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됴방 러브스토리 5

kojms200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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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처키, 분노하다


집으로 돌아가던 순간까지도 나는 그녀의 향기에 취해 황홀경 속을 헤매었다.

<러브 액츄얼리>를 보고 나오며, 그녀가 던진 말이 팅커벨의 빛가루처럼 줄곧 머릿속을 떠다녔다.

“<숏 컷>의 로맨틱 코미디 버전 같네요. 정말 잘 봤어요.”

아~ 20자평도 어쩜 저리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냥 ‘잘 봤어요’도 아닌, ‘정, 말, 잘, 봤, 어, 요’였다. 여느 사람 같으면 그저 ‘수고하세요’라고 하고 말 것을……. 정말이지 비디오방 아르바이트생에게 힘이 되는 말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보오람찬~ 하루 일을 끝마아치고오서~’로 시작되는 군가 <팔도 사나이>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보니, 함께 자취하는 동기 녀석은 오늘도 벌건 눈으로 에로영화를 보고 있었다.

“야, 너는 임마, 인터넷 같은 데에서 더 쎈 것도 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맨날 에로영화만 보고 있냐?”

내가 양말을 벗으며 물으니, 놈은 도리어 나에게 뭘 모른다는 투로 대꾸했다.

“진정한 고수는 포르노는 안 보는 거야, 자식아. 니가 포르노와 에로의 차이점을 알기나 해?”

“뭔데?”

“로만 폴란스키가 그랬대. 포르노는 닭 전체를 보여주는 거고, 에로는 닭의 깃털만 보여주는 거다……. 노골적으로 싹 까서 보여주는 것보다 보일 듯 말 듯 한 그 아슬아슬함이 훨씬 더 짜릿한 거야, 자식아. 너 치마 입고 다리 쩍 벌리고 있는 게 흥분되냐, 치마 입은 다리가 살짝 벌어져서 약간씩 보일락말락하는 게 흥분되냐?”

나는 대답 없이 욕실에 씻으러 들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청바지 입고 있는 게 흥분된다, 임마.’

다 씻고 나왔을 때도 여전히 동기놈은 에로영화를 보고 있었다.

“아우~ 하소연이 진짜 죽인다니까. 진정한 에로가 뭔지 아는 배우야. 음냐.”

거의 브라운관 속으로 뛰어들어갈 듯한 자세였다. 손만 밑으로 가면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보고 싶은 얼굴’을 부르는 민혜경을 보며 외로움을 달래는 장면과 판박이였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비디오방의 밤꽃향기액체사건이 떠올랐다. 녀석에게 그 사건을 얘기해주니,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야, 그런 놈들은 하수야, 하수……. 진정한 고수는 그렇게 질질 흘리고 다니질 않지. <공공의 적>에서 이성재가 샤워하면서 팔운동하는 장면 있잖아. 그렇게 깔끔하게 하는 게 진정한 고수다, 이거야. 근데 내가 재미있는 거 알려줄까?”

“뭔데?”

“너 스스로를 달랠 때, 뭐가 있으면 가장 좋은 줄 알아?”

녀석이 스스로를 달랜다는 건 바로 손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글세…… 실물에 가까운 인형?”

요새는 거의 실물에 가까운 인형이 고가로 팔리고 있다는 얘기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틀렸어, 자식아. 고무줄 하나만 있으면 돼.”

“고무줄?”

“그래. 내가 아무한테도 안 알려줬던 건데, 너한테만 특별히 전수하마.”

마치 대단한 비법이라도 전수하는 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있지, 준비한 고무줄을 팔뚝에 묶어. 꽉! 피가 안 통하게……. 그리고 한 십분 기다려. 그럼 피가 안 통해서 팔이 마비가 되거든? 느낌도 거의 없고……. 그럴 때 그 손으로 스스로를 달래봐.”

“……?”





“있지, 남의 손 같아서 기분이 죽여.”


“……!”

정말이지 여자친구 없는 자취생의 처절한 비법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녀석의 뒤통수를 때렸다.

“예라……!”


이불을 깔고 누웠을 때에도 그녀의 얼굴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 날 밤 나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그러나 다음날 비디오방에 오지 않았다.

진열장을 닦다 어제 밤꽃향기액체사건을 일으킨 <인 더 컷>에 눈이 갔다.

이 비디오가 정말 그렇게 한번 보면 미쳐서 비디오방에서 밤꽃향기액체를 발사하고 나갈 만큼 야한 영화였던가? 전혀 아니었다. 괜한 광고문구만 보고 ‘이야~ 이거 죽이겠는데?’ 하고 침받이 준비하고 봤다간, 욕만 연발하며 나올법한 영화였다.

특히 영화상에서 누가 어디까지 얼마나 벗느냐를 영화 평가의 척도로 삼는 아저씨들은 더더욱 그랬다. 물론 정사 장면이야 나오지만 결정적인 뭔가가 안 나오는데 이걸 보고 흥분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영화는 시종일관 어두컴컴해서 밤 장면이라도 나올라치면, 보이는 건 자막 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암흑 뿐…….

