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이상] kiwi (키위) - 26. 묘향이야기 - 상

나비200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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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 26. 묘향이야기 



나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아니, 사랑이라고 믿게 했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당시 유명하지 않은 미남 탤런트였고, 나는 26의 매력적인 여자였다.


“너 쫌 이뿌다.”


나를 본 그의 첫마디는 이랬다.

시끄러운 음악과 번쩍이는 조명, 하루 쯤 미친 듯 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로 봐서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스물여섯이란 나이가 내게도 버거운 나이였기에 당시엔 웃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어서 반말을 찍찍 날려? 너 찍찍이야?”

“찍찍이? 우하하.”


술 취한 놈이 너무 멋있게 웃었다.

탤런트처럼 잘 생긴 놈한테 이쁘다는 말을 들었으니 감사한 일이었지만 헤헤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잘 생겨서 묘한 오기가 작동했던 것 같다.


“너 이쁘다구.”

“고맙구나. 너도 잘 생겼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잽싸게 내 자리로 갔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그것도 처음 보는 놈이랑 얘기를 길게 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언니, 왜 이제 와? 우리 부킹 할 건데 언니두 할 거지? 벌써 재경이랑 미숙이는 룸으로 들어갔어.”


그날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나를 예전 회사 후배들이 보고 싶다고 모인 자리였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후배들이라 분위기를 맞춰주려고 온 자리였는데 부킹까지 하자니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괜히 나이 탓을 들을까 알았다고 했다.


“갈게. 가는데 나 일본 사람이라고 할래. 한국말 못한다구. 그렇게 해줘라.”

“알았어. 그건 언니 맘대로 하구.”


남아있던 숙희와 함께 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하필 아까 그 잘 생긴 놈이 떡하니 앉아있었다.


“이 언니는 일본 사람이에요. 한국말은 전혀 못해요.”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사이에 숙희가 일을 내고 말았다.

될대로 되라지 하면서 나는 일본 여자인 척 연기를 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미있는 말을 들어도 이해를 못하는 척 해야 하기에 꾹 참고 앉아 있는데 아까 그 놈이 나를 아주 유심히도 관찰하고 있었다.


“얘 알아요? 얘 탤런트에요. 요즘 사랑의 밀회에 나오는.”


탤런트였구나. 어쩐지 잘 생겼다 했다하고 있는데 그 놈이 바로 내 옆에 앉았다.


“일본 분이시라구요?”


그놈이 내게 일본어로 물어왔다.

영어면 몰라도 일본어를 할 줄 알다니 이런 난감할 때가.

사실 나는 일본어를 잘 하지는 못했다.

능글거리는 저 자식 표정을 보니 정말 잘하는 놈인 것 같은데 제대로 걸렸구나 싶었다.


“한국 사람이지? 부킹이 싫어서 그렇지?”


또 일본말.

나는 일본 말로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놈은 아주 멋들어지게 웃더니 알았다고 말했다.

다행히 룸에 일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둘 뿐이었는지 아무도 우리의 대화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일본말로 대화를 했다.


“너 몇 살이야?”

“너는?”

“너부터 말해.”

“나 스물 여섯.”


고민을 조금 하다가 나이대접을 받고 싶어 사실대로 말했다.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너는 몇 살인데? 너 나보다 훨 어리지?”

“나는 스물 둘.”

“이제 반말하지 마라.”

“반말은 괜찮잖아.”

“아무튼 누나라고 불러.”

“알았어.”


대화를 해보니 생각보다 착한 애였다.

아는 것도 많고, 바람 든 탤런트라고 생각했는데 연기가 정말 좋아서 택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날 우리는 좋은 누나, 동생을 하자고 약속하며 연락처를 받고 헤어졌다.


그 날의 일을 잊고 있을 때쯤 그 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애 이름은···

그 애 이름은 제이였다.

이름을 말하면 알 정도의 탤런트니까 이름은 밝히고 싶지가 않다.


전화를 건 그 아이는 누나, 누나 하면서 갖은 교태를 부렸다.

남동생이 없어서인지 그것이 너무 귀엽게 보였다.

전화가 온 날 밥을 먹고 헤어진 후로 제이는 내가 정말 누나처럼 편했는지 전화도 자주 하며 밥사달라, 술 사달라 했다.

