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화 -잘 어울린다 두 사람. 정교수의 말에 박교수는 마냥 기분 좋은 얼굴이다. 입맛이 없다. 먹는 것을 그만 둔다. -왜, 더 먹지 않고. -충분해요... -다른 거 좀 마실래? -아뇨..됐어요. 박교수는 내가 불편할 만큼 자상하게 대한다. 어쩐지 남의 옷을 걸쳐 입고 앉아 있는 기분이다. 그래, 이쁘게 봐주자... -우리 신랑두 연애 땐 그랬어. 그거, 결혼하는 순간 다 거짓말 돼. -당신은 다른 건 다 좋은데...아줌마 티 너무 내는 거 싫더라. -내가 아줌마지 그럼, 아가씬가?...사람이 제일 추한 게 뭔지 알어? 아줌마가 아가씨인 척, 유부남이 총각인 척...자기 자리가 어딘지도 분간 못하는 인간들...솔직해서 나쁠 거 뭐 있어, 나는 아줌마야...결혼하는 순간 아줌마일 수 밖에 없었고, 죽을 때까지두 아줌마야. 둘은 마치 오래 전 친구였던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 받느라 정신없다. 머리가 아프다. 미안해요...선배한테 미안하고...하은이한테도 미안하고...내가 지금...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냥...잘 가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아요...준하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두통이 오려나 보다. *** 그들과 헤어지고 작업실로 들어오는 길에 약국을 들러 두통약을 산다. 정말 이젠 겨울이다. 으스스 뼈가 시린 듯 온 몸이 아파온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찬 공기가 한꺼번에 덮친다. 약을 먹고 담요에 몸을 감싼다.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 앉는다. *** 준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그렇게 앉아 있은지 한 시간째다. 나는 그런 준하를 본다.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준하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저 가벼운 것일 뿐이라고만 말해준다면...나는 모든 걸 덮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준하야... 고개를 들지 않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나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준하는 왜...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난 그것이 더 두렵다. -아무 말이라도...해봐. 화 안내구 들을게. 그냥...없었던 일로, 듣지도, 보지도 않았던 일로 덮자구 그러면...덮을게. 그러니까 말해봐... 눈물이 다시 나려 한다. 나는 애써 참는다. -나, 모른척 하려구 그랬어. 아닐거다..아닐거다..그러면서 너, 믿을려구 했어. 내가 너에게 묻는 순간, 그게 기정사실이 되는 게 무서웠어...넌, 거짓말 같은 거 못하는 애야. 그런데...넌, 이미 내게 거짓말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어....이번에두 그냥...거짓말 한 번 더 하구 말자. 날 봐...보구 얘기해봐, 응? 준하가 고개를 든다. 내 시선을 보지 못한다. 눈물이 그렁해진다. 준하는 지금 힘들다. 준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나인지, 지니선배인지....나는 알고 싶지 않다. 아는 순간...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난....무엇을 묻고 있는가. -미안해... 준하가 눈물을 기어이 쏟는다. -무슨 뜻이야? 울지 말구 말해...너, 우는 거 보기 싫어. 울지 말구 말해... -니가 생각하는 거....그거....맞어. 가슴이 다시 미어진다. 이 앨 어떡하나... -내가 뭘 생각하는데? 다시 말이 없다. 나는 지금 준하를 고문한다. 아플 걸 알면서도, 다시 내가 아파질 걸 알면서도 나와 준하를 고문하고 있다. 듣지 말자... -하은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마...그냥 넘겨.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예민하게 굴었어...아무 것도 아닌 일을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밥 먹자. 배 고프다... 주방으로 들어간다. 눈물이 쏟아지는데...주책 맞게 왜 자꾸 눈물이 나지...국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낸다. 양푼이를 꺼내서 밥을 푼다. 먹구 나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거야....괜찮아질거야. 반찬을 이것저것 생각없이 양푼이에 담는다. 그리고 고추장을 넣고 비빈다. -준하야..밥 먹자. 말이 없다. 거실로 나가본다. 여전히 그 자세로 앉아 있다. 아직도 우는 것 같다. -싸우더라두 밥 먹구..기운내서 싸우자. 너 안 먹으면 나두 안 먹는다...나 굶길 거야? 그제서야 일어난다. 눈물을 닦는 준하의 모습이 여섯 살 난 태연이 같다. 준하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는다. 고추장에 비빈 밥을 먹으면서 눈물도 삼킨다. 