게다가 <스위티> <내 책상 위의 천사> <피아노> 등의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제인 캠피온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정서적 깊이는 온데간데없고, 순수한 작가영화도 아닌, 그렇게 에로틱스릴러도 아닌 어색한 영화로 관객이 영화 내용을 따라잡을 수 없이 영화 혼자 랄랄랄라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다 끝나버리니, 말초신경의 자극으로 인한 동공의 팽창과 호르몬 분비의 활성화 및 걷잡을 수 없는 성적욕구의 대리만족을 목적으로 볼 영화로는 턱도 없는 영화였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결과……

답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여하튼 이제 혼자 오는 남자한테는 절대 <인 더 컷>을 적극 ‘비추’하리라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날 저녁 <인 더 컷>을 찾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나는 그들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별로 굶주린 것 같지도 않고 비교적 인상이 선량한 대학생같기에 믿고 <인 더 컷>을 넣어 주었다.

그 결과……

나는 또 땡큐 화장지 10미터를 써야 했다.

그 커플들은 지난번처럼 위장도 하지 않은 채 소파와 보조 소파 사이에 버젓이, 예의 그 밤꽃향기액체를 마음껏 방출하고는 벌건 얼굴로 뒤도 안 돌아보고 비디오방을 나갔다.
나는 그 광경에 두 무릎을 꿇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울부짖어야 했다.

“왜! 왜!(영어로는 Why! Why!)”

그런 일은 한번 더 있었다.

그 땐 좀더 심했다.

아예 침 뱉을 걸 발로 문지르듯 사정없이 발로 짓이겨 바닥을 그 밤꽃향기액체로 비비다시피 하고 나갔는데, 바닥에 비빔밥처럼 고루 비벼진 그걸 발견한 순간, 나는 그 날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끄윽, 하느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 순간 이후로 <인 더 컷>을 이 비디오방의 X등급으로 선포한다, 꽝꽝꽝 선언하고 일체 대여를 금지한 채 여자끼리만 와서 찾을 시 틀어 주었다.

그리고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인 더 컷>의 무엇이 그토록 사람을 발정난 수컷으로 만드는가?

답은 바로 비디오방의 내부에 있었다.

이 비디오방은 교묘하게 복도 조명이 바닥 바로 위에 붙어 있어서 방 유리창에 불빛이 반사되어 비디오를 보는 방안이 들여다봐도 잘 안 보였다. 거기다 화면까지 어두컴컴하면 아예 속에서 난리 블루스가 아니라 힙합 댄스를 춰도 밖에서 봐서는 안 보인다는 것!
해답은 거기 있었다. 그래서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을 허투루 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화면은 줄기장창 어둡고 게다가 영화는 답답하기만 하니, ‘뭔가’ 확 터뜨리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따금 ‘야시시'한 장면도 나오니, 그 장면을 보며 남자 몸에서 터뜨릴 게 뭐가 있겠는가? 밤꽃향기액체밖에 더 있겠는가?

거기까지 추리해낸 후 나는 내 추리력에 내가 감탄하며 무릎을 탁 치기까지 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이 <인 더 컷>을 고르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손님을 그윽하게 쳐다보며 묻곤 했다.

“이거 보시면 후회하실 텐데, 그래도 보시겠어요?”

그럼 십중팔구는 도로 진열장에 꽂아버리곤 했다. 그 조치로 영화를 보고 나간 뒤 밤꽃향기액체가 엎질러져 있는 일은 잠잠해졌고 나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얼마 후 <인 더 컷>의 자매품 격인, <완전한 사육>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었다. 아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다시금 밤꽃향기액체가 발견된 건, 그래서 또다시 땡큐 화장지 10미터를 소모해야 했던 건 <완전한 사육>도 아닌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도 아닌, <와일드 씽2>도 아닌,<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나간 방에서였던 것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왜 밤꽃향기액체를 흘려야 했을까?

밤꽃향기액체를 흘려야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일까?

밤꽃향기액체를 흘릴 수 있어서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일까?

나는 끝내 그 밤꽃향기액체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분노에 몸을 떨어야 했다.

“왜! 왜!”

결국 답은 간단했다. 밤꽃향기액체를 분출시키는 영화는 따로 없었다. 어두우면 저지르는 것이었다. 그걸 깨닫기까지 수백미터의 땡큐화장지와 눈물을 흘려야 했던 걸 생각하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건 <러브 액츄얼리>를 보고 갔던 그녀가 일주일째 비디오방에 발길을 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영화를 괜히 추천해줘서 나 아닌 누군가와 ‘러브 액츄얼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조바심을 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의 전화번호라도 알아둘 것을, 아니면 신분증 검사를 해서 이름이라도, 나이라도 알아둘 것을 하는 후회로 뼈가 저렸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생김새뿐이었다. 그리고 나를 황홀하게 하는 그 미소 뿐…….


그런 후회로 비디오방 아르바이트에 점점 회의를 품던 어느 밤이었다.

그녀가 다시 비디오방을 찾아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