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30년경 아테네에 역병이 발생하여 당시 아테네 인구의 4분의 1인 6만 명이 사망했다. 542년경 페스트로 알려진 전염병이 아라비아와 이집트에서 창궐하였고 로마 제국으로 번져 30여만 명이 사망했다.
갑작스레 오한이 나며 40도를 넘나드는 고열이 동반된다. 환자는 곧 의식을 잃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길면 2, 3일에서 짧게는 발병 24시간 만에 숨을 거둔다. 시체에는 검은 반점이 생겨난다. 14세기 중세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간 페스트의 증상이다. 당시 의술로는 발병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신이 내린 형벌’로만 인식되었던 이 병으로 1340년대 유럽에서 2,000만~3,000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유럽 인구의 5분의 1 내지 3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페스트가 휩쓸고 간 유럽은 처참하게 변했다. 인구가 급격하게 줄면서 중세 유럽을 지탱하던 봉건 제도가 무너졌고, 경제 체제도 일대 변혁을 맞게 되었다.
1347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을 시작으로 페스트는 약 3년 만에 전 유럽을 휩쓸었다. 중세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균은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 주변에 서식하는 다람쥐나 비버 등의 야생 설치류가 옮겼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근에는 유전자 분석 연구 결과 중국에서 발병한 페스트균이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감염 경로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1348년 우크라이나 남쪽 크림 반도에서 검게 변한 시체를 만졌던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황급히 유럽으로 귀환하면서 페스트균을 함께 가지고 들어와 엄청난 돌림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페스트는 유럽 전역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당시 유럽은 무역이 크게 발달해 있어 도시끼리 왕래가 잦아 병균이 이동하기 쉬운 상태였다. 폐에 균이 침투하는 페스트는 위생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중세 시대의 유럽은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시 규모가 급성장한 탓에 매우 불결했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목욕을 하면 모공이 열려 역병에 쉽게 감염된다는 잘못된 의료 상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의 찬란한 목욕 문화가 중세 유럽에서 딱 끊긴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유럽 인은 목욕을 멀리했다.
페스트가 공기를 통해 감염된다고 생각한 유럽 인들은 향수를 뿌리고 향초 오일을 바른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더해 우후죽순 늘어나는 시신을 처리하기 곤란해져 길거리에 쌓아 두는 바람에 균은 더욱 확산되었다. 나중에는 환자가 발생하면 문을 걸어 닫고 산 채로 불에 태워 버리는 나름의 치료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페스트를 막으려는 수도사들의 행진
극한의 공포 속에서 유럽 인들은 공황 상태로 내몰렸다. 페스트의 여파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 전쟁도 중단될 지경이었다. 교황청의 추기경마저 절반 이상 사망해 종교가 위안을 줄 수도 없었다. ‘악마’의 소행이라는 미신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집단 학살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악마’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유대 인이 대표적인 표적이었다. 수많은 유대 인들은 고문에 지쳐 자신이 우물에 독약을 풀어 페스트를 유행시켰다는 거짓 자백을 했고, 그 대가로 생매장되거나 산 채로 화형되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1348년 무렵부터 페스트는 차츰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몇 도시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도시가 새로이 건축되면서 하수구 등 도시 기반시설과 위생시설물들이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유럽 인구는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300년이 지난 뒤에야 원래 유럽의 인구를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14세기 페스트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후에도 페스트는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에 걸쳐 각국에서 재발했다.
죽음의 승리
흑사병은 14세기 이후 유럽 인들에게 죽음의 공포와 보편성을 상기시켜 주며 다양한 예술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페스트가 휩쓸고 난 후 유럽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일손이 부족해져 농민의 몸값이 올라갔다. 땅을 경작하고 곡식을 수확할 농민을 구하기 위해 영주들은 전보다 2, 3배 비싼 임금을 지불해야 했다. 교회의 위상은 더욱 낮아졌다. 말단 성직자들이 시체를 매장하고 환자를 돌보는 데 헌신하는 사이 고위 성직자들은 교구민을 버리고 시골로 달아났고, 숨진 성직자를 대신해 새로 성직자가 된 사람들 중 일부는 교구민을 수탈하는 데만 열을 올리기도 했다.
교황권이 하락하고, 죽음으로 인한 염세주의에 물든 중세 유럽 인들은 종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이 우후죽순 죽어 나갔던 14세기 중반 이후 유럽에는 삶에 대한 비관주의와 함께 정서적인 공허감이 유행했다. 이로써 중세 유럽 시대의 봉건적 질서는 토대부터 동요되기 시작했다.
