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러브송 < 13 >

나비200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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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어젯밤 팔 골절상을 입었어. 전화할 거지만 회사에 말해줘]


동이 트기 전 혜림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출근 시간에 맞춰 하루 쉬어야겠다고 전화를 할 셈이었다. 눈을 뜬 건 혜림이의 문자가 왔음을 알려주는 핸드폰의 떨림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내일 출근 가능하다 말씀드릴게요.]


호들갑스럽지 않은 문자였다. ‘어머, 그게 무슨 일이에요?’, ‘많이 아파요? 왜 다치셨어요?’, ‘놀랐어요. 윤섭씨 만나다 그러신 거예요?’,  등의 말이었다면 예의상의 호들갑스러움, 일상의 흥미로운 사건쯤으로 여기는 것에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 ‘내일은 나올 수 있으신가요?’, ‘몇 시에 전화 하실 건데요?’ 등의 말이 이어졌다면 화가 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림이는 늘 웃는 아이었지만 때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할 줄 아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핸드폰이 떨렸다.


[걱정됩니다. 오후에 전화하겠습니다.]


윤섭씨였다. 그의 간결한 문자는 아파서 정신이 없을 내 신경을 건들지 않겠다는 뜻 같았다. 별 말은 아니었지만 단어 하나하나 신경을 썼으리라.

전화를 달라고 귀찮게 하는 것도 아니고 통화를 하고 싶으니 전화를 하면 오후쯤에는 받아주세요, 하는 공손함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였다.


휴일이 아닌 평일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부산함이 나와 상관없이 하나의 풍경으로 흘러갔던 것이 언제였던가. 모처럼 쉬는 날이 되면 지겨운 회사에 매여 있던 것을 보상받으려 미친 듯이 돌아다녔던 내게 이런 느긋함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오늘만큼은 사람들의 걱정을 받으며 그저 쉬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음 날.


“문대리! 20대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다는 거야?”


과장님의 따가운 관심이 내게 쏠렸다. 역시 술을 얼마나 먹어댔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눈빛은 그랬지만 더러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 문대리. 운동하다 다친 거야?”

“아니요. 길 가다 넘어졌어요.”

“길 가다?”


그런 시선마저 술 먹었구나, 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저 길을 거닐다 넘어졌다고 순순하게 바라봐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윤섭씨 또 전화를 했군.’


술 먹고 길바닥에 넘어진 여자라는 오해 때문이었을까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윤섭씨의 전화가 오자 왠지 모를 반가움이 들었다.


“윤섭씨!”

- 반가워하시는 목소리네요.

“저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반갑게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 그 뿐입니까? 하하. 섭섭하지만 문희씨 목소리만은 듣기 좋네요. 몇 시에 끝나세요? 제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윤섭씨가 왜요?”

- 들어야 할 이야기도 있고 사고의 책임이 제게도 있으니 책임을 져야죠. 집에 모셔다 드릴게요.


난 알았다고 했다. 약속 시간을 정한 후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용준씨에게도 전화가 왔다. 어제 결려온 전화 통화에서 다친 이야기를 했더니 역시 집에 데려다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잔업이 많아 늦게 끝날 것 같아요.”

- 근처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일 보세요.

“오늘은 그냥 택시를 타고 들어가겠어요.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요.”

- 굳이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순순히 전화를 끊는 그가 이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불편한 팔로 일한 것만으로도 너무 지치는 하루였다.


[회사 앞입니다.]


윤섭씨의 문자를 받고 내려갔을 땐 윤섭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용준씨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던 거야? 이거 참 곤란하네.’


“팔은 다치신 게 맞군요.”


용준씨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

“우연히 만났어요. 설마 했는데 문희씨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약속까지 하고 말입니다. 돌아갈까 하다 문희씨 말을 직접 듣기 위해 남아있었습니다.”

“예.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거죠?”


거짓말을 하고 속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과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정말 뒤로 다른 남자를 만난 나쁜 여자밖에 안 되는 거니까. 오겠다는 윤섭씨를 막지 않았던 건 하지 못한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교제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확실히 전하려 했던 것이다.


“윤섭씨와 사귀시는 겁니까?”

“아닌데요.”

“그럼 됐습니다. 형의 일방적인 플레이라는 제 추측이 맞는 것 같군요. 나머지 이야기는 윤섭형이랑 하겠습니다. 일단은 제 차에 타시죠.”

“왜 문희씨가 네 차에 타니? 약속을 하고 온 건 나라구.”

“형! 형 대접은 여기까지예요. 형도 동생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지키지 않았으니까.”


용준씨의 양미간은 잔뜩 찌그러졌고 눈은 더욱 무섭게 변했다.


