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1부 9막 : 여로(旅路) #01 & #02)

J.B.G200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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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봄이 되어 농사철이 되면 식량수급을 위해서 중앙대륙의 모든 국가가 잠정적으로 서로간 침략을 자제하고 암묵적으로 전쟁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대부분의 국가가 정보수집에 더욱 더 열을 올리는 시기였다. 대장군 철기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직접 정보수집을 위해 기녀 초란이 있는 중림부를 찾았다.

 

“그러니까… 저에게 6개월여를 장군님과 동행하며 부부행세를 해 달라는 것입니까?”

“초류향(草流香)에는 그만한 보상을 이미 했다.”

“그러나 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다 헛일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거절하는 것이냐?”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

“네! 제 청을 들어주시면 기꺼이 대장군님을 따라 나서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몇 년 전에 거절하셨던… 장군님의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

“3년이 넘게 장군님을 모시었는데… 아직도, 아니 되는 것입니까?”

“…”

 

그녀의 청에 무거우면서도 긴 침묵이 흘렀다.

 

“들려주시지… 않겠어요?”

“…”

“앞으로 닥칠 운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장군님이 걸어온 운명의 길… 말이에요.”

“끝내 벗어나지 못한 내 운명…”

 

철기주는 결국 초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깊은 회상에 잠겼다.

 

“난 사실 노비의 자식이었다. 물론, 그 이전의 신분은 또 다른 것이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태어날 때 이미 천민이었다. 다만 그뿐이야.”

“천민의 피라…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 말이에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은구요.”

“그런가…? 어찌 되었든 그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단다. 항상 귀족과 제후들로부터 천시를 견디며 살아 왔으니까… 그런데 제국이 붕괴되면서 평민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어. 내가 태어나 자란 지방은 적산에 인접한 곳이었는데, 그곳을 다스리는 적성주가 아주 포악하고 탐욕이 많은 사람이었거든… 그래서 항상 고통 받는 백성들을 보며 자라왔다. 그런 와중에 나의 스승이자 조부님께서 내게 무예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몇년 후에 용의 대군이 적성을 얻기 위해 왔을 때, 나는 곧 적성주로부터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용의 군에 자원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나와 형제의 의를 맺은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단다. 그리고 새로운 스승님도…”

“그분들은 지금 어떤 분들이시죠?”

“물론, 지금은 용의 황제가 된 적룡 아우와 용의 전군의 전략을 책임지는 군사 미란 이란다. 그리고 당시 대장군이었던 미란의 조부이신 협성장군께서 나의 스승이 되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평민에서 장군 적청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이후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 나는 곧 황도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용의 황제 건(建)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 아버지로 말이다.”

 

여기에서 초란은 잠시 기억을 더듬으여 철기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적청이라니…”

“그것은 나의 첫 이름이니라…”

“자결했다는…”

“그래, 난 스스로를 죽였다. 아내와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태어난 거야…”

“그 사연이 궁금하군요… 스스로 죽고 다시 태어났어야 했던 사연…”

 

철기주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허나 황도라는 곳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단다.”

“정쟁… 인가요?”

“그래… 나는 결국 황제에게 버림받아 이곳 중림부에 봉인되었다.”

“…”

“매일매일 배신감과 회한에 치를 떨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다시 따뜻한 손을 내민 여인이 있었다. 바로 그 담벼락에서…”

“장군님을 처음 만난 그 담벽락이 그런 사연이 있는 곳이었군요.”

 

말을 잊는 초란이 본 철기주의 눈은 너무나 슬퍼 보였다.

 

“그래… 그 여인은 자신을 운향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아무런 사심 없이 나를 먹이고 재우며 돌봐 주었단다. 죽어가는 영혼인 나를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 여인과 함께 과거의 적청이라는 이름을 버린 채… 무(誣)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모든 것을 잊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 남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하고는 철기주는 갑자기 말을 중단해 버렸다. 그가 말을 중단하자 초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신 거군요.”

“그래…”

“…”

“나는… 나를 찾아 온 황제와 미란을 따라 나섰다. 위험에 처한 그들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떠나면서도 아내와 아들에게 꼭 돌아올 것이라 다짐했는데… 그런데…나는…”

“장군님…”

 

철기주는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죽은 아내와 아들을 회상하며, 처음으로 초란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나는 목진의 군사에게 아내와 아들을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야.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초란은 천하의 영웅답지 않게 눈물을 보이고 있는 철기주를 꼭 안아 주었다.

 

“가여운 분…”

 

철기주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이 창을 든 이후로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나신 것입니까?”

“그래…”

 

초란은 철기주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 장군님도 복수자 이십니까?”

“…복수자…?”

“네”

“…아니다. 그것은…”

“…”

 

초란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슬어 내렸다.

 

 

 

#02

 

며칠 후.

여행을 위해 중림을 떠나기 전 초란은 학사 현애규를 찾아갔다.

 

“제가 없어지면 걱정을 해 주실 유일한 분이기에…”

“알았다.”

 

현애규의 집에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먼저 손님이 와 있었다.

 

“누가 와 있지?”

 

그때 제자 중 하나가 와서 말 했다.

 

“유시찬(柳施燦)이란 분 입니다.”

“유시찬 이라면…”

“네, 원래는 목진(木眞)의 서현(西咸)이란 곳에 적을 두신 선비분 이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진 왕자들의 스승이라고 들었는데…”

“네, 목진의 왕도 그분께 학문을 배웠다고 하죠. 하지만, 지금은 관직을 버리고 여러 나라의 선비들을 찾아 다니며 논하는 것을 즐기신다 합니다.”