유럽인 33%를 죽인 괴물 : 페스트
기원전 430년경 아테네에 역병이 발생하여 당시 아테네 인구의 4분의 1인 6만 명이 사망했다.
542년경 페스트로 알려진 전염병이 아라비아와 이집트에서 창궐하였고 로마 제국으로 번져 30여만 명이 사망했다.
갑작스레 오한이 나며 40도를 넘나드는 고열이 동반된다. 환자는 곧 의식을 잃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길면 2, 3일에서 짧게는 발병 24시간 만에 숨을 거둔다. 시체에는 검은 반점이 생겨난다. 14세기 중세 유럽을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간 페스트의 증상이다. 당시 의술로는 발병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신이 내린 형벌’로만 인식되었던 이 병으로 1340년대 유럽에서 2,000만~3,000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유럽 인구의 5분의 1 내지 3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페스트가 휩쓸고 간 유럽은 처참하게 변했다. 인구가 급격하게 줄면서 중세 유럽을 지탱하던 봉건 제도가 무너졌고, 경제 체제도 일대 변혁을 맞게 되었다.
1347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을 시작으로 페스트는 약 3년 만에 전 유럽을 휩쓸었다. 중세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균은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 주변에 서식하는 다람쥐나 비버 등의 야생 설치류가 옮겼다는 설이 유력하다. 최근에는 유전자 분석 연구 결과 중국에서 발병한 페스트균이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으로 유입되었다는 설도 있다. 감염 경로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1348년 우크라이나 남쪽 크림 반도에서 검게 변한 시체를 만졌던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황급히 유럽으로 귀환하면서 페스트균을 함께 가지고 들어와 엄청난 돌림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페스트는 유럽 전역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당시 유럽은 무역이 크게 발달해 있어 도시끼리 왕래가 잦아 병균이 이동하기 쉬운 상태였다. 폐에 균이 침투하는 페스트는 위생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중세 시대의 유럽은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도시 규모가 급성장한 탓에 매우 불결했다. 또한 중세 시대에는 목욕을 하면 모공이 열려 역병에 쉽게 감염된다는 잘못된 의료 상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의 찬란한 목욕 문화가 중세 유럽에서 딱 끊긴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유럽 인은 목욕을 멀리했다.
페스트가 공기를 통해 감염된다고 생각한 유럽 인들은 향수를 뿌리고 향초 오일을 바른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에 더해 우후죽순 늘어나는 시신을 처리하기 곤란해져 길거리에 쌓아 두는 바람에 균은 더욱 확산되었다. 나중에는 환자가 발생하면 문을 걸어 닫고 산 채로 불에 태워 버리는 나름의 치료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페스트를 막으려는 수도사들의 행진극한의 공포 속에서 유럽 인들은 공황 상태로 내몰렸다. 페스트의 여파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 전쟁도 중단될 지경이었다. 교황청의 추기경마저 절반 이상 사망해 종교가 위안을 줄 수도 없었다. ‘악마’의 소행이라는 미신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집단 학살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악마’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유대 인이 대표적인 표적이었다. 수많은 유대 인들은 고문에 지쳐 자신이 우물에 독약을 풀어 페스트를 유행시켰다는 거짓 자백을 했고, 그 대가로 생매장되거나 산 채로 화형되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다.
1348년 무렵부터 페스트는 차츰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몇 도시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도시가 새로이 건축되면서 하수구 등 도시 기반시설과 위생시설물들이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유럽 인구는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300년이 지난 뒤에야 원래 유럽의 인구를 회복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14세기 페스트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후에도 페스트는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에 걸쳐 각국에서 재발했다.
죽음의 승리흑사병은 14세기 이후 유럽 인들에게 죽음의 공포와 보편성을 상기시켜 주며 다양한 예술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페스트가 휩쓸고 난 후 유럽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일손이 부족해져 농민의 몸값이 올라갔다. 땅을 경작하고 곡식을 수확할 농민을 구하기 위해 영주들은 전보다 2, 3배 비싼 임금을 지불해야 했다. 교회의 위상은 더욱 낮아졌다. 말단 성직자들이 시체를 매장하고 환자를 돌보는 데 헌신하는 사이 고위 성직자들은 교구민을 버리고 시골로 달아났고, 숨진 성직자를 대신해 새로 성직자가 된 사람들 중 일부는 교구민을 수탈하는 데만 열을 올리기도 했다.
교황권이 하락하고, 죽음으로 인한 염세주의에 물든 중세 유럽 인들은 종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이 우후죽순 죽어 나갔던 14세기 중반 이후 유럽에는 삶에 대한 비관주의와 함께 정서적인 공허감이 유행했다. 이로써 중세 유럽 시대의 봉건적 질서는 토대부터 동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