먹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우린 아무 일없듯 웃을 수 있을지 모른다. ***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작업실 문은 닫혀 있다. 어딜 간거지...다시 돌아 나온다. 정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니를 묻는다. 정교수에게도 연락이 온 게 없다. 오늘 아침에 데리러 온다고 했었는데...내일이었던가. 아니다 오늘이 맞는데 그녀는 없다. 다시 작업실문을 두드린다. 작업을 늦게 까지 하다 보면 지금 아마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열쇠 집에 전화를 넣는다. 혹시라도 모를 일이다. *** 학원 앞에서 차를 세운다. 준하는 이제 예전과 다르다. 말이 없다. 나는 평소와 다를바 없이 재잘댄다. 그래도 준하는 말이 없다. -준하야... 준하가 본다. 나를 보는 준하는 준하가 아니다. -운전 조심해, 사람 조심하구... 고개를 끄덕인다. -말, 안할래? 얘기 하기 싫어? -아니.... -그럼, 오늘도 수고해 그렇게 말해봐. -일찍 올게.. -늦게 와, 늦게 와두 괜찮어. 많이 늦어두....기다릴게. 가...나중에 보자. 차에서 내려 사라지는 준하를 본다. 늦어두....마니...늦어두 기다릴게. 준하야... *** 방향을 바꾼다. 사무실이 아닌 근처 공원으로 차를 돌린다. 하은이에게 너무...정말 너무 많이 미안하다...거짓말이래도 했어야 했는데...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니라고도 사실이라고도...공원에 차를 세운다. 조깅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보인다. 지니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신호음만 들릴 뿐 받지 않는다. 아무래도...난, 솔직해져야 할 것 같다. *** 지니를 안고 주차장으로 뛰어 간다. 고열이 있다. 어제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더니 일이 난 것이다. 식은 땀을 흘리고 의식을 잃은 이 여자...이 여자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을 한다. 그녀를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원에선 감기몸살과 심신이 많이 피로해졌다고 며칠 쉬면 괜찮아질거라고 한다. 바보 같은 여자...제 몸을 이렇게 취급하다니. 병실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본다. 입을 달싹 거린다...준하야...준하야....그녀는 지금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부른다. *** -세상 다 끝난 사람처럼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이영달이 파이프에 담배를 끼워 넣으며 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신다. 이젠 차의 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느끼지 못하는 것일게다. -쯧쯧쯧....당장 죽을 일이 뭬 있나? -솔직하고 싶은데...그 솔직함에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다면...거짓을 말해야 할까요? -난해한 질문이군...내가 자네라면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겠네...상처가 아무는데에는 시간이란 놈보다 나은 특효약이 없지. 당장은 아파서 죽을 것 같다가도...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지게 되어 있어...그게 인간이야. 생겨 먹은 게 그런데 어쩌겠누. 자네가 견딜 수 있다면 거짓을 말하고....자신이 없거든 솔직해지는 게 맞겠지. 어차피 사람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네. 나 죽는데 남 걱정 하게 생겼나.. 이영달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 혼란만 가져 오는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자네의 고민이 뭔지 내가 맞혀볼까?....자네 지금 여자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닌가?...아무 말 못하는 거 보니 내 말이 맞구먼...누군가 한 사람은 그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네. 그게 자네겠는가, 여자겠는가....어느쪽이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 *** 수업이 끝나고 멍하니 창 밖을 본다. 보는 게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 가시방석위에 앉아 있다. 오늘도 무사히...준하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대로 묻어버리길.... -선생님... 재경이 문 앞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다. -들어와. 쭈삣하게 들어오며 재경이 나를 살핀다. -무서워서 말두 못 붙이겠어요. -왜? -표정이....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래요...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아니...좀 피곤해서 그래. 내가 정말 그렇게 흉한 표정하구 있었니? -네, 많이요. 