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국민학교때 아버지를 대구 화원 교도소로 면회를 갔었답니다.이상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답니다.사실 무엇인가를 판단하기엔 너무 어렸던 나이고 아버지집이 그 큰집이었는지 알았답니다.조금 더 커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피하고 원망스러워하진 않았습니다.그런 생각들을 조금도 못하게 부족함없이 키워준 고모님께 감사할뿐입니다.하지만 나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쳤고 처지를 비관해 꼴통짓도 많이 하였습니다.아버지 면회가면 덩치아저씨들이 용돈 하라고 종이컵에 50만원씩 넣어서 몰래몰래 주면 그 돈으로 놀러 다녔던 나쁜딸 이기도 합니다.교도소도 나름 봄 가을로 모범수들에 한해서 야유회 비슷하게 합니다.가족들 모여서 밥도 먹고 손도 잡을수있고 귀휴 라는것도 나옵니다.영화처럼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슬 슬 사회생활에 적응 하라고 미리 좀 보내 주더군요 그때 제나이가 26살쯤 이었나봅니다 그때 아버지랑 영주 큰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로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가 처음 이었습니다 아버지랑 차를 타 본게 그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니엄 특사로 나오시게 되었고 아버지는 나름 사회에서 잘 적응 하는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저 사이엔 부녀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벽이 있었습니다.그렇게 보호관찰을 받으시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늘 사고를 일으키셨고 고모는 늘 걱정을 하였지만 저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스스로 끊어버렸답니다.들리는 이야기는 온통 속 상하게 한다는 내용 이었고 저는 냉정하게 전화번호조차도 가르쳐주지말라며 유난을 떨었죠...그렇게 아버지와 전 서로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런 아빠는 없는게 낫다며 혼자 아버지를 지웠습니다.나쁜 딸년이죠...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가 아닌 병원에서 연락이 오더군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고 참 이상한건 그렇게 연락을 끊었는데도 아버지랑 저랑 한동네에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저희집 5분거리에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신걸 알고 깜짝 놀랬는데 그게 벌써 2년전 일이네요 그 후로 아버지와 전 화해를 하였고 가까이 사시니까 밥도 같이 먹고 사위될 친구도 보여주고 아버지도 술을 끊으시고 나름 의욕적으로 일하시면서 그렇게1년을 보냈답니다.하지만 그런 생활이 익숙하지만은 않았습니다.불만이 많기도 했지만 제짝지가 착한사람이라 구시렁거리고 귀찮아 하는 절 다독이며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습니다.그렇게 1년 아버지와 제가 닮은게 참 많다는걸 알고 참 좋아라 할 그때쯤 아버지가 살이 빠지고 대변 보기가 힘들다며 나름 풍채가 매우 좋으셨는데 살이 빠지더군요 대장검사를 받았는데 유난히 시간을 오래 끌더니 직장암 이라더군요 그 첫날 가볍게 얘기 했었습니다 짤라내고 어쩌고 저쩌고 우리 아부지가 어떤 아부진데 살 수 있을꺼야 그러면서 하늘이 무너진건 그 뒷 날 이었습니다 원래 발생지점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찍어보니깐 간 까지 다 퍼졌다고 수술 해봐야 소용 없다고 3개월에서 6개월 넘기기 힘들다고 일단 아부지께 말씀 못 드리고 촬영한걸 가지고 부산에 암을 잘 본다고 하는데 다 들고 다녔습니다. 가망이 없다고 했던데는 그나마 이해가 갑니다 대학병원에서는 수술 하자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저 물었습니다 수술하면 살 수 있나요?그게 아니고 원래 발생지점을 알아서 뭐 어쩌고 저쩌고 그러길래 그게 아니고 살 수있는 가망성이 몇%로냐 그랬더니 사는건 환자의 의지고 그럽디다 살 수가 없다 이미 암이 몸을 다 잡아 먹어버려서 더 살기는 어렵겠다는 얘기를 안해주시더라구요.대학병원에서는... 직장암이라는 판단이 나왔을때 사실 아버지도 눈치로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날 별스럽게도 고모가 아부지한테 고기를 싸서 입에 넣어 주고 막 그랬답니다 딸년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눈치가 이상해서 혼자 가셔서 물어보았는데 입이 무지하게 싼 의사 선생님이 다 말씀 하였습니다 얼마나 참담 했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 해집니다 너무나 눈부신 봄날에 본인이 얼마 못 산다는걸 알게된 아버지의 고통을 딸인 저는 차마 헤아릴수가 없습니다 그 후로 식이요법 잘하는 쉼터며 좋은 약이며 소용이 없더군요 그래도 나을수 있다는 희망으로 포기라는것을 모르셨는데 지금은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움직이는것조차도 힘들게 되어버렸습니다.대변 조차도 간병인의 손길에 맡겨져야 한다는 사실이 치욕 스러웠나봅니다.복수가 너무 차서 숨쉬기조차도 고통 스러울텐데 오늘 저더러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그러시길래 모시고 갔었습니다.사실 어제부터 이상 했는데 고모가 보고 싶다고 우시길래 고모님도 오시라고 해서 오셔서 농담도 하며 애써 밝게 있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붕대로 목을 매달았더군요 하지만 그 매듭 조차도 제대로 엮을 힘이 없어서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 모습을 본 저는 아직도 충격 입니다 전 아버지가 운동회에 온 적도 없습니다.같이 동물원을 가서 호랑이를 본 기억도 없습니다.그렇다고 아버지가 절 때렸냐 한대도 맞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하지만 아버지라서 지금 너무 슬프고 아픕니다.혹시 이글을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민지야 아빠가 보고싶어한다
아버지...
