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광산촌에서 일어났던 여성 차별 및 공공연한 혐오, 성희롱 관련한 영화 보다가이 밤에 갑자기 어린 시절 당했던 성추행이 생각나 정신이 나락에 가 있다가 글을 써 본다. 언제까지고 어릴 것만 같았던(지금도 정신은 아직 20살에 머물렀는데) 나도 곧 50대가 된다. 살면서 은따도 당해보고 온갖 성차별도 당해보고 위험한 일도 당할 뻔 했지만그래도 살라고 태어난 운명인지 나쁜 경험은 쉽게 잊어버리는 덕에 이 나이껏 순탄히 살아왔다. 대부분의 나쁜 경험은 이제 기억도 희미하고 잘 생각나지 않아 그 땐 시대가 그랬지 하면서 단편적인 것들만 떠올리며 추억처럼 남아있는 편인데, 오직 한 사건만이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응어리로 남아 살인 충동을 일으키고 있다. 내가 10살 때 학교를 다녔을 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추운 겨울 나무조각과 갈탄을 받아다 교실에서 난로를 피우고 나무 마룻바닥에 고체 왁스를 발라 각자 가져온 __로 박박 닦고 광을 냈다. 상인들이 학교에 돈을 먹였는지 선생들은 주기적으로 책 강매, 배추 강매 등을 시켰고, 스승의 날이 되면 아주 당연하게 선물을 요구했다.주기적으로 종이를 나눠주고 호구 조사도 했는데, 거기엔 가족 구성원의 이름, 생년월일, 직업을 적게 되어 있었고 살고 있는 집이 전세인지 자가인지 월세인지, 주택인지 아파트인지도 적게 되어 있었다.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주택, 자가에 동그라미 치면서 뿌듯함을 느낀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그 때는 어느 정도 불만은 있었지만 이게 엄청난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었고, 선생들도 그게 당연하다고 교육했으니까. 그러던 언젠가, 아마도 내가 최소 국민학교 3학년 이상이었을 때라고 기억한다. 나는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고, 성격도 쾌활해서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아주 예뻐했다. 나는 반장이었고, 뭐든 나서서 하는 것도 좋아했고, 나를 예뻐하는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어 시키는 거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체 검사와 예방 접종을 했던 때가 있었다. 접종은 반별로 돌아가면서 양호실까지 줄서서 맞았고, 그 사이 다른 학생들은 각자의 교실에서 키, 몸무게, 신체 사이즈를 재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그냥 가볍게 옷을 입은 채로 해도 되는 것들이었는데,몸무게를 잴 때가 되자 선생님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옷 무게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을 측정된 몸무게에서 빼야 했는데, 옷 무게를 얼만큼을 잡아야 최대한 정확한 몸무게를 잴 수 있을지를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위아래 속옷만 입고 몸무게를 재는 게 가장 근접한 측정이 된다라고 했지만반 아이들이 그런 말을 듣고 네, 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기겁을 했다. 어떻게 반 아이들이 다 보는데 속옷만 입고 교실 앞에서 몸무게를 잴 수 있느냐고. 선생님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어쨌든 옷 무게를 알아야 하니 그럼 한 사람만옷 다 벗고 팬티랑 런닝만 입은 상태에서 몸무게를 재 보자고 하며, 반장인 나에게 나오라고 했다. __. 그 어린 마음에도, 좋아하는 담임 선생님이었는데도 그 순간만은 머리가 하얘졌다. 지금 초등학교는 한 반에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그 시절 국민학교에는 한 반에 60명 넘는 인원이 빽빽이 붙어 앉아있었다.아니, 인원 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버젓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벗고 몸무게를 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 인권 따위는 쓰레기통에 내다던진 남자 선생의 위력에 의해. 안 하겠다고 울면서 버텼지만, 남자 선생의 한마디는 나를 나락으로 집어던졌다. "반장이 안 하면, 1분단부터 나와서 옷 벗고 재야겠네." 그 한 마디에 반 아이들의 분노는 나에게로 향했다.반장이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 너 때문에 우리가 다 벗어야 하냐, 빨리 나가 벗어라 등. 그 어린 나이에, 10살밖에 안 된 그 나이에, 집단이 가하는 린치와 그 공간에 있던 권위자의 위력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모범 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지, 왜 내가 이 많은 애들 앞에서 속옷을 보여줘야 하는거지 하는 패닉에 사로잡혀덜덜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어 선생님 앞에 섰다.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선생과 아이들은 입을 모아 빨리 벗으라며 재촉했다.