나도 그 애와의 만남이 즐거웠기에 제이가 갑작스럽게 전화를 해도 다른 약속을 미루고 나갈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많이 친해졌을 때쯤 술 사달라고 했던 제이가 그날따라 술을 너무나 많이 마셨다.


“너 오늘 술이 너무 과하다. 이제 일어나. 시간도 늦었어.”

“누나, 조금만 더 마실께. 나 정말 괴로운 일이 있어서 그래.”


얼마나 안 좋은 일이 있길래.

나는 그러라고 했지만 제이는 한 잔도 더 마시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일어나봐. 이젠 진짜 가야겠다.”

“누나, 너무 괴로워. 오늘 집에 안 갈래. 호텔 좀 잡아줘라. 응?”

“호텔은 무슨. 집에 가.”

“아니면 누나 집에서 잘래.”

“안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빨리 정신 차려.”

“알았어. 나 가까운 호텔에 좀 데려다 줘.”

“너 집이 어디야? 집에 데려다 줄게.”


그 녀석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나는 할 수 없이 가장 가까운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이미 제이는 호텔과 여관을 구분 못할 정도였고, 좋은 호텔에서 이 녀석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나와 제이를 두고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도 싫었기에 제일 가까운 여관방으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간신히 제이를 침대에 눕혀놓고 나는 침대 맡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제이가 내 손을 잡았다.

만난지 3개월이 지났지만 손잡은 것은 처음이라 흠칫 놀랐다.

은근슬쩍 빼려고 하는데 제이는 내 손을 더 꽉 주더니 말했다.


“누나, 나 팔 베게 해줘.”

“징그럽게 무슨 소리야?”

“누나잖아. 누나니까 해줄 수 있잖아.”


누나니까.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제이는 만나는 동안 날 여자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눈빛만큼은 그랬다.

그리고 너무 괴로워하는 제이였기에 누나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싶었다.


“그래. 이쪽으로 누워.”


옷을 입은 채 제이의 옆으로 누웠다.

제이는 내게 옷을 벗으라고 하지도 않고 내 팔을 베고는 품에 폭 안겨왔다.

동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가슴에 안긴 것은 참 난처한 일이었다.

내 마음은 모르는지 제이는 정말 편한 듯 내 가슴에 얼굴을 슬며시 문지르고 있었다.


“기분 좋다. 따뜻해.”

“힘든 일이 뭐야? 왜 이렇게 힘들어해?”

“힘들고 괴로웠었는데 지금은 편해졌어.”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어떤 것이 현명한 일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졌다.


“누나, 나 졸려. 잘래.”

“그래. 자. 대신 불은 안 끌께.”

“맘대로 해. 나 잔다.”


제이는 금방 잠들 것처럼 보여서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괜한 걱정이었어.

정말 누나라고 생각하는 걸.


나도 어느새 잠에 들어버렸다. 이상한 느낌으로 눈을 떴을 때 제이가 내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옷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면 당장 일어났을 테지만 제이의 행동은 성욕을 채우려는 행동 같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정말 얌전히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귀여운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듯.


나는 자는 척 몸을 뒤척였다. 기회가 되면 돌아누울 생각이었다.


“누나, 이러고만 있을께. 느낌이 좋아서 그래.”


그 순간에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누나가 아니라 여자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대답도 못한 채 그냥 자는 척을 했다.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 것이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땐 누나라는 책임감을 곡해하고 있었다.

왜 내 바닥까지 잘해주고 싶었던 걸까?

아마도 제이라서 일 거다.

내 남자로 삼고 싶을 만큼 좋은 아이였으니까.


제이의 손이 가만히 옷 속으로 들어왔다.

손은 매우 아주 천천히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언제 그의 손이 닿을지 예측이 가능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닿기 전에 손길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신음이 터져 나올 것을 몇 번이나 참았지만 결국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나의 신음 소리는 오히려 참고 있던 내 본능을 터트린 꼴이 되어버렸고, 내 손은 어느새 제이의 옷 속으로 들어가 그의 등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의 등은 이미 땀으로 젖어있었다.


잠시 후 제이가 내 속으로 들어왔다. 제이는 서두르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여 주었다.


“누나, 처음이야?”

“아니.”

“처음인 것 같애.”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그 것을 본 제이는 조금씩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