케가 나중에 조용히 부탁했습니다.

'형님은 아버님 사랑도 많이 받고, 또 가실 때에도 자식도리를 다 하고 해서 그렇게 아빠라는 단어가 쉽게 입에서 나오시는지 몰라도 저 사람은 아빠라는 단어가 가슴에서 딱딱한 응어리가 되어서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TV에서 아버지나 부정에 관해 나오면 어찌할 바를 몰라하니 조금만 조심해 주면 좋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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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엄마 아빠 생각도 많이 나고 괜스리 마음이 스산하네요.

이 곳에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많을 것 같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부모도 사람인데 당연히 더 이쁜 자식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도 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 주세요.

부모들이 전혀 기억 못하는 일들도 자식들의 평생 멘탈을 좌우하는 큰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모두 사랑으로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