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결국 입던 옷과 양말까지 다 벗고 팬티와 런닝만 입은 상태에서 체중계에 올라가야 했다.우리집은 형제가 많았고 나는 막내였기 때문에, 항상 모든 옷을 물려입었고 한 번 산 옷은 낡아 구멍이 날 때까지 오래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애들은 적나라한 내 맨살과 낡은 속옷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와! 촌스런 곰돌이 흰 팬티다!" 라며 단체로 야유했다. 선생은 그런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 옷 무게 얼마 빼면 되겠네. 이제 옷 입고 들어가." 이게 그 선생 새끼가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그 날,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다음 수업 시간이 될 때마다 들어온 선생님들은 얘 왜 이렇게 울고 있냐고 물었다가자초지종을 듣고는 아... 하며 그냥 우는 날 내버려 두는 게 끝이었다.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남자 아이들은 내 자리로 와서 곰돌이 흰팬티래요 하면서 야유했고, 여자 아이들은 그저 그런 남자 아이들한테 삿대질하며 꺼지라고 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부모님은 맞벌이라서, 하교해서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울고, 또 울고, 계속해서 울었던 것 같다. 밤 늦게 되어서야 퇴근한 부모님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 때 부모님이 나와 내 형제들을 키우기 위해 너무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슬퍼하실까 봐, 내가 당한 일을 말할 수 없었다.그냥 나 혼자 당하고, 나 혼자 삭히면 되는 일이니까 하고 묻어버렸다. 그 날 이후, 난 그렇게 좋아했던 담임 선생님을 증오하게 되었다. 지금도 증오한다. 만나면 대로변에서 식칼로 난도질하고 찢어발겨 죽여버릴 만큼 증오한다. 그 날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에게 옷을 벗으라며 내몰은 반 아이들도 모두 증오한다. 특히 팬티로 조롱한 남자 아이들 역시 칼로 찢어발겨 죽일 만큼 증오한다. 30년이 넘어도 증오스럽다. 잊고 싶은데 이것만은 도저히 기억에서 리셋되지 않고, 해가 갈 수록 이 증오가 계속해서 불어나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내가 누구 한 명 죽이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이 때까지 살 수 있는 것은, 나는 부정적인 경험은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 자체는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고 그 절망감 또한 심장을 쥐어짜는데, 3학년때 일이었는지 5학년때 일이었는지도 헷갈리고, 그 남자 선생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 40대인 사람들 중에, 그 때 같은 반이었던 60명 중에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모르겠다. 내게 벗으라고 다같이 입모아 외쳤던 60명 중의 누군가.
계속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내 이 고통을 알아줬으면 했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이라 돌이킬 수도 없고, 언젠가는 이 일로 우울증이 심해져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어딘가에라도 털어놓아 무거운 마음 한 조각이라도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이런 경험이 누군가의 도구로 사용돼 혐오를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건 원치 않는다. 내가 그 어린 시절에 당한 고통의 가해자는 남자였고, 팬티로 조롱하던 것도 남자였고, 지나가는 길가 차 사이에 숨어 벌거벗은 채 성기를 내보이던 이도 남자였고, 헤어지자고 하자 니 가족까지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이도 남자였고, 면접 자리에서 여자같은 건 안 돼~하면서 비웃던 윗사람도 남자였고, 언제 결혼하냐 남자친구 있냐 여자는 가장이 아니라서 월급 적게 주겠다는 사장도 남자였고,단합이라는 이름으로 나이트 끌고 가서 내 뒤에 붙어 발기한 성기를 비비던 상사도 남자였고, 넌 코가 크니까 그것도 잘 하겠네~ 하면서 음흉하게 웃던 상사도 남자였다. 내가 독립할 때까지 지원해준 아빠도 남자고, 힘든 시절 내 옆을 지켜준 것도 남자였고, 무리하지 말라며 일을 도와 준 직장 동료도 남자였고, 밤늦은 귀가길에 안전을 확인해 준 것도 남자였고,결혼할 때 하객으로서 먼 길 와 준 것도 남자들이었고,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주는 남편도 남자다.
그저, 문득 무저갱을 뚫고 나오는 어린 시절의 검은 기억에 고통스러워 익명의 힘을 빌어 이야기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남자 선생님이 벗으라고 했다.