“그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철기주가 초란에게 물었다.

 

“이곳은 시종들도 모두 이리 박식한 것이냐?”

“제자들이 심부름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잠시 기다리셔야겠네요.”

“그래…”

 

두 사람은 옆 방으로 안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옆방에서 논하는 이야기들이 또렷하게 들렸다.

 

“라 제국의 황제가 시해되면서 발생한 지금의 혼란은 본시 사람들의 마음이 악하다기 보다는 선왕이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현애규가 이리 말하자 유시찬이 되물었다.

 

“그럼 선생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선왕에게 제후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 정당하다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선왕이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할 수는 없었는지요.”

“선왕은 진언을 하는 수 많은 신하들을 참수해 패림의 강변에 뿌려 물고기와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이 같이 했습니다.”

“선왕은 이미 선한 마음을 잃어서 그것을 되돌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 입니까? 그것은 선생이 말한 인간이 본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본시 악한 것이 아니라 선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 입니다. 한 백성이 선일 잃으면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그렇지 못 한 것입니다. 그가 선을 잃으면 만 백성이 그 피를 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잃은 왕이 나오면 제후들이 그를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워야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반드시 인(仁)으로 나라는 다스리는 자여야 합니다.”

“어진 성품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까? 죽은 선대의 황제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려 했던 자 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마음으로 형벌을 가볍게 하여 더 많은 죄를 짓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오직 한 사람의 문제일 수 있겠습니까?”

“선왕이 법의 형벌을 가볍게 한 것은 스스로가 그 법도를 벗어나기 위함 이었습니다. 백성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정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어서 법도를 세웠다면, 만 백성이 그를 따르고 그는 성군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인(仁)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해도 백성이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인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법도가 선 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도가 서지 않은 상태에서 인치는 사람을 마음을 방심하게 만들고 절제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스스로 살을 에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목진의 황제께서는 한 사람의 목숨까지 측은히 여기신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 조차 항상 신중하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제국을 통일하고 자신의 정치를 실현하겠습니까? 안정 된 기반 위에 인치가 서는 것 입니다.”

“인치가 서야 법도가 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생은 법도가 선 연후에야 인치가 가능하다는 것 입니까?”

“목진의 왕은 어찌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까? 그것은 악한 왕을 인간의 힘으로 제하기 위함 입니다. 그것은 비단 한 나라 안의 작은 집단의 단위에서도 적용 된다 생각 합니다. 목진의 왕은 선대의 악한 왕을 몰아냈습니다. 그리나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지금도 나라의 곳곳에 그러한 악이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제하기 전에 다시 선한 마음으로 돌아 선다면, 그들은 독버섯처럼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법도를 세운다 하여 반드시 인치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모든 것을 법으로 다스린다면 사람들은 진정으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다만, 두려움으로 따를 뿐입니다.”

“그것은 법도의 무겁고 가벼움에 있는 것입니다. 선대의 왕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에는 가벼웠고,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에는 오히려 무거웠습니다. 법이 평등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백성이 따르지 않은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는 법의 무게 뿐 아니라 법의 적용이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선대왕이 무너져 내린 것 입니다. 법이 백성 앞에 평등하다면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이를 따를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인치나 덕치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럼 선생께서는 지금 목진의 법이 평등하지 못하다는 것 입니까?”

“그러한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목진의 왕은 법의 적용에 있어서 정리가 베어있다는 것 입니다. 그러한 정리는 자칫 우유부단함으로 이어져 잘 된 법도마저 무너뜨릴 우려가 있다는 것 입니다. 정해진 법의 적용는 이성적이고 냉철해야 합니다. 감정에 따라 그 법의 적용이 바뀌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새로이 법을 정비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 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논쟁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대화가 끝난 것 같아요.”

 

저녁이 되어 손님이 가자 초란은 현애규에게 철기주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동안 떠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현애규는 다만 이례적인 인사만 할 뿐 철기주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자를 소개시켜 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

 

저녁까지 먹고 난 후 철기주가 밖에서 길을 재촉하듯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초란은 그만 자리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

 

“저… 선생님께서는 적령장군께 소개한 제자 중 으뜸인 기현(基顯)아우를 어찌해서 철기주 장군에게는 소개하지 않으시는 거죠?"

“철기주 대장군은 충신이다. 그것이 이유이다. 그는 신의를 중시하기 때문에… 용에 나의 제자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현이도 시대가 낳은 영웅의 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아이를 죽여야 할 운명이다.”

 

초란은 잠시 놀랐지만, 곧 되물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모든 운명을 결정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게도 정해진 운명을 따라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부끄러운 말을 한 것 같구나. 허나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이처럼 조심스럽게 되고 마는구나. 어찌 되었든, 내가 판단하기에 적령… 그녀는 비록 지금은 복수자로 마음이 병들었지만 아직 눈이 흐려지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이다. 그녀는 군주에게 지킬 신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진정으로 스스로 모신 군주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 그녀는 주군을 위해 이 아이를 죽일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를 주군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겠군요…”

“아마도… 적령과 철기주. 이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이 시대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영웅이다. 그러나 두 영웅 중 누구인가 이 아이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적령이다.”

 

그러나 초란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혹시, 기현이는 선생님에게서 만들어진 적령님이 장차 모셔야 할 주인인가요?”

 

갑작스러운 이 물음에 현애규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초란이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하지만… 적령님은 그러한 운명을 따를 분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다만, 적령이나 또한 기현이가 무슨 길을 선택할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하늘만이 아시겠지…”

 

초란은 생각했다.

 

‘하늘이 안다는 것은 그것은 정해진 운명… 어찌할 겁니까… 적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