“지금 문희씨한테 내 차를 타라 서로 그런 말을 하는 건 문희씨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야. 일단은 택시를 태워 드리자.”

“왜 제 차를 탈까봐 불안한 건가요? 형만 남기고 우리 둘이 떠나버릴까 두려운 거냐구요?”

“넌 약속조차 거절당했어. 원래는 내가 이긴 싸움이라고.”

“형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동생의 여자를 뺏는 치사한 형인 줄 몰랐어요. 그리고 문희씨가 형을 만나려고 했던 건 형이 먼저 전화를 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예요.”

“아무튼 일단 문희씨를 보내드리고 우리 둘이 얘기하자. 너와 내가 먼저 끝내야 할 얘기야.”


용준씨도 동의를 하는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내 손을 잡아끌고 앞서 거리로 나섰다. 그런 모습을 보는 윤섭씨는 화가 난 듯 했지만 일단은 두고 보려는지 말리지는 않았다.


“문희씨. 잘 가요. 제가 전화할게요. 그리고 참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에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그 상대가 형이 아니라 누구라도 한 대 쳐버리고 문희씨를 데리고 올 거라고요. 알겠어요?”

“전 용준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 제가 잘못한 것도 없고요.”

“나중에 얘기해요. 우리는 다시 만날 사람들이니까요. 걱정 많이 했어요. 아프지 말고 오늘 잘 자요. 알았죠?”


방금 소리를 쳤던 사람 같지 않게 용준씨는 다정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 눈빛 때문인지 그냥 알았다고 했다. 사실 구구절절 설명할 상황도 아니었고 택시도 빨리 잡혔다.


“들어가요. 오늘 얘기가 길어지면 내일 전화 할게요.”


집으로 돌아왔을 땐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시는 중이었다.


“엄마, 다녀왔어요.”

“뭐 타고 왔니?”


딸은 염려가 되었는지 묻는다.


“택시.”

“으이구.”

“왜 또? 그럼 아픈데 지하철 타고 와?”

“데려다 줄 남자도 하나 없어? 그 때 병원에 있던 남자는 뭐야? 다치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치료비는 못 줄망정.”

“그 사람이 치료비를 왜 줘?”

“책임이 있잖아.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이고, 남자고.”

“길바닥에서 혼자 벌러덩 자빠진 건 나라구. 그 사람 책임이 아니야!”

“이 기집애 봐. 마음을 홀라당 뺏겼구만. 이십육년 키워준 에미 앞에서 남자를 감싸고도는 꼴 좀 봐. 니가 헛밥을 먹었구나. 세상에 제일 좋은 게 엄마야. 그 다음이 동기간이고. 남자에게 마음 줘도 다치는 건 너 뿐이야. 내가 몇 번을 말했니? 남자를 만나도 마음은 주지 말라고. 남편도 따지고 보면 남이야. 알아?”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둘은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있을까? 싸움은 윤섭씨에게 불리할 것 같은데.’


마음은 이상하게 윤섭씨를 응원하고 있었다. 오늘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 말하려 했던 남자를 말이다.


***


다음날 회사 앞에 나타난 건 용준씨였다. 마치 둘의 싸움에서 용준씨가 이겼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윤섭씨는요? 윤섭씨는 포기한 건가요?”


밝은 표정으로 날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설득이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그래서 때렸어요? 용준씨는 그래도 동생이잖아요. 때리는 건 안되죠.”

“때리다뇨? 절 어떻게 보시고.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나 지금 흥분한 거야? 웬일이니? 윤섭씨가 맞던 말던 무슨 상관이라구.


“희씨!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뭔가요?”

“······.”


느닷없는 질문에 놀랐다.


“만약에 저의 모든 점이 좋으셨다면 형을 몰래 만나지는 않으셨겠죠. 그래서 묻는 거예요. 문희씨가 마음에 안 드는 점 제가 모두 고치겠습니다.”

“오해를 하시는군요. 저는 용준씨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불만같은 것 느껴본 적 없구요.”


용준씨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남자로 보시고 말씀해주세요.”


진지한 용준씨의 눈빛은 나를 뚫고 지나갈 만큼 날카로웠다.


“용준씨를 남자로요?”

“예. 저는 문희씨의 남자가 되고 싶어요. 희씨 곁에서 친구로 남아 평생 흘끔거리며 아쉬워하는 역할은 취미에 없어요. 이 순간부터 절 남자로 느끼는 겁니다. 당신의 남자로요.”


‘용준씨를 남자로? 뭐야, 난 그러기 싫은데. 하지만 한 번 느껴봐?’


그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둥이인 이 남자와의 게임에는 머리를 많이 써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