언제까지고 어릴 것만 같았던(지금도 정신은 아직 20살에 머물렀는데) 나도 곧 50대가 된다. 살면서 은따도 당해보고 온갖 성차별도 당해보고 위험한 일도 당할 뻔 했지만그래도 살라고 태어난 운명인지 나쁜 경험은 쉽게 잊어버리는 덕에 이 나이껏 순탄히 살아왔다.
대부분의 나쁜 경험은 이제 기억도 희미하고 잘 생각나지 않아 그 땐 시대가 그랬지 하면서 단편적인 것들만 떠올리며 추억처럼 남아있는 편인데, 오직 한 사건만이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응어리로 남아 살인 충동을 일으키고 있다.
내가 10살 때 학교를 다녔을 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추운 겨울 나무조각과 갈탄을 받아다 교실에서 난로를 피우고 나무 마룻바닥에 고체 왁스를 발라 각자 가져온 __로 박박 닦고 광을 냈다. 상인들이 학교에 돈을 먹였는지 선생들은 주기적으로 책 강매, 배추 강매 등을 시켰고, 스승의 날이 되면 아주 당연하게 선물을 요구했다.주기적으로 종이를 나눠주고 호구 조사도 했는데, 거기엔 가족 구성원의 이름, 생년월일, 직업을 적게 되어 있었고 살고 있는 집이 전세인지 자가인지 월세인지, 주택인지 아파트인지도 적게 되어 있었다.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주택, 자가에 동그라미 치면서 뿌듯함을 느낀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그 때는 어느 정도 불만은 있었지만 이게 엄청난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었고, 선생들도 그게 당연하다고 교육했으니까.
그러던 언젠가, 아마도 내가 최소 국민학교 3학년 이상이었을 때라고 기억한다. 나는 공부를 잘 하는 편이었고, 성격도 쾌활해서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아주 예뻐했다. 나는 반장이었고, 뭐든 나서서 하는 것도 좋아했고, 나를 예뻐하는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어 시키는 거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체 검사와 예방 접종을 했던 때가 있었다. 접종은 반별로 돌아가면서 양호실까지 줄서서 맞았고, 그 사이 다른 학생들은 각자의 교실에서 키, 몸무게, 신체 사이즈를 재고 있었다.
다른 것들은 그냥 가볍게 옷을 입은 채로 해도 되는 것들이었는데,몸무게를 잴 때가 되자 선생님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옷 무게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을 측정된 몸무게에서 빼야 했는데, 옷 무게를 얼만큼을 잡아야 최대한 정확한 몸무게를 잴 수 있을지를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위아래 속옷만 입고 몸무게를 재는 게 가장 근접한 측정이 된다라고 했지만반 아이들이 그런 말을 듣고 네, 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기겁을 했다. 어떻게 반 아이들이 다 보는데 속옷만 입고 교실 앞에서 몸무게를 잴 수 있느냐고. 선생님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어쨌든 옷 무게를 알아야 하니 그럼 한 사람만옷 다 벗고 팬티랑 런닝만 입은 상태에서 몸무게를 재 보자고 하며, 반장인 나에게 나오라고 했다.
__. 그 어린 마음에도, 좋아하는 담임 선생님이었는데도 그 순간만은 머리가 하얘졌다. 지금 초등학교는 한 반에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그 시절 국민학교에는 한 반에 60명 넘는 인원이 빽빽이 붙어 앉아있었다.아니, 인원 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버젓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벗고 몸무게를 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내 인권 따위는 쓰레기통에 내다던진 남자 선생의 위력에 의해.
안 하겠다고 울면서 버텼지만, 남자 선생의 한마디는 나를 나락으로 집어던졌다.
"반장이 안 하면, 1분단부터 나와서 옷 벗고 재야겠네."
그 한 마디에 반 아이들의 분노는 나에게로 향했다.반장이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 너 때문에 우리가 다 벗어야 하냐, 빨리 나가 벗어라 등.
