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러브송 < 15 >

나비200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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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제 내 인생에 봄이 찾아 온 건가? 앞으로 있을 두 남자와의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은 일상적인 출근조차도 흥겹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도 회사 앞으로 누가 올지도 모르지.’


옷을 고르는 손길은 어느 때보다도 까다로웠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내 자신에게 관대하게 지냈던 것 같았다. 입사 초기에는 검은 정장에 묻은 하얀 먼지 하나에도 소스라치며 신경을 썼었는데 요즘은 눈에 띄는 가장 멀쩡한 옷을 집어 입고 허겁지겁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 화장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검열이 남자 때문에 다시 시작된 것에 조금은 한심스러웠지만 어제보다는 발전적인 모습이지, 하며 만족하기로 했다. 평소보다 30분 이른 기상 시간은 간단한 영양팩까지 허락해 주었기에 피부는 화장을 잘 받아준 듯 했다.


‘너무 화사하다. 이정도면 혜림이랑 친구라고 해도 믿지 않을까?’


거울 속의 나는 몇 년이 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감만은 되찾게 된 것이 분명했다.


“대리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어, 혜림씨도 일찍 나왔네.”

“저야 신입이잖아요. 대리님! 꽃바구니가 대리님께 와서 제가 받았어요. 책상 밑에 넣어두었구요.”

“그래? 고마워.”


누가 아침에 꽃을 보낸 걸까? 서둘러 간 자리에는 막 피어나는 분홍장미 30여송이가 담겨있는 꽃바구니가 있었다.


[예쁜 꽃을 받은 문희씨를 여직원들이 부러워하겠죠? 늘 부러움을 살 수 있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황보용준]


이건 흡사 광고문구 같았다. 은근한 애정표현이 아니라 그런 이유로 자신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홍꽃다발은 용준씨의 말대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게 해주었고, 나는 그런 시선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부러움은 곧 시기와 질투로 바뀌어 버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또 하나의 꽃다발이 도착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윤섭씨가 보낸 튤립 꽃다발이었다.


“문대리! 정말 오늘 아무 날도 아니야?”

“예. 아무 날도 아닌데요.”

“대리님! 오늘 어머니 생신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


계속 수상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과장님과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혜림이었다.


“대리님은 인간관계가 정말 좋으신가 봐요. 어머니 생신을 챙기는 사람도 많네요.”

“에이 혜림씨. 알았어? 나야 별 일 아니라 말 한했던 건데.”


그제야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바뀐 과장님을 뒤로 하고 혜림이와 화장실로 향했다.


“어머니 생신이라니?”

“지금 회사 사람들이 대리님 양다리 걸치는 것 아니냐, 하는 소문이 돌아서요.”

“그랬어?”

“그런 소문 들어서 좋을 것이 없잖아요. 인기 좋은 건 좋지만 꽃은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겠어요.”

“하긴. 사실 무근은 아니지만 그런 소문은 내키지 않네.”


혜림이의 기지에 놀라면서 어서 빨리 남자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공평하겠다, 싶었다.


“용준씨!”


먼저 용준씨. 꽃을 먼저 보냈으니 전화를 먼저 거는 것이 공평하겠지.


- 문희씨! 꽃은 잘 받으셨나요?

“예. 분홍색의 화사함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저 오늘 분홍색 옷을 입었거든요.”

- 그 모습 보고 싶은데요.

“그럼 오늘 만나죠.”

- 아쉽지만 짝수 날이잖아요. 내일 만나는 건 어때요?

“될 수 있으면 오늘 만났으면 하는데요. 제가 정한 룰이 있어요. 그것에 두 분이 따라 주셨으면 해요.”

- 룰이라뇨?

“꽃을 보내시는 것도 그렇고 불필요한 경쟁을 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용준씨와 세 번의 데이트. 그리고 윤섭씨와 세 번의 데이트. 그 후에 제 마음을 결정하겠어요.”

- 마음에 드는 룰인데요. 저는 불필요한 것을 싫어하는 문희씨의 그 점이 좋아요. 저도 그러니까. 우린 꽤 잘 통하죠?


용준씨는 흔쾌히 동의를 했다. 다음은 윤섭씨.


- 각자 세 번이라고요?

“예.”

- 두 남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시겠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지금은 두 분 다 처음 만나는 기분으로 만나보려 해요.”

- 용준이가 좋은 녀석이 아니라는 제 충고는 무시하시는 군요.

“그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지금 윤섭씨가 용준씨 험담을 하시는 건 오히려 윤섭씨에게 좋지 않은데요.”

-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마음에 들지 않지만 따를 수밖에요. 어차피 선택권은 문희씨에게 있으니까요.


윤섭씨도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오케이. 두 남자의 동의를 얻고 나서 공정한 결정을 위해 채점 기준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가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6번의 데이트가 한다 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뭐가 좋을까? 일단 공통 관심사. 그리고 음······. 다음은 박식함. 난 박식한 남자에게 끌리나봐. 모르는 것을 자상하게 알려주는 남자는 정말 멋져 보인단 말이야. 그럼 그 다음은 자상함으로 하자. 건강함, 주변 인간관계. 와! 생각보다 봐야 할 게 많네.’