막 화가 나서 걸리기만 해봐라...그런 표정요. 재경의 말에 피식 웃는다. -어, 웃었네. 우리 선생님. -이쁘니 이제? -그럼요, 사무실 가 보세요...누가 찾아 왔는데. 재경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인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맹랑하네... 사무실로 들어가자 유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지려 했다. 그녀의 말이 정말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까....그냥 밉다는 생각을 한다. 너 때문이라고...너의 그 불순한 생각 때문에 이렇게 된거라고...괜히 그녀 탓으로 돌리고 싶다. -어쩐 일이야? -표정이 왜 그래? 나 안 반갑니? -아니...좀 피곤해서 그래. 근데 무슨 일이야? -좀 섭섭하다. 일 없음 그냥 가라는 말처럼 들리네. -그랬니... -나, 너보러 온게 아니라 준하 보러 왔어. 오늘 저녁 같이 먹자...우리 그이하구. -준하 바뻐...오늘 늦을지도 몰라. -전화 한 번 해봐. -피곤한데...담에 먹으면 안될까? -여기까지 왔는데 꼭 그래야겠니? 유미에겐 보여주기 싫은데...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 잠에서 깬 지니는 말이 없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다. -기분이 안좋아? 말이 없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다. 애써 모른척 할뿐이다. -당신이 부탁한 집, 되도록 빨리 비우라고 그랬어. 이번 주 안엔 비운다니까...그때까진 그냥 병원이 있자. 그래도 말이 없다. -유지니...왜 그래? 뭐가 문제야? 그녀의 손등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본다. -나 좀...어디로 멀리...데려가줘요. 그녀는 울먹인다. 그리고 무릎위로 고개를 묻는다. 나는 병실을 나온다. 휴게실에 가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서준하....그에게 화가 난다. 제기랄.... *** 하은의 학원으로 차를 몰고 간다. 대학 졸업을 하고 처음 만나는 유미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한다. 내키지 않지만 싫다고 말하지 못한다. 휴대폰이 울린다. 박교수다. -지금 좀 와 줄 수 있어? -무슨 일인데요? -여기, 병원이야. 잠깐이면 돼.... 지니선배가 입원했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설인다. 그녀를.....만나야할 것 같다.
해바라기-19-
제 19 화
-잘 어울린다 두 사람.
정교수의 말에 박교수는 마냥 기분 좋은 얼굴이다. 입맛이 없다. 먹는 것을 그만 둔다.
-왜, 더 먹지 않고.
-충분해요...
-다른 거 좀 마실래?
-아뇨..됐어요.
박교수는 내가 불편할 만큼 자상하게 대한다. 어쩐지 남의 옷을 걸쳐 입고 앉아 있는
기분이다. 그래, 이쁘게 봐주자...
-우리 신랑두 연애 땐 그랬어. 그거, 결혼하는 순간 다 거짓말 돼.
-당신은 다른 건 다 좋은데...아줌마 티 너무 내는 거 싫더라.
-내가 아줌마지 그럼, 아가씬가?...사람이 제일 추한 게 뭔지 알어? 아줌마가 아가씨인
척, 유부남이 총각인 척...자기 자리가 어딘지도 분간 못하는 인간들...솔직해서 나쁠
거 뭐 있어, 나는 아줌마야...결혼하는 순간 아줌마일 수 밖에 없었고, 죽을 때까지두
아줌마야.
둘은 마치 오래 전 친구였던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 받느라 정신없다. 머리가 아프다.
미안해요...선배한테 미안하고...하은이한테도 미안하고...내가 지금...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냥...잘 가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아요...준하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두통이
오려나 보다.
***
그들과 헤어지고 작업실로 들어오는 길에 약국을 들러 두통약을 산다. 정말 이젠
겨울이다. 으스스 뼈가 시린 듯 온 몸이 아파온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찬 공기가 한꺼번에 덮친다. 약을 먹고 담요에 몸을 감싼다.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
앉는다.
***
준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그렇게 앉아 있은지 한 시간째다. 나는
그런 준하를 본다.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준하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저 가벼운 것일 뿐이라고만 말해준다면...나는 모든 걸 덮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준하야...
고개를 들지 않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나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준하는 왜...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난 그것이 더 두렵다.
-아무 말이라도...해봐. 화 안내구 들을게. 그냥...없었던 일로, 듣지도, 보지도 않았던
일로 덮자구 그러면...덮을게. 그러니까 말해봐...