그 어린 나이에, 10살밖에 안 된 그 나이에, 집단이 가하는 린치와 그 공간에 있던 권위자의 위력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모범 학생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지, 왜 내가 이 많은 애들 앞에서 속옷을 보여줘야 하는거지 하는 패닉에 사로잡혀덜덜 떨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어 선생님 앞에 섰다.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선생과 아이들은 입을 모아 빨리 벗으라며 재촉했다.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결국 입던 옷과 양말까지 다 벗고 팬티와 런닝만 입은 상태에서 체중계에 올라가야 했다.우리집은 형제가 많았고 나는 막내였기 때문에, 항상 모든 옷을 물려입었고 한 번 산 옷은 낡아 구멍이 날 때까지 오래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애들은 적나라한 내 맨살과 낡은 속옷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와! 촌스런 곰돌이 흰 팬티다!"
라며 단체로 야유했다. 선생은 그런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 옷 무게 얼마 빼면 되겠네. 이제 옷 입고 들어가."
이게 그 선생 새끼가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그 날,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다음 수업 시간이 될 때마다 들어온 선생님들은 얘 왜 이렇게 울고 있냐고 물었다가자초지종을 듣고는 아... 하며 그냥 우는 날 내버려 두는 게 끝이었다.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남자 아이들은 내 자리로 와서 곰돌이 흰팬티래요 하면서 야유했고, 여자 아이들은 그저 그런 남자 아이들한테 삿대질하며 꺼지라고 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부모님은 맞벌이라서, 하교해서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울고, 또 울고, 계속해서 울었던 것 같다. 밤 늦게 되어서야 퇴근한 부모님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 때 부모님이 나와 내 형제들을 키우기 위해 너무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슬퍼하실까 봐, 내가 당한 일을 말할 수 없었다.그냥 나 혼자 당하고, 나 혼자 삭히면 되는 일이니까 하고 묻어버렸다.
그 날 이후, 난 그렇게 좋아했던 담임 선생님을 증오하게 되었다. 지금도 증오한다. 만나면 대로변에서 식칼로 난도질하고 찢어발겨 죽여버릴 만큼 증오한다. 그 날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에게 옷을 벗으라며 내몰은 반 아이들도 모두 증오한다. 특히 팬티로 조롱한 남자 아이들 역시 칼로 찢어발겨 죽일 만큼 증오한다.
30년이 넘어도 증오스럽다. 잊고 싶은데 이것만은 도저히 기억에서 리셋되지 않고, 해가 갈 수록 이 증오가 계속해서 불어나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내가 누구 한 명 죽이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이 때까지 살 수 있는 것은, 나는 부정적인 경험은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 자체는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고 그 절망감 또한 심장을 쥐어짜는데, 3학년때 일이었는지 5학년때 일이었는지도 헷갈리고, 그 남자 선생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 40대인 사람들 중에, 그 때 같은 반이었던 60명 중에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모르겠다. 내게 벗으라고 다같이 입모아 외쳤던 60명 중의 누군가.
계속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내 이 고통을 알아줬으면 했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이라 돌이킬 수도 없고, 언젠가는 이 일로 우울증이 심해져 극단적 선택을 할 수도 있지만,어딘가에라도 털어놓아 무거운 마음 한 조각이라도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이런 경험이 누군가의 도구로 사용돼 혐오를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건 원치 않는다.
내가 그 어린 시절에 당한 고통의 가해자는 남자였고, 팬티로 조롱하던 것도 남자였고, 지나가는 길가 차 사이에 숨어 벌거벗은 채 성기를 내보이던 이도 남자였고, 헤어지자고 하자 니 가족까지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이도 남자였고, 면접 자리에서 여자같은 건 안 돼~하면서 비웃던 윗사람도 남자였고, 언제 결혼하냐 남자친구 있냐 여자는 가장이 아니라서 월급 적게 주겠다는 사장도 남자였고,단합이라는 이름으로 나이트 끌고 가서 내 뒤에 붙어 발기한 성기를 비비던 상사도 남자였고, 넌 코가 크니까 그것도 잘 하겠네~ 하면서 음흉하게 웃던 상사도 남자였다.
내가 독립할 때까지 지원해준 아빠도 남자고, 힘든 시절 내 옆을 지켜준 것도 남자였고, 무리하지 말라며 일을 도와 준 직장 동료도 남자였고, 밤늦은 귀가길에 안전을 확인해 준 것도 남자였고,결혼할 때 하객으로서 먼 길 와 준 것도 남자들이었고,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주는 남편도 남자다.
그저, 문득 무저갱을 뚫고 나오는 어린 시절의 검은 기억에 고통스러워 익명의 힘을 빌어 이야기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