내 아버지는 2000년도 밀레니엄 특사 였습니다.
저는 국민학교때 아버지를 대구 화원 교도소로 면회를 갔었답니다.이상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답니다.사실 무엇인가를 판단하기엔 너무 어렸던 나이고 아버지집이 그 큰집이었는지 알았답니다.조금 더 커서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피하고 원망스러워하진 않았습니다.그런 생각들을 조금도 못하게 부족함없이 키워준 고모님께 감사할뿐입니다.하지만 나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쳤고 처지를 비관해 꼴통짓도 많이 하였습니다.아버지 면회가면 덩치아저씨들이 용돈 하라고 종이컵에 50만원씩 넣어서 몰래몰래 주면 그 돈으로 놀러 다녔던 나쁜딸 이기도 합니다.교도소도 나름 봄 가을로 모범수들에 한해서 야유회 비슷하게 합니다.가족들 모여서 밥도 먹고 손도 잡을수있고 귀휴 라는것도 나옵니다.영화처럼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슬 슬 사회생활에 적응 하라고 미리 좀 보내 주더군요 그때 제나이가 26살쯤 이었나봅니다 그때 아버지랑 영주 큰집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로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가 처음 이었습니다 아버지랑 차를 타 본게 그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니엄 특사로 나오시게 되었고 아버지는 나름 사회에서 잘 적응 하는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저 사이엔 부녀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벽이 있었습니다.그렇게 보호관찰을 받으시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늘 사고를 일으키셨고 고모는 늘 걱정을 하였지만 저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스스로 끊어버렸답니다.들리는 이야기는 온통 속 상하게 한다는 내용 이었고 저는 냉정하게 전화번호조차도 가르쳐주지말라며 유난을 떨었죠...그렇게 아버지와 전 서로에게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런 아빠는 없는게 낫다며 혼자 아버지를 지웠습니다.나쁜 딸년이죠...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가 아닌 병원에서 연락이 오더군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고 참 이상한건 그렇게 연락을 끊었는데도 아버지랑 저랑 한동네에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저희집 5분거리에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신걸 알고 깜짝 놀랬는데 그게 벌써 2년전 일이네요 그 후로 아버지와 전 화해를 하였고 가까이 사시니까 밥도 같이 먹고 사위될 친구도 보여주고 아버지도 술을 끊으시고 나름 의욕적으로 일하시면서 그렇게1년을 보냈답니다.하지만 그런 생활이 익숙하지만은 않았습니다.불만이 많기도 했지만 제짝지가 착한사람이라 구시렁거리고 귀찮아 하는 절 다독이며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습니다.그렇게 1년 아버지와 제가 닮은게 참 많다는걸 알고 참 좋아라 할 그때쯤 아버지가 살이 빠지고 대변 보기가 힘들다며 나름 풍채가 매우 좋으셨는데 살이 빠지더군요 대장검사를 받았는데 유난히 시간을 오래 끌더니 직장암 이라더군요 그 첫날 가볍게 얘기 했었습니다 짤라내고 어쩌고 저쩌고 우리 아부지가 어떤 아부진데 살 수 있을꺼야 그러면서 하늘이 무너진건 그 뒷 날 이었습니다 원래 발생지점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찍어보니깐 간 까지 다 퍼졌다고 수술 해봐야 소용 없다고 3개월에서 6개월 넘기기 힘들다고 일단 아부지께 말씀 못 드리고 촬영한걸 가지고 부산에 암을 잘 본다고 하는데 다 들고 다녔습니다. 가망이 없다고 했던데는 그나마 이해가 갑니다 대학병원에서는 수술 하자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저 물었습니다 수술하면 살 수 있나요?그게 아니고 원래 발생지점을 알아서 뭐 어쩌고 저쩌고 그러길래 그게 아니고 살 수있는 가망성이 몇%로냐 그랬더니 사는건 환자의 의지고 그럽디다 살 수가 없다 이미 암이 몸을 다 잡아 먹어버려서 더 살기는 어렵겠다는 얘기를 안해주시더라구요.대학병원에서는... 직장암이라는 판단이 나왔을때 사실 아버지도 눈치로 알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날 별스럽게도 고모가 아부지한테 고기를 싸서 입에 넣어 주고 막 그랬답니다 딸년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눈치가 이상해서 혼자 가셔서 물어보았는데 입이 무지하게 싼 의사 선생님이 다 말씀 하였습니다 얼마나 참담 했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 해집니다 너무나 눈부신 봄날에 본인이 얼마 못 산다는걸 알게된 아버지의 고통을 딸인 저는 차마 헤아릴수가 없습니다 그 후로 식이요법 잘하는 쉼터며 좋은 약이며 소용이 없더군요 그래도 나을수 있다는 희망으로 포기라는것을 모르셨는데 지금은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움직이는것조차도 힘들게 되어버렸습니다.대변 조차도 간병인의 손길에 맡겨져야 한다는 사실이 치욕 스러웠나봅니다.복수가 너무 차서 숨쉬기조차도 고통 스러울텐데 오늘 저더러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그러시길래 모시고 갔었습니다.사실 어제부터 이상 했는데 고모가 보고 싶다고 우시길래 고모님도 오시라고 해서 오셔서 농담도 하며 애써 밝게 있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붕대로 목을 매달았더군요 하지만 그 매듭 조차도 제대로 엮을 힘이 없어서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 모습을 본 저는 아직도 충격 입니다 전 아버지가 운동회에 온 적도 없습니다.같이 동물원을 가서 호랑이를 본 기억도 없습니다.그렇다고 아버지가 절 때렸냐 한대도 맞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하지만 아버지라서 지금 너무 슬프고 아픕니다.혹시 이글을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민지야 아빠가 보고싶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