눈물이 다시 나려 한다. 나는 애써 참는다.
-나, 모른척 하려구 그랬어. 아닐거다..아닐거다..그러면서 너, 믿을려구 했어. 내가
너에게 묻는 순간, 그게 기정사실이 되는 게 무서웠어...넌, 거짓말 같은 거
못하는 애야. 그런데...넌, 이미 내게 거짓말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어....이번에두
그냥...거짓말 한 번 더 하구 말자. 날 봐...보구 얘기해봐, 응?
준하가 고개를 든다. 내 시선을 보지 못한다. 눈물이 그렁해진다. 준하는 지금
힘들다. 준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나인지, 지니선배인지....나는 알고 싶지 않다.
아는 순간...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난....무엇을 묻고 있는가.
-미안해...
준하가 눈물을 기어이 쏟는다.
-무슨 뜻이야? 울지 말구 말해...너, 우는 거 보기 싫어. 울지 말구 말해...
-니가 생각하는 거....그거....맞어.
가슴이 다시 미어진다. 이 앨 어떡하나...
-내가 뭘 생각하는데?
다시 말이 없다. 나는 지금 준하를 고문한다. 아플 걸 알면서도, 다시 내가 아파질 걸
알면서도 나와 준하를 고문하고 있다. 듣지 말자...
-하은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 하지마. 아무 말도 하지마...그냥 넘겨.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예민하게 굴었어...아무 것도 아닌 일을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밥 먹자. 배 고프다...
주방으로 들어간다. 눈물이 쏟아지는데...주책 맞게 왜 자꾸 눈물이 나지...국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낸다. 양푼이를 꺼내서 밥을 푼다. 먹구 나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거야....괜찮아질거야. 반찬을 이것저것 생각없이 양푼이에 담는다.
그리고 고추장을 넣고 비빈다.
-준하야..밥 먹자.
말이 없다. 거실로 나가본다. 여전히 그 자세로 앉아 있다. 아직도 우는 것 같다.
-싸우더라두 밥 먹구..기운내서 싸우자. 너 안 먹으면 나두 안 먹는다...나 굶길 거야?
그제서야 일어난다. 눈물을 닦는 준하의 모습이 여섯 살 난 태연이 같다.
준하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는다. 고추장에 비빈 밥을 먹으면서 눈물도 삼킨다.
먹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우린 아무 일없듯 웃을 수 있을지 모른다.
***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작업실 문은 닫혀 있다. 어딜 간거지...다시 돌아 나온다.
정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니를 묻는다. 정교수에게도 연락이 온 게 없다. 오늘
아침에 데리러 온다고 했었는데...내일이었던가. 아니다 오늘이 맞는데 그녀는 없다.
다시 작업실문을 두드린다. 작업을 늦게 까지 하다 보면 지금 아마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열쇠 집에 전화를 넣는다. 혹시라도 모를 일이다.
***
학원 앞에서 차를 세운다. 준하는 이제 예전과 다르다. 말이 없다. 나는 평소와 다를바
없이 재잘댄다. 그래도 준하는 말이 없다.
-준하야...
준하가 본다. 나를 보는 준하는 준하가 아니다.
-운전 조심해, 사람 조심하구...
고개를 끄덕인다.
-말, 안할래? 얘기 하기 싫어?
-아니....
-그럼, 오늘도 수고해 그렇게 말해봐.
-일찍 올게..
-늦게 와, 늦게 와두 괜찮어. 많이 늦어두....기다릴게. 가...나중에 보자.
차에서 내려 사라지는 준하를 본다. 늦어두....마니...늦어두 기다릴게. 준하야...
***
방향을 바꾼다. 사무실이 아닌 근처 공원으로 차를 돌린다. 하은이에게 너무...정말
너무 많이 미안하다...거짓말이래도 했어야 했는데...나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니라고도 사실이라고도...공원에 차를 세운다. 조깅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보인다. 지니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신호음만 들릴 뿐 받지 않는다.
아무래도...난, 솔직해져야 할 것 같다.