이건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자 탤런트의 몸을 면밀히 관찰하여 보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채점기준은 앞으로 만날 때 즐거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데 역점을 두기로 했다. 결혼, 뭐 결혼은 아직 내게는 먼 일 같으니까 말이다.


퇴근 후 만난 용준씨는 최고급은 아니었지만 깔끔한 일식당으로 날 안내했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분위기 좋은 바로 향했다.


“이 남자 데이트 코스엔 늘 술 마시는 곳이 빠지지 않는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예? 아니요.”


용준씨는 여자의 마음을 읽는 기술이 있는 듯 했다.


“저는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요. 술자리 전에는 늘 서로가 감추는 진실을 말하길 기대하죠.”

“그런 점에서 술이 확실히 매력적이죠.”


술김에 진한 스킨쉽을 원하는 것은 아니고? 왠지 용준씨를 보면 그런 점이 부담스러워졌다.


“자, 건배!”


쨘.

좋은 술잔인지 잔이 부닺치는 소리가 참 고왔다.


“문희씨는 꼬냑 마셔본 일 없다고 했죠?”

“예.”

“꼬냑은 와인을 증류해서 만든 술이에요. 알고 계셔요?”

“아니요.”

“술 마시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술잔을 손바닥으로 쥐어보세요. 이렇게요.”


동그랗게 생긴 꼬냑 잔을 손으로 쥐었다. 참 예쁜 잔이란 생각이 들었다.


“꼬냑은 이렇게 체온으로 온도를 올려 마시는 술이에요. 와인과 친척이지만 그 점은 다르죠.”


용준씨는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분위기를 리드하며 자상한 설명을 잘 해주었다. 그런 모습이 사람을 편하게 느끼게 하면서도 조금씩 기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쩌면 스키장에서 곤란을 당하고 있을 때 나타난 그 순간에 그 기댐이 시작 된 것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유리잔이 내 체온으로 점점 따뜻해지는 것처럼 이 남자도 차가웠던 내 마음을 점점 녹여내며 마음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제 마셔보세요.”

“예.”

“어때요?”

“쓴데요. 술은 늘 써요.”

“쓰죠. 진실의 맛을 닮아있으니까요. 이제 문희씨 진실한 마음을 조금은 보여줘요.”

“저 거짓말 한 것은 없는데요.”

“또 은근히 말을 돌리시네요. 감정 표현은 건강한 거죠. 문희씨는 제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감정 표현도 자제하시는 것 같고요.”

“제가 그랬나요?”


사실 그랬다. 윤섭, 아니 윤태씨를 본 날부터 쭉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용준씨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늘 나에게 잘해주려 애썼던 사람인데.


‘그래. 마음을 열어보자. 무섭긴 하지만 용기를 내는 거야. 마음을 닫아놓는 것은 비겁한 일일지도 모르지.’


“전 용준씨가 좋아요.”

“어떤 점이요?”

“모르겠어요. 특별히 어떤 점에 끌리는 지는요.”

“이제 솔직해 지셨네요. 사람이 누군가에게 끌린다는 거 이유를 모를 때가 더 많은 법이니까요.”

“예.”

“하지만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왜 문희씨가 제게 끌리는지요.”

“꼭 저도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전 알아요. 우리는 비슷해요. 그래서 서로에게 끌리는 것이죠.”

“전 바람둥이 아닌데요.”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용준씨는 웃지 않고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바람둥이요? 저 남들 보기엔 바람둥이 맞아요.”

“쉽게 인정을 하시네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바람둥이들 불쌍한 사람들이란 것 아세요?”

“예? 바람둥이들이 불쌍하다. 그 반대 아닌가요? 바람둥이에게 마음을 뺏긴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괴롭고 한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바람둥이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사람이 어느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바람둥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겠죠.”

“그래요. 단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마음이 양분되어 있는 거예요. 이 사람에겐 이만큼의 사랑만 저 사람에도 이만큼의 사랑만.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죠. 한 사람을 사랑하다가 자신이 받을 상처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단 한명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여러 사랑은 하지 않겠죠.”

“······.”

“전 여러 갈래로 흩어졌던 제 마음을 문희씨가 묶어 줄 거라고 믿어요. 이젠 더 이상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도와줄래요? 문희씨가 도와준다면 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하하. 첫 번째 데이트부터 너무 부담을 드렸나요? 술이 들어가니 진실이 나오는 군요. 아, 이 참에 하나 더. 문희씨도 바람둥이 기질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제가요? 전 아니에요.”

“아닌 분이 두 남자를 두고 더블데이트를 하시며 즐기시나요?”

“지금 절 비꼬시는 거예요? 흔쾌히 동의하시는 걸로 아는데.”

“절대 비꼬는 것 아닙니다. 문희씨 마음이 흩어지기 전에 잡아주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 마음을 전부 제게로 모아오고 싶은 것이죠.”


정말 그런 걸까? 그래서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건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기는 했다. 두 남자를 동시에 그것도 서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며 데이트를 한다. 내 친구가 그랬다면 흥분하며, 미쳤구나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가 용준씨를 닮아있든 아니든 바람둥이가 용준씨 말대로라면 불쌍하다는 말은 맞는 듯 했다. 마음을 모으지 못한다는 것. 그 일이 내 일이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어서 빨리 내 마음을 모아 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졌다.