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건국기 1부-8편: 도마

Alone2004.08.15
조회14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으아아악~!'

머리속에서 울려오는 엄청난 굉음에 루씨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떴다. 고즈넉히 들리는 새소리와 이는 바람이 루씨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꿈을 꾼 듯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왕왕대고 있는 듯 하여 루씨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제야 깨어나셨구료."

노인의 음성에 루씨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울창한 숲 속 공터에 자신과 노인이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상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 ... 아이리스님~!"

곁에 아이리스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씨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우욱~!' 소리를 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보게 조심하시게. 아직 성치 않은 몸이란 말일세. 자네는 사흘만에 깨어난 것이란 말이야~!"

'사...사흘이라구?'

루씨는 낭패스러웠다. 사흘동안 자신이 의식이 없었다면 아이리스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수도승 복장의 노인이 한마디 건넨다.

"자네와 같이 쓰러져 있던 아가씨라면 저쪽 강가에 있다네."

그 말에 루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부리나케 노인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방금 전의 병약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과연 노인의 말대로 강가에 다다르니 아이리스의 뒷모습이 보인다.
하늘 위에 높이 뜬 햇살이 수면 위로 눈부시게 반짝이는데 아이리스는 강가에 작은 바위위에 웅크리고 앉아 미동이 없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긴 머리칼을 흩뜨린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건만 갑자기 루씨는 말문이 막혀 그녀에 두걸음쯤 뒤에서 멈춰섰다.
그도 그럴 것이 임무 덕분에 두 달 전부터 그녀에 대해서 듣기야 들었지만 루씨가 정식으로 이렇게 그녀를 대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아이리스님 괜찮으십니까?"

루씨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붙인다.

"당신은 누구죠?"

"네... 네?"

갑작스런 질문에 루씨가 당황한다. 응당 이런 상황이라면 '깨어났나요?' 내지는 '몸은 괜찮은가요?'' 라는 먼저 질문이 나와야 할 터인데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대뜸 누구냐는 질문부터 하는 것이다.
루씨가 당황하며 되묻자 그녀가 다시 말한다.

"사흘 동안 당신을 살펴봤어요. 당신의 그 하얀 날개... 당신은 정말 천사인가요?"

루씨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날개를 드러내보인 것을 깜빡한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금도 그의 날개는 그의 등 뒤에 커다랗게 솟아 있었다. 곤두와나 성에서 떨어질 때 부러졌는지 그의 날개에는 나무와 천쪼가리로 만들어진 부목이 덧대어져 있다.
어차피 그녀는 성녀가 될 사람. 상황에 대한 설명은 원래 십이지장인 베르베르가 응당 해야 할 몫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루씨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얘기해주기로 맘먹었다.
입을 떼려는데 강가 쪽으로 앉아 있던 그녀가 갑자기 방향을 돌리고는 루씨의 발끝에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 꿇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천사님! 천사님! 분명 진짜 천사님이 맞으시다면 하나님께 말씀드려주시어 부디 불쌍한 저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어머니도 안계신채 혼자 몸으로 18해 동안 저를 키워주신 분입니다. "

아이리스는 두손을 모은채 코를 땅바닥에 박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난감해진 루씨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자신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한다.

"아이리스님 ! 아이리스님 !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러시면 제가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이구!!"

루씨는 머리를 조아리다가 참을 수 없는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롬웰에게 찔린 상처이다. 천사의 몸인지라 그의 회복은 매우 빨랐으나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수도승 복장의 노인이 그들을 데리러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이리스의 울음이 잦아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둘을 데리고 다시 공터로 갔다.
모닥불 주위에는 조촐하게 차려진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노인이 식사를 하는 가운데 루씨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 아이리스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다.
노인이 물끄러미 이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리스에게 한마디 한다.

"아가씨 어서 음식을 드시구랴!
천사 양반이 아가씨가 음식을 안 드시니 자신도 먹지 않는구료.
아가씨야 천사님의 축복으로 성벽에서 떨어졌어도 멀쩡하지만 저러다가 몸도 아직 성치 않은 천사님이 덜컥 병이라도 나시면 아가씨 소원도 못 들어주시지 않겠소?"

잠시 말을 끊더니 노인은 루씨에게도 한마디 한다.

"잘 먹어두어야 날개뼈도 금방 붙을 것이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그의 대사에 루씨가 잠시 수도승을 뚫어지라 쳐다보는데 아이리스가 슬그머니 음식을 집어 게걸스럽게 입에 넣다가 목이 막혀 켁켁 거린다.
아무래도 수도승 노인의 한마디가 그녀에게는 자극이 된 듯 하다.
루씨가 얼른 물을 담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식사를 하고 루씨는 노인에게 자초지정을 듣게 되었다.
버서커들의 공포스런 밤에 이 수도승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 곤두와나 성에 들렀다. 그러나 갑작스런 상황에 그는 그들을 피해 성을 탈출하게 되었는데 새벽녘에 성벽 아래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이 둘을 말에 싣고 되도록 멀리 그 성에서 달아나다 보니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도중에 아이리스는 바로 정신이 들었으나 루씨는 사흘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
루씨는 아이리스를 한 번 돌아다보았다.
그녀의 아버지도 살해되었다고 하는데 다행히 저렇게 비교적 온전하게 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그랬다. 아이리스는 아버지의 살해 장면을 목격하고는 잠시 충격에 빠져있었다. 성벽에서 뛰어내린 것도 그 이유에서 였던 것이다. 하지만 추락하던 당시 그녀는 달빛 속에서 나타난 한명의 천사를 보게 되었으며 그 천사는 아직도 자신 곁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천사라면 분명 자신의 아버지도 살려내주시리라.


"걱정마시오. 틀림없이 천사분이 아가씨의 아버님을 살려주실 것이오"

노인이 아이리스에게 말한다. 그러자 루씨의 얼굴이 대번에 붉으락푸르락한다.

안될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모든 계의 안녕을 책임지는 천사들이었지만 생명의 나고 죽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들 천사들에게 부여된 능력은 극히 일부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말해야 했지만 루씨는 차마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에게 자신들의 임무와 그녀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 했지만 시기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가지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중에 베르베르님이 설명하도록 하는게 낫겠다고 루씨는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한 루씨는 당장의 일을 위해 노인에게 질문했다.

"여기서 헬름 평원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그곳에 가시려오"

루씨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수도승이 말한다.

"오호~! 헬름 평원이라면 우리 사원이 있는 곳인데 ... 잘 됐소이다. 내가 안내하리다. 어차피 방향도 같고 이 노인네도 심심치 않을 터이니.."

"그..그래 주시겠습니까?"


루씨가 반가운 마음에 되묻자 노인이 갑자기 존대로 대답하며 정색을 한다.

"당연히 그래얍지요. 천사님을 모시는 일은 우리 성직자들에게는 영광이고 축복이옵니다."

고목나무처럼 생긴 커다란 지팡이를 짚으며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모닥불에 넣기 위해 모아둔 마른 나무 가지를 몇 그루 집다가 갑자기 노인이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아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제 이름은 도마라 하옵니다."

이상하리만치 밝게 빛나는 그의 눈빛에 루씨는 섬찟해하며 대답했다.

"제... 제 이름은 루씨~!, 루시퍼 하이에르프 미케르만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