***
지니를 안고 주차장으로 뛰어 간다. 고열이 있다. 어제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더니 일이 난
것이다. 식은 땀을 흘리고 의식을 잃은 이 여자...이 여자를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을
한다. 그녀를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 갔다. 병원에선 감기몸살과 심신이 많이 피로해졌다고
며칠 쉬면 괜찮아질거라고 한다. 바보 같은 여자...제 몸을 이렇게 취급하다니. 병실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본다. 입을 달싹 거린다...준하야...준하야....그녀는 지금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부른다.
***
-세상 다 끝난 사람처럼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이영달이 파이프에 담배를 끼워 넣으며 말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신다. 이젠
차의 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느끼지 못하는 것일게다.
-쯧쯧쯧....당장 죽을 일이 뭬 있나?
-솔직하고 싶은데...그 솔직함에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다면...거짓을 말해야 할까요?
-난해한 질문이군...내가 자네라면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겠네...상처가 아무는데에는
시간이란 놈보다 나은 특효약이 없지. 당장은 아파서 죽을 것 같다가도...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지게 되어 있어...그게 인간이야. 생겨 먹은 게
그런데 어쩌겠누. 자네가 견딜 수 있다면 거짓을 말하고....자신이 없거든 솔직해지는
게 맞겠지. 어차피 사람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네. 나 죽는데 남 걱정 하게 생겼나..
이영달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 혼란만 가져 오는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자네의 고민이 뭔지 내가 맞혀볼까?....자네 지금 여자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닌가?...아무 말 못하는 거 보니 내 말이 맞구먼...누군가 한 사람은 그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네. 그게 자네겠는가, 여자겠는가....어느쪽이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
***
수업이 끝나고 멍하니 창 밖을 본다. 보는 게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 가시방석위에 앉아 있다. 오늘도 무사히...준하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대로 묻어버리길....
-선생님...
재경이 문 앞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다.
-들어와.
쭈삣하게 들어오며 재경이 나를 살핀다.
-무서워서 말두 못 붙이겠어요.
-왜?
-표정이....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래요...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아니...좀 피곤해서 그래. 내가 정말 그렇게 흉한 표정하구 있었니?
-네, 많이요. 막 화가 나서 걸리기만 해봐라...그런 표정요.
재경의 말에 피식 웃는다.
-어, 웃었네. 우리 선생님.
-이쁘니 이제?
-그럼요, 사무실 가 보세요...누가 찾아 왔는데.
재경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인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맹랑하네...
사무실로 들어가자 유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지려 했다. 그녀의
말이 정말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까....그냥 밉다는 생각을 한다. 너 때문이라고...너의 그
불순한 생각 때문에 이렇게 된거라고...괜히 그녀 탓으로 돌리고 싶다.
-어쩐 일이야?
-표정이 왜 그래? 나 안 반갑니?
-아니...좀 피곤해서 그래. 근데 무슨 일이야?
-좀 섭섭하다. 일 없음 그냥 가라는 말처럼 들리네.
-그랬니...
-나, 너보러 온게 아니라 준하 보러 왔어. 오늘 저녁 같이 먹자...우리 그이하구.
-준하 바뻐...오늘 늦을지도 몰라.
-전화 한 번 해봐.
-피곤한데...담에 먹으면 안될까?
-여기까지 왔는데 꼭 그래야겠니?
유미에겐 보여주기 싫은데...표정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
잠에서 깬 지니는 말이 없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한다.
-기분이 안좋아?
말이 없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다. 애써 모른척 할뿐이다.
-당신이 부탁한 집, 되도록 빨리 비우라고 그랬어. 이번 주 안엔 비운다니까...그때까진
그냥 병원이 있자.
그래도 말이 없다.
-유지니...왜 그래? 뭐가 문제야?
그녀의 손등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본다.
-나 좀...어디로 멀리...데려가줘요.
그녀는 울먹인다. 그리고 무릎위로 고개를 묻는다. 나는 병실을 나온다. 휴게실에 가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문다. 서준하....그에게 화가 난다. 제기랄....
***
하은의 학원으로 차를 몰고 간다. 대학 졸업을 하고 처음 만나는 유미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한다. 내키지 않지만 싫다고 말하지 못한다. 휴대폰이 울린다. 박교수다.
-지금 좀 와 줄 수 있어?
-무슨 일인데요?
-여기, 병원이야. 잠깐이면 돼....
지니선배가 입원했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설인다. 